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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아래 Jun 06. 2023

달그림자 아래

나무, 바람 그리고 친구와 나

정신없이 보낸 한 주, 금요일 오후가 되니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다. 이럴 때 필요한 건 나만의 공간, 나만의 시간. 그럴 때마다 숲이 그리워진다. 그날도 이미 마음은 숲에 있었다. 어디로 갈까 고민을 하다. 사전 예약 없이 안전하게 갈 수 있는 곳을 찾아보니 딱히 마땅한 곳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 순간 고등학교 졸업 후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한 P가 생각났다. 겨우 카톡 프로필 사진으로 그의 근황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귀염둥이 딸과 함께 그들만의 놀이터를 숲 속에 만들고 있는 친구다. 딸에게 숲의 가치를 알게 하고 자연 속에서 키우고 싶다는 그.




소나무, 참나무로 빽빽한 숲이 병풍처럼 4면을 에워싸고 있는 아늑한 산속. 그곳에 작은 테크 바닥, 화목난로가 설치된 투명온실을 만들어 사계절 아무 때나 아이와 함께 자연을 즐길 수 있도록 그들만의 아지트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터라 그곳에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P야 오늘 금요일인데 어디서 뭐 할 거니?"

"어, 동료들과 회식 약속 있는데...... 왜?"

"갑자기, 네가 만들고 있는 그 아지트에 한 번 가보고 싶어서!"

"갑자기? 무슨 일 있어?"

"사실은, 요 며칠 스트레스받나 봐, 숲이 나를 부르네, 오늘 밤 숲에서 비박하고 싶어서"

"그러면, 나랑 같이 가자! 8시 반 즈음이면 끝나니까, 나 픽업해서 같이 가자!"


약속된 시간에 그를 태우고 그 아지트로 향했다.

도착하니 시간은 이미 9시를 훌쩍 넘겨 온 세상에는 어둠이 내렸고 밤이슬이 대지위의 모든 것을 적시고 있었다.

서둘러 텐트를 치고 나니, 밝은 보름달과 별들이 우리를 반겼다. 화룡점정 친구가 정원의 붉을 켜니, 운치는 더 했다.


그제야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30년 만에 만난 중년 아재들의 수다가 시작됐다. 테이블에는 그가 사 온 와인, 맥주가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었고, 술을 안 마시는 나를 위해 그의 아내가 보내온 드립커피에서 향기로운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그렇게 각자의 취향대로 나는 커피, 친구는 맥주를 즐기는 사이 숲의 운치는 덤이 되었다.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추억에 빠져있을 때 이미 얼큰하게 취기가 돌던 친구는 예전보다 말수가 약간 늘어있었다. 그의 늘어난 말 속에는 아마도 누구에게도 못다한 삶의 이야기가 녹아져 있었을 것이다. 그의 표정을 통해 속 깊은 말은 안해도 그동안 살아오면서 얼마나 많은 애환이 있었을지 가늠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귀여운 딸과 아내, 그의 가족을 위해 그들만의 아방궁을 직접 한 삽 한 삽 쌓아올리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한 여자의 남편으로, 한 아이의 아빠로, 그리고 90이 넘은 홀로사는 노부의 아들로서 열심히 사는 친구의 모습에 '그정도면 너 참 열심히 살았다. 이제는 가끔 밤하늘의 달, 별도 좀 보는 여유를 갖어라'고 격려하고 싶었다. 


P와는 여러 가지 면에서 통했다. 좋아하는 음악 취향, 취미, 커피, 사고방식 등등. 우리는 김광석 노래를 시작으로 다양한 장르의 음악을 크게 틀어 놓고 밤새 회포를 풀었다. 사면이 숲으로 둘러싸인 아지트라서 그 누구의 간섭 없는 그 순간만큼은 온전히 30년 전 18살 순둥이 고등학생들이 되어있었다.


밤이 깊어 갈수록 보름달은 휘영청 더 밝게 빛나고 있었다. 달빛과 함께 친구가 손수 설치한 경관조명이 내뿜는 은은한 빛이 떨어진 새벽 기온에 움츠려든 우리들의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새벽 2시가 될 무렵 친구는 인근에 있는 노부 혼자 살고 있는 본가에 잠을 자러 내려갔다. 


나는 그제야 온전히 자연과 하나가 되었다.

텐트 입구를 개방하니 쌀쌀한 새벽 공기가 코를 찔렀지만 오직 나를 바라보며 미소 짓는 것은 둥근 보름달과 반짝 빛나는 별 뿐이었다. 이윽고 숲에서 들려오는 새소리, 바람소리가 마음을 정화시켜 주더니, 마음이 안정되자 슬슬 눈이 감겼다.

그렇게 오랜만에 꿀잠을 자고 일어나니, 맑은 하늘, 깨끗한 공기가 마치 죽어있던 세포 하나 하나 다시 살아나게 하는 느낌이 들었다. 얼마만에 느껴보는 상쾌함이었을까. 정신은 맑고 몸은 날아갈 듯 가벼웠다. 그렇게 한참동안 자연의 주는 아침 선물을 만끽하고 있을 때,  P 역시 부시시한 모습이지만 한숨 잘 잔 듯 바로 아지트로 걸어 올라왔다. 커피숍 사장의 남편 답게 오자마자 모닝커피를 내린다. 내가 선택한 건 시다모. 향긋한 커피 한잔까지 더하니 더할 나위 없었다.


커피 한 모금 마시고 주위를 둘러보니 지난 밤 어둠으로 보지 못했던 풍광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친구가 아마추어 티 나게 띄엄띄엄 심어 놓은 금계국 부터, 단풍나무 그리고 장미 가시 넝쿨 위로 핑크로즈가 새벽이슬을 머금고 활짝 피어있었다. 이슬을 머금은 핑크로즈의 빛깔은 찬란하고 영롱하기만 했다. 그 꽃을 보며 딸과 행복한 그들만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친구의 앞날이 그 보다 화려하고 빛이 나기를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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