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는 게 제일 좋은 뽀로로 아들을 키우는 뽀로로 엄마의 고민
보아라. 저 신명 나는 방학 생활 계획표를. 내 아이의 계획표다. 하고 싶은 것을 써넣으라 해서 당당하게 써넣었을 뿐. 대체 뭐가 문제냐며 그림 속 아이들도 내 아이처럼 해맑게 웃고 있다.
“아침 먹고 땡, 점심 먹고 땡, 저녁 먹고 땡~ “
해골바가지를 그리며 흥얼거리던 국민학교 시절의 노랫가락이 떠오르지 않는가? 삼시세끼 밥 먹고 규칙적으로 놀겠단다. 노는 게 제일 좋은 뽀뽀로 중년 아줌마의 뽀로로 아들답다. (내가 뽀로로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고백은 이미 전 글에서 했다. 궁금하다면 클릭! 코로나가 바꾼 나의 가치관)
기나 긴 코로나 방학으로 저 계획은 현실이 되었다. 우리는 저 계획표가 부끄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흥겹게 놀았다. 온라인 개학을 하기 전까지. 온라인 개학을 한 후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배처럼 우리는 갈 곳을 몰라 갈팡질팡 헤매었다. 노는 것도 아니고 공부하는 것도 아닌 상황으로 e학습터는 아이와 나의 전쟁터가 되었다. 아이는 5분 간격으로 나를 불렀다. 차라리 방송을 볼 때는 식사 준비도 하고 설거지도 할 수 있었는데...
주변의 아이 친구 엄마들과 통화를 하며 e학습터에 대한 불만을 쏟아냈다. 다들 차라리 EBS 방송을 볼 때가 낫다며 아이가 적응을 못해 계속 불러대니 그만 좀 부르라며 짜증을 냈다고 한다. 어떤 엄마는 아이 옆에 꼭 붙어 앉아 한 글자만 틀려도 지우개로 박박 지우고 다시 쓰도록 한다고 했다. 말만 들어도 내가 다 고통스럽다.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 아이가 대충대충 넘어가는 꼴을 못 보겠다며 그러면 아이가 대충 해도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될까 봐 자꾸 아이를 잡게 된단다. 그러면서 아이가 엄마를 밉다고 하며 대든다고 아이가 원망스럽다고 했다. 그 엄마가 너무 안타까웠다.
“OO엄마, 자기가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자기 시어머니가 왜 대충 하냐고 소리를 지르고 짜증을 부리면서 본인 맘에 안 들 때마다 기름을 부어대며 계속 다시 하라고 해. 그러면 자기는 대충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겠어, 아니면 그 그릇을 패대기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겠어?”
“언니, 나 시어머니 같은 짓 한 거예요?”
“응. 완전. 시어머니가 ‘니가 대충 하는 걸 배울까 봐 그런다’ 하면 그게 막 고맙고 이해가 되면서 시어머니를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는 게 아니잖아?”
“그렇죠. 이해가 확 되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 엄마의 마음도 이해는 된다. 학교에 가더라도 선생님이 내 아이만 붙잡고 일대일로 케어해줄 수 없으니 내가 데리고 있을 때 조금이라도 더 잘 가르치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었을게다. 그런데 사실 나는 정반대의 고민을 한다. 아이가 e학습터를 열고 나를 부를 때마다 나는 이렇게 외친다.
“그냥 대충 해!”
처음에는 성심성의껏 아이의 부름에 응답했다. 아이가 5분마다 엄마를 불러대는 며칠을 보내고 마침내 깨달았다. e학습터는 아이의 학습터지 나의 학습터가 아니라는 사실. 그래서 과감하게 나는 빠졌다. 스트레스는 아이 혼자 받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굳이 나까지 같이 스트레스를 받고 그 스트레스를 아이에게 소리 지르거나 남편에게 짜증 부리는 것으로 해소할 필요는 없다. 그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래서 아이에게 말했다.
“여기서 완벽하게 하려고 하지 말고 네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해. 답을 다 안 써도 되고, 모르는 건 선생님한테 여쭤볼 수도 있어. 네가 스스로 공부하는 걸 배우는 게 더 중요하니까 너무 힘들면 그냥 넘어가도 괜찮아.”
하지만 아이는 엄마와 만든 학교에서 공부하는 게 더 재미있다며 (참고> 코로나 19로 인해 임시학교를 개교합니다) 차라리 e학습터를 그만두고 하던 걸 하자고 한다. e학습터에서 공부한 이후로 재미있었던 국어도 수학도 재미가 없어졌단다. 엄마의 고민이 점점 다채로워진다. e학습터에서는 대체 뭘 어떻게 가르치나 싶어 아이가 강좌를 듣는 동안 옆에 앉아 지켜보았다.
국어에서 마음을 담아 편지 쓰기를 배우는데, 이어달리기 대표선수에 뽑히지 못해 실망한 친구를 위로하는 편지를 쓰란다. 세줄을 채워야 하는데 아들은 ‘힘내’ 두 글자 외엔 할 말이 없단다. 우산을 씌워준 친구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담아 세줄을 쓰란다. 아들은 ‘고마워’ 말고는 할 말이 없단다. 나라도 그렇겠다. ‘힘내’, ‘고마워’ 말고 뭘 주절주절 세줄이나 채우라는 말인가. 나도 할 말이 없는데 아이 보고 어떻게 하라고 지도해야 할까?
“아들, 정 할 말이 없으면 그냥 웃긴 말이라도 써. 그래도 괜찮아.”
“정말? 그랬다가 선생님한테 혼나면 어떻게 해?”
“괜찮아. 마음을 담아 쓰는 거잖아. 너의 진짜 마음이라면 웃긴 거라도 괜찮으니까 솔직하게 써. 그리고 아마 선생님도 하나하나 다 검사하실 수 없을 거야. 그렇게 많은 친구들의 교과서를 어떻게 다 살펴보시겠어? 그냥 스트레스받지 말고 즐기면서 해.”
“앗싸!”
아들은 신이 나서 손가락에 모터 달린 듯 뭔가를 줄줄 써 내려갔다.
‘푸하하하하하하! 그..그래.. 그 정도 반전 있는 사연이 있어야 편지를 써줄 만하지. 이해한다. 이..해해도 되는.... 거겠지? 그런데 잠깐, 어차피 취소될 테니 힘 빼지 말라니... 그건 엄마가 평소에 너한테 하던 말이잖아. 이래서 애 앞에선 찬물도 못 마신다는.. 쿨럭. 나.... 이렇게 해도 우리 아이 정말 괜찮을까? ㅠㅠ’
내가 어릴 적에 선생님이라는 사람들은 참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모든 선생님들이 다 그 재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선생님들에게 있을 뿐. 그건 바로 이 세상의 재미있고 신기하고 유쾌한 모든 일들을 참 재미없고 지루하고 시시하게 만드는 능력, 싱싱하게 살아 펄떡펄떡 뛰는 것들을 시들시들하고 축 처지게 만드는 능력이다. 어릴 때는 선생님들에게 그 마법같은 능력이 있다고 굳게 믿었다. 물론 지금은 안다. 선생님들도 그러고 싶지 않다는 것을. 어쩔 수 없이 그래야만 할 때가 있다는 것을.
하지만 저렇게 쓰면 선생님들이 싫어하고 고치라고 한다는 것을 초등학교 저학년 아들은 벌써 알고 있다. 그러면서 아예 쓰지 않으려고 한다. 학교도 e학습터도 재미없고 시시하다고 한다. 운동도 공부도 신나는 놀이로 해야 한다고 믿는 엄마는 고민이 깊다.
이렇게 뽀로로 엄마로 살아도, 뽀로로 아들로 키워도 과연 괜찮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