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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밥 짓기 Oct 26. 2024

주어진 시간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하거나 종합검진을 받아야 할 때면 과거의 병력을 묻는다. 한쪽 난소와 맹장이 없어진지는 20년이 넘었고 몇 년 전에는 담낭제거를 하는 바람에 쓸개 빠진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아무렇지 않은 듯 말 할 때도 있지만 가끔씩 병력을 일일이 말하기가 귀찮아질 때가 있다. 

가끔 텔레비전에서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정말 나에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만 주어진다면 나는 무엇을 하면서 생을 마무리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쓸개에 혹이 있다는 초음파 사진을 확인하면서는 참 암담했다. 종합병원에서 예약하고 검진하고 결과를 확인해야하는 복잡한 과정을 거쳐 정확한 진단이 나오기까지 한 달가량이 걸렸다. 정말 내가 죽음의 문 앞에 서게 된다면 무얼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아 그 여름 내내 조정래 작가의 아리랑 전집을 무의미하게 읽기만 했던 기억이 새록하다.

최악의 선고를 받게 된다면 무엇을 할까. 하루에 한 사람씩 아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쓸까. 자전소설을 써볼까. 우울한 청소년기 때의 삶을 밑천삼아 청소년 소설을 써볼까. 장편동화를 써볼까. 쓸 시간만큼의 생이 주어질까 등등 온갖 생각이 할퀴고 갔지만 일반적인 명언처럼 오늘을 최후의 날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내 죽음에 대해 기뻐하는 사람은 혹시 없는지, 나는 누군가에게 기쁨이고 싶었고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사람이고 싶었는데 쓸모없는 생 밖에 살지는 않았는지. 최악의 경우가 아니라면 나는 어느 때보다도 착하게 열심히 살 텐데. '하나님. 새 삶을 주신다면 시키시는 대로 살겠습니다'라는 다짐과 함께 언젠가는 마땅히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그래도 아직은 아니지 않느냐는 항의를 준비를 하고 있을 즈음, 이 모든 생각을 엉키게 한 원인이 콜레스테롤 덩어리였다는 진단결과를 받게 되어 안도의 한숨과 씁쓸한 웃음을 짓기도 했다.

1월에 세웠던 계획표 보기가 미안하게 한 해의 끝이 또 문 앞에 성큼 와버렸다. 나름은 최선을 다해 살았노라고 하면서 아직은 두 달이나 남아있는 달력에 그래도 감사하다. 또한 오늘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시간을 사용할 수 있음에도 감사하면서, 자의든 타의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 일은 없는지 나를 되돌아보며 주어진 한 해를 마무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남아있는 이 한해, 꼭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나를 채찍질해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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