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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나에게..굳이 응답하지 않아도되 #001

기억이 주는 아픔과 치유 #001

by 글씨가 엉망

내가 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인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기간동안의 내가 살아온

삶을 떠올려보고 그때 그때 기억이 떠오르는 감정과 느낌을 바라보고 현재는

내안에 쌓여 있던 지워지지 않는 감정의 흔적을 다독여 보려는 시도다.


이런 시도가 정말 도움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마음의 병을 없애주는지, 아니면 오히려 더 선명히 떠오르게 하는지.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때의 내가 느꼈던 감정과 지금 이 순간 ‘관조하는 나’가

느끼는 감정이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어졌다는 것이다.

할 수 있다면, 정말 할 수 있다면...


신기하게도 아픈기억은 어린나이의 기억이지만 꽤나 생생하게 남아 있다.

학교에서 가는 소풍, 정말 기억에 꼽을 수 있는 해수욕장 몇 번-그것이 내가 기억 할 수 있는 가족놀이의 전부였다.

여행, 놀이터, 그 흔한 극장 모두 다 나에게는 남의 집 이야기였다.


어릴 적 우리집의 내방은 미닫이 문으로 거실로 바로 나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언제나 닫혀있었던 문....문짝아래 나무 판 사이에는 크기가 맞지 않아 작은 틈이

길게 있었다. 한 5mm정도 폭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5mm문틈을 과감히 없애지 못한게 내 삶 전체를 이렇게 바꾸어 놓은건 아닐까-스스로에게 탓 아닌 탓을 해본다.


우리집은 아직도 기억이 선명하다.

단독주택이어서 찬기운이 많이 들어오는 집이었는데, 우리집 안방의 구석창문은

한쪽 유리가 깨져 구멍이 뚫린 상태로 항상 그대로였다. 찬바람이 들어오던 말던..


잘 모르겠다 그냥 항상 한구석에 뻥뚫린 깨진유리가 그대로 있었던 이유는...

하지만 왜 깨져있었는지는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베게를 집어던져 만들어 놓던

그 날의 장면이.. 아버지가 집어던진 것은 베개만이 아니었다.


물건에 화풀이를 자주하시던 아버지, 가끔 날아왔던 손찌검...

내가 맞을 때도 하나도 아프지는 않았다. 눈빛, 고함.. 그리고 엄마에 대한 화풀이가 나에게 주는 무서움보다 그리고 고통보다 훨씬 컸기 때문에...

화가 풀리면 우리는 밥을 먹었다. 꾸역꾸역 우겨 넣으면서 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겨우 참는다.


그 때는 그 밥이 어떻게 입으로 들어갈 수 있었는지 지금 다시 생각하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아무리 어린 나이더라도 배고픔이라는 본능을 도저히 누를 수 없었을까?

아니면 안 먹는 상황에서 발생 할 수 있는 아버지의 행동이 두려웠기 때문에 그랬을까? 아니면 감히 밥을 거부 할 생각을 못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엄마가 차려내는 밥상은 목이 막히는 감정 그 자체였다.

한숨과 울음이 섞인 밥과 반찬은... 얼마나 숟가락은 무겁고 씹을수록 고통스러운지..그렇게 밥을 먹고나면 엄마는 부엌으로 아버지는 거실로 나와 동생은 내방으로 가서 다시 쥐죽은 듯이 있는다.


또 다시 언제 나빠질지 모르는 아버지의 기분을 살피며.. 이 따금 5mm나무판 틈사이로 바깥의 분위기를 보며 나갈 수 있는 상황이 될 때까지 같은 자세로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 때의 그 5mm의 틈은 유일하게 허락된 내 시야였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의 감정은 아마 무서움보다는 풀어낼 수 없는 분노에 대한 무기력 함이 컸던 것 같다.

지금의 글을 써내려가면서도 무기력함에 눈물이 날 것 같다.

지금와서 좋은 아버지.. 착한 할아버지는 낯설다..적어도 나에게는..


그리고 지친다..

이해를 강요받는 것도

그리고 '그 때는 다 그렇게 살았어'라는 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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