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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 Sep 05. 2021

우리는 우리를 우리라 부르기로 했다

합사는 쉽지 않습니다


사람 둘과 고양이 네 마리가 한 집에 산다는 건 실로 복잡하다. 각기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인간과 고양이가 저들만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웅성거리는 집은 바람 잘 날이 없다. 각자 다른 사정, 과정을 갖고 모인 우리 앞에 가족이란 타이틀이 붙기까지 시행착오가 있었다.



일련의 정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완벽한 타인과 어느 날 갑자기 한 집에 살게 된다면 어떨까. 그것도 자의가 아닌 타의적으로. 이 인간이 내게 유해한 지, 성격은 어떤지, 어떤 습관을 갖고 있는지 특징을 파악하기 위해 한 동안은 눈에 날을 세우고 지켜볼 터다. 고양이들의 세계에서 '타의적으로' 완벽한 타인과 동거를 권하는 그 '타의'는 우리 인간이 제공하게 된다.


같은 종족이라고 해서 새로운 아이를 난데없이 한 공간에 던져두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에서 반려동물은 인간의 자산 중 일부로 분류된다. 그러므로 대개 모자란 인간들이 반려동물을 소유물 정도로 해석하는 경우에도 합리화가 가능하다는 말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것뿐이지 동물들은 우리에게 꾸준히 말을 건다. 그들도 생각을 할 줄 안다. 그런 그들의 성질을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무조건 평화로운 합사를 바라는 건 무례한 짓이다. 특히 고양이는 영역 동물이기 때문에 자신의 영역에 등장한 생명체가 적인지 아군인지 알기 전까지 경계 태세를 갖출 수밖에 없다. 1+1, 2+1, 3+1의 과정을 거쳐 기어이 4가 될 때까지 우리는 전부 나름의 정석을 지키고자 노력했다. 솔과 풀이 처음 만났을 때는 나와 삼월이 원룸에 살고 있었다. 임시보호를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도 베란다를 공간으로 생각했다. 더위가 극단적이지 않고 해가 지면 선선하게 바람이 불어올 즈음이었다.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하는 침대 헤드 뒤로 미닫이 문을 열면 곧장 베란다가 나타나는 구조였고, 바닥은 타일 위로 매트가 깔려 있어 베란다가 아닌 방 정도로 사용하고 있었다.  원래 격리는 일주일 정도 진행을 해야 마땅하지만 풀은 삼 일을 따로 지냈다. 풀이가 피부병 때문에 약욕 목욕을 하고 난 뒤 솔의 반응이 유해진 틈을 타 그대로 합사를 했다. 행여 병이 옮을까 밤낮으로 청소와 환기를 병행하고 포자로 인해 너덜거리는 죽은 털들을 뽑아가며 애를 쓴 덕에 솔에게까지 번지지 않고 무난히 시기를 지날 수 있었다. 막상 이들이 한 공간을 사용하게 되었을 때도 솔이 먼저 아이를 두 팔 벌려 환영하는 일도 없었고, 그렇다고 공격을 하는 일도 없었다. 솔은 어린 풀이에게는 화풀이를 하지 않았고 질투와 시기를 어르고 달래는 건 온전히 우리의 몫이었다.


그렇게 록이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완전한 형태가 되었다. 인간 둘과 고양이 넷. 어떻게 이다지도 닮은 구석이 없을 수 있을까 감탄이 서릴 만큼 성정이 달라 합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관계라는 게, 언제 어떻게 틀어질지 알 수 없는 것이니까. 그 부분에선 인간들도 똑같다. 오히려 고양이들이 단순하고 현명하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솜방망이로 한 대 후려치고 무시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깔끔하게 잊어버린다. 그에 반해 인간은 복잡하고 어리석다. 대표적인 사회적 동물이면서 이따금 품격을 잃곤 한다. 갈등의 실마리를 풀고 넘어가도 어느 날은 불쑥 그때 느꼈던 울분이 생각나 일자무식해지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우리 고양이들은 오늘을 살고, 우리는 과거를 사는 것만 같다.


 부정적인 기억들은 수명이 질긴 걸까. 택의 경우 여전히 우리와 일정 거리를 유지하는 중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에게 '관상용 미남'이란 별명을 붙였다. 사실 아이를 탓할 수만도 없다. 우리도 누군가와  만남의 기억이 좋지 않으면 꺼려지기 마련이다. 아이가 인간을 마주했을 때는 신뢰보다 불신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들을 겪었던 거고 어떻게 보면 아이의 거부는 기억으로부터 발산되는 것이 아니라 자동적인 반응에 가까운  같다. 살기 위한 본능에서 우러나오는 자동반사적인 두려움. 본래 섬세한 성격을 지니고 있으니  조심성이 쉽게 사라질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저 익숙해지고, 무심해지길 기다리는  말고는 방도가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내부에서 발생하는 동족 간의 갈등은 인간들이 가장 잦으며, 고양이들 사이에서는 택이 중간다리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이들 사이에 심각한 싸움은 벌어지지 않는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우리를 가족이라 부를 수 있을까. 특히 동거인인 삼월을 보며 이 같은 궁금증을 품어본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우리가 가족이란 울타리를 짓고 살 수 있는 것. 사실 우리는, 서로에게 갖고 있는 믿음이 사라지고 나면 깔끔하게 등을 돌릴 수도 있는 타인에 불과하다. 나는 끝내 염세의 숲을 벗어나지 못하는 나방과도 같고 그는 긍정의 햇살을 한껏 받고 자란 꽃 같아서, 나의 의심과 불안에 대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사이에 네 마리의 고양이는 관계 유지를 위한 장치이자 담보라고 할 수 있다. 아이들을 물질적인 타이틀로 정의해서 미안하지만, 가끔은 왜 옛 부모들이 애 때문에 산다고들 하는지 그 말 뜻을 아주 조금은 헤아릴 수 있을 듯하다. 우리가 오롯한 둘이었다면 이토록 끈끈하지 못했을 것이다. 언제든 공기 중으로 쉽게 흩어질 수 있도록 건조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양이라는 강건한 연결고리가 존재하기에 우리는 해체를 떠올리지 않는다. 나는 이들 없이 혼자인 나 자신을 도무지 상상할 수 없다. 뿔뿔이 분해되고 조각난 우리라는 이름을 생각할 수조차 없다. 그리하여 온갖 비관들을 그럴싸하게 나열하긴 했어도 결론은, 오래도록 6이란 숫자를 좋아하고 싶다는 뜻이다.



유일하게 네 마리가 함께 나온 사진

/나는 너희들의 사랑으로 삶을 버티는 사람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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