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이사 온 지 2년이 지나도록 뒷산에 가 본 적이 없다. 도통 내키지 않는다. 산성까지 이어지는 숲길로 노년에도 산책하자는 것이 이 집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인데 말이다. 지리산 종주길에서 발목 골절로 119 구조대 헬기로 이송되었던 기억이 아직도 나를 붙잡는가 보다. 주방 쪽창 너머로 산빛을 살피는 정도다. 야들야들한 새순 돋으면 "봄이 왔나보네." 밤꽃 비릿한 내 훅! 끼치면 "이제 더워지겠는걸" 눈 덮인 풍경조차 힐끔 보며 "벌써 겨울이야." 눈요기할 뿐이다.
이른 저녁 식사 마치고 슬슬 바람이나 쐴까?
나섰다가 무심코 뒷산 진입로로들어서게되었다. 그렇게 첫발을 내디뎠다. 어둑어둑해지는 해거름이라 길을 잃지 않을까? 혹시, 괴한이라도 만나만 어쩌지? 불안해서 멀리까지 가볼 엄두는 못 낸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닌 듯 잘 다져진 길로만 한 바퀴 돌고 내려왔다.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자연스레 산길로 들어선다. 어제보다 조금 더, 그리고 그 어제보다 조금 더 멀리까지 가 본다. “같이 가자.” 남편이 재촉할 때는 손사래치더니 웬 뒷북인가?
토요일 아침, 새벽부터 눈이 떠졌다.늦잠이나 실컷 자볼까 싶어 알람까지 꺼두었는데도 말이다. 커피 한 잔 내려 마시고 이끌리듯 산으로 향한다. 새벽 운동 나온 사람들로 호젓한 맛은 덜하지만 길을 잃어도 오늘 해지기 전까지는 집 찾아가겠지. 제법 여유까지 부린다. 어제 해거름에 가볼까? 망설이다 돌아선 그 길로 들어섰다.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반대 방향이다. 사람 발길이 닿지 않은 듯 풀이 무성한 좁다란 길이다. 한참 걷다 보니 지난번 걸었던 넓은 길이 나타난다. 샛길로 지나왔나 보다. 길은 나뭇가지 뻗듯 여러 갈래로 나있었던 거다.
문득,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 이 생각난다.어제 갈까, 말까? 망설이다 돌아선 그 길은 오늘을 위하여 남겨 둔 길이었나 보다. 가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음을 위해 남겨둔 거였어. 그래 이 아침, 가 보지 않은 새로운 길로 가보자. 어쩜, 사는 것도 이와 비숫하지 않을까?
내가 어디로 가는거지? 나도 모르지.
우리 집은 형편이 어려웠지만 큰댁은 꽤 부자였다.조용히 책읽기 좋아하던 나를 큰어머니가 눈여겨보곤 쓸만하다 싶었는지 양딸로 삼겠단다. 먹는 것, 입는 것은 물론 대학까지 보내주겠단다. 입 하나라도 덜어야 할 우리 집 형편에 이보다 좋은 제안은 없다. 엄마는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말씀하시고 내 눈치만 보신다. 언니와 남동생은 "나중에 꼭 다시 만나자." 생이별하듯 눈물 바람이다. 그렇게 큰집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방 한 칸에서 삼 남매가 지지고 볶고 살았건만 방이 생겼다. 혼자 쓸 수 있는 널찍한 책상도 들어왔다. 그리고 밥상에는 내 앞으로 온전한 닭 한 마리가 놓인다. “어서 먹어라. 어여~” 큰어머니는 닭다리 하나를 쭉- 뜯어주며 연신 먹기를 재촉하신다. 이 한 마리면 온 식구가 매달려 먹어야 했다. 닭다리는 고사하고, 퍽퍽한 가슴살 한두 점이 전부였는데 이게 현실인가 싶다.
3일째 되니 집안의 적막함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넓디넓은 집이 오히려 숨 막혔다. "아, 심심해" 그렇게 아웅다웅하던 언니랑 남동생이 그립고 애틋할 정도였다. 누구보다도 엄마 생각이 간절했다. 큰어머님께는 간다는 말도 없이 줄행랑치듯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수양딸 노릇은 '3일 천하'로 끝났다. 그때 좀 더 버텼더라면…. 그 많은 재산을 물려받은 상속녀로 지금쯤 떵떵거리며 살고 있지 않을까?
가끔은 잘못 탄 기차가 때론 목적지에 데려다준다.
인도 영화《런치박스 》에 아내 '일라'는 소원해진 관계를 풀고자 남편 도시락을 정성껏 싸서 배달원에게 보낸다. 그러나 그 도시락은 퇴임을 앞둔 회사원 '사잔'에게 잘못 배달된다. 도시락에 편지를 넣어 보내기 시작했고 아내와 사별하고 외롭게 지내던 '사잔'은 도시락을 기다리게 된다. 잘못 배달된 도시락이 두 사람에게 따뜻한 온기를 가져다준다. 이 영화에 나오는 명대사가 있다. '가끔은 잘못 탄 기차가 때론 목적지에 데려다준다.'
애초 계획한 것과 달리 엉뚱한 방향으로 일이 틀어질 때가 있다. 처음에는 "어? 어? 어?" 낭패다 싶었는데 "아니, 괜찮은데" 했다가 "오히려 잘 됐네" 뜻밖의 결과에 "아싸 바리!" 외칠 때가 있다. 예상치 않은 경로가 더 좋은 결과로 나를 이끌고 간, 아니 내가 이끌려간 경험이 종종 있다. 그래, 내가 탄 기차가 가는 대로 한번 따라가 보는 것도 나쁠 건 없지.
살아온 모든 순간마다 두 갈래 길이다.
그중 어느 한 가지만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선택한 순간부터 ‘잘한 선택일까?’ '되돌릴 수 없을까?' 손에 쥐지 않은 선택지에 대한 아쉬움이 밀려온다. "미쳤지, 미쳤어." 이불킥 날릴 때도 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크게 후회되는 일은 없다. '이게 내 길인가 보다' 그런대로 순응하며 살아오고 있다.운명론자는 아니지만 내가 갈 길은 이미 궤도가 정해져 있고, 결국엔 그 궤도에 따라 운행되고 있는 건 아닐까. '신은 매 순간 최선의 선택으로 나를 이끌지 않았을까?' 내비게이션처럼 말이다.
60살 넘도록 교직이라는 하나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가지 않은 나머지 길이 있다. 그 길은 지금, 오늘을 위하여 남겨둔 길인지도 모른다. 이제 남겨진 나머지 길을 걸어야겠다.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사람들 걸어간 자취가 적어 풀이 무성한 길도 걸어가 보자. 조보장한 길도 걸어가 보자. 끝이보이지 않아 가늠 안 되는 길도 걸어가 보자. "가다가 길이 끊겼으면 되돌아오지. 뭐.", "험하다 싶으면 빙돌아가지. 뭐." 퇴직한 이후에 내게 남는 건 시간뿐이지 않나.
주저앉을까, 그냥 서 있을까, 한 발짝 내디딜까
태어난 지 7개월 된 손녀 ‘나은’이가 처음으로 섰다. 소파 잡고 일어났다가 서게 된 자기가 신기한가 보다. 한 발짝 뗄 수도 있을 듯한데 아슬아슬 불안한가 보다. 지켜보던 엄마, 아빠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인 나까지 “우와!” 손뼉 치며 환호하자 우쭐한지 씩- 웃어준다.
지금 나도 살아보지 않은 길 위에 주춤주춤 서있다. 앞으로 나가는 것이 조마조마하다. 이 길이 맞는 건가 긴가민가하다. 지금은 잘 모르겠다. 좀 더 살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