18장 — 의심의 그림자 (내면의 안개 속으로)
밤은 길고도 끈적하게 늘어져 있었다. 마치 식탁 위에 오랫동안 방치된, 차갑게 식어버린 잔여처럼 희미하고 답답한 기운이 방안을 가득 메웠다. 창밖을 스쳐 가는 희뿌연 달빛은 구름 사이를 미끄러지듯 유영했고,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가도 이내 자취를 감추곤 했다. 마치 저 하늘의 등불마저도 이 위태로운 세상을 밝힐 가치가 있는지 망설이는 듯, 그렇게 주저하는 빛은 주인공의 마음을 더욱 흔들었다.
주인공은 창가에 앉아 하염없이 밖을 응시했다. 거친 비를 피해 급히 걸음을 재촉하는 몇 안 되는 행인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그의 내면은 고요하기는커녕,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혼돈에 휩싸여 있었다. 온 세상의 소리가 밖에서 잠들었다 해도, 그의 머릿속은 수많은 생각들로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어둠 속에서 들었던 그 적의 목소리가 끊임없이 그의 뇌리를 맴돌았다. "그 목소리들은 너에게서 힘을 앗아갈 뿐이다. 그들은 결코 너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야, 그저 너를 파멸로 이끌 뿐이지." 이 섬뜩한 경고는 이제 주인공 자신의 목소리처럼 그의 의식을 잠식하고 있었다. ㅠㅠ
그는 자신이 들었던 모든 '목소리'들을 끔찍하리만치 생생하게 다시 떠올렸다.
먼저 형의 목소리. 그것은 날카롭고 매섭게 그를 질책하는 듯했다. 마치 날 선 칼날이 그의 심장을 겨누는 것처럼, 듣는 내내 숨이 막히는 압박감을 주었다. 형과의 대화가 끝나고 나면 그는 늘 깊은 공허함에 시달렸다. 마치 소중한 어린 시절의 한 조각이 통째로 다시 뿌리째 뽑혀 나간 듯한, 돌이킬 수 없는 상실감에 온몸이 무기력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때마다 그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과거의 유령들에게 지배당하고 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어머니의 목소리. 그 목소리는 따스하고 포근하게 그를 감싸 안는 듯했으나, 그 이면에 드리워진 깊은 후회와 아련한 슬픔은 지독한 독처럼 그의 심장을 서서히 옥죄어왔다. 그 밤 이후, 그는 새벽이 밝아올 때까지 단 한 순간도 편히 잠들 수 없었다. 어머니의 목소리가 남긴 알 수 없는 숙제처럼, 그의 뇌리는 밤새도록 그 말을 맴돌았고, 그것이 자신에게 무엇인가 더 큰 책임을 요구하는 듯한 강박에 시달렸다.
마지막으로 꿈의 목소리. 그것은 아련하고 아름다워 한없이 부드럽게 속삭이는 듯했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럴수록 그는 결코 현실이 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사무치는 상실감을 맛보아야 했다. 꿈이 간직한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은 오히려 현실의 쓰라린 무게를 더욱 선명하게 일깨웠고, 그는 영원히 손에 쥘 수 없는 환상 앞에서 고통스러워했다.
정말이지, 모든 목소리들은 그가 듣고 난 뒤에도 잊히지 않는 흔적을 남겼다. 그의 내면 깊숙이, 때로는 무의식 속에 선명하게 새겨진 그 자국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들은 그를 올바른 길로 이끄는 나침반의 바늘이었을까, 아니면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상기시키는 아물지 않는 상흔이었을까? 그는 도저히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모든 소리를 차단하고 오직 자신 내면의 심연을 응시하려 했다. 하지만 그가 찾으려 했던 명확한 해답의 흔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오직 텅 빈 공허함만이 그를 맞이했다. 어쩌면, 어둠 속에서 그를 기다리던 적의 말이 사실이었을지도 모른다. 자신은 단지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무기력한 꼭두각시, 어쩌면 무자비한 운명의 장난감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이 생각은 그의 영혼을 조각조각 부수는 듯한 고통을 주었다.
바로 그때, 섬광처럼 하나의 생각이 그의 머리를 강타했다. 문득 기이한 통찰이 그의 의식을 휘저었다. '만약 저 목소리들이 이미 죽은 자들이나 희망의 상징인 꿈에서 온 것이 아니라면 어떨까?' 만약 그 모든 목소리가 단지 '자신'의 영혼에서 반사된 그림자에 불과하다면? 그의 심장이 다시금 격렬하게 요동쳤다. 자신만큼이나 정확하고 잔인하게 그의 마음을 뒤흔들 수 있는 자가 세상에 또 누가 있단 말인가? 그의 가장 깊은 곳에 숨겨진 비밀스러운 두려움과 애써 외면했던 간절한 희망까지도 꿰뚫고 있는 존재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오직 '자신'뿐이었다. 이 깨달음은 충격과 함께 새로운 형태의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답답한 방안을 미친 듯이 걷기 시작했다. 낡은 마룻바닥은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마치 그의 내면의 혼란에 맞서듯 저항했다. 그의 발걸음 하나하나에 삐걱거리는 소리는 점점 커져갔다.
"만약 이 모든 것이 내 영혼의 목소리라면," 그는 흐릿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대체 왜... 왜 타인의 목소리를 빌려 나에게 말을 거는 거지?"
그러나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창밖의 거센 바람소리가 그의 물음에 대한 유일한 답이었다. 끊임없이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 소리만이 그의 귀를 채웠다. 또르륵, 또르륵. 마치 세상의 모든 소리가 그의 질문에 침묵으로 응답하려는 듯했다.
주인공은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의 머릿속을 짓누르는 생각들은 마치 너무 꽉 조이는 옷처럼 그를 숨 막히게 했다. 답답함에 그는 곧 터져버릴 것 같았다. 그 순간, 문득 아버지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의 심장은 고통스럽게 죄어왔다. 아... 아버지의 목소리는 아직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만약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면… 그것은 그에게 따스한 격려를 건넬까, 아니면 차갑고 날카로운 질책을 쏟아낼까? 이 불확실성은 그의 존재를 뒤흔드는 가장 큰 공포로 다가왔다.
그는 깨달았다. 이 모든 목소리들이 주는 가장 잔혹한 고통은 바로 '기다림'이라는 것을. 매일 새로운 아침이 찾아올 때마다, 그것은 마치 위험한 운명과의 주사위 게임처럼 다가왔다. 내일은 또 어떤 목소리가 그를 찾아올까? 사랑의 망령일까, 죄책감의 그림자일까, 아니면 고통의 생생한 반영일까? 누구를 마주하게 될지 모르는 불안감 속에서, 그는 매일 아침 깨어나야 했다.
그렇다. 적의 말은 정확했다. 이 모든 과정은 그의 힘을 뼛속까지 소진시켰다. 하지만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이 두려움과 의심의 거대한 안개 속에서도, 그의 내면 깊숙한 곳에는 아직 희미하게나마 '희망'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있었다. 그는 확신했다. 이 모든 혼란스러운 목소리들 사이 어딘가에는, 단 하나뿐인 '진정한' 목소리가 있을 것이라고. 파멸이 아닌, 온전한 해답과 깨달음을 가져다줄, 바로 그 목소리가!
그는 다시금 천천히 눈을 감았다. 모든 외부의 소리와 차단된 채,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나직이 속삭였다.
"만약 이 모든 것이 진실이라면… 나에게 보여줘. 그 진실을."
그러나 밤은 그의 물음에 어떤 답도 주지 않은 채, 차갑게 침묵할 뿐이었다. 그의 바람을 비웃는 듯, 바람만이 텅 빈 골목을 헤집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