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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나에게..굳이 응답하지 않아도되 #002

기억이 주는 아픔과 치유 #002

by 글씨가 엉망

자서전을 쓰기로 마음먹은 후 참 빠른시간에 많은 글들을 써낸 것 같다.

어째서 엊그제 사무실 업무도 기억이 가물가물한 데 수십년 전의 일들은 아직까지도 기억이 생생하고, 한번 끄집어낸 기억의 먼지를 털어내면 영화를 재생하듯 상황까지 생생하게 다시 살아나는지 글을 쓰면서 다시한번 놀라게 된다.

그 기억들이 단순히 가물가물한 파편인 줄 알았는데 먼지를 털어내고나니 그 상황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나를 붙잡고 있는 족쇄가 되어있었던 것 같았다.

기억이 잊혀질까...하는 생각도 해봤지만 내게 각인되지 않은 기억들은 항상 그 저장기한이 정해져 있었고,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 각인되어 나를 주저앉히고 있었던

기억들은 저장기한이 없는 쌓여있는 먼지를 털어내면 드러나는 부조의 한조각 처럼 박혀있었다.


짧은 시간에 써내려간 어린시절에 대한 기억들.. 어느순간 20페이지가 넘는 조각들이 있었다. 그 조각들은 먼지를 털어내고 한조각씩 맞추어보니 파편이 아닌 커다란 돌덩어리가 되어 나의 불안과, 초조함, 무기력그리고 절망과 포기의 부조를 이루어 가고 있었다.


누구의 탓을 할 수 있을까?


지금의 내가 그때로 다시 가본다 한들 그 상황을 바꿀 수 있었을까? 그 시절에

나 또한 상황을 피하고자 하는 노력에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쏟았으며 그런 노력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 서는 순간 절망과 포기 그리고 무기력으로

점철된 시간을 시작하게 만들었으니


지금와서 그래 그때를 다 인정하고 다 잊고나면 지금의 불안과 공황 그리고 불면의 시간을 멈출 수 있지 않을까? 라는 헛된 생각도 한번 해봤지만, 인정하고 잊으려고 할 수록 다시 기억의 원점으로 돌아가고 그 시절의 나를 누가위로해 주든 그 시절의 나는 없으며


그런 기억의 부조를 만들어내게 해준 환경들 또한 지금은 그런 기억이 없이 평안한 삶을 살고 있으니, 결국은 나만의 문제로 남는 것이다.


그 동안 쓴 글들을 다니던 정신건강의학과 원장님께 보여드렸다. 2주가 지나고 다시 진료일이 되어 병원에들르니 상담이 길어질 것 같다며 조금 기다렸다가 진료를 보자고 하셨다. 그리고 시작된 상담과 진료...첫마디는


"왜 자서전을 썼어요?" 라는 질문이었다.


그 동안의 진료과정에서 한번도 듣지 못했던 지금의 행동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를 직접 물어보셨다. 그래서 나도 대답했다.


"잊어버릴 까봐서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 대답을 잘 한 것 같다. 구질구질한 이유를 만들어내느니 자서전을 쓰게된 근본적인 이유를 말씀드리는게더 나은 선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시 물으셨다.


"왜 굳이 잊지 않으려고 노력하죠?"


나는 그 대답이 한참 걸릴 줄 알았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바로 답변이 튀어나왔다.


" 잊으려고 하면 잊을 수 있는게 있었습니까?"


살아오면서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이지만 각인된 기억은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더라도 친절하게도 어떤 계기가 되면 생생하게 재생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글을 쓰다보니 지금의 상태에 대한 어떤 해결책을 찾으려고 쓰는 것이 아니었다.

슬프고, 무섭고, 창피했고,자존감 무너지던 그 기억에 대한 누군가와의 이야기가

필요했던 것 같았다.


원장님과 공유했던 그 시절에 대한 나의 이야기를 하고나니 해결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한 가지는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한 번도 한 적 없었던 나의 이야기를 누군가가 들어주고 있다는 것만으로 기억에 대한 원망과 절망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지고, 다른 누군가에게도 이야기 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많은 변화라고 생각한다.


당장의 어떤 증상에 대한 해결은 기대하지 않는다. 매일 약을 먹고 버티고 있는상황에 대한 원망도 없다. 다만 남아있는 나의 이야기를 다 해주고나면 더 이상 해줄

이야기가 없을 때면 남아있는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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