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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heavenlyp Oct 05. 2021

셀프이사 성공기, 아니 실패기인가?

비가 오면 잘 산다더라만

8월 16일.


이사 날이 정해졌다. 손 없는 날이자, 광복절 대체공휴일이어서 따로 회사에 연차를 내지 않아도 되는 날로 정했다.


어차피 이전부터 집이 비어 있었고 인테리어와 정비를 하느라 자주 오고 갔기 때문에 이런 저런 짐들은 이미 옮겨가 있었다. 그 동안 좁고 수납공간도 없는 집에 사느라 살림을 늘리지 않으려고 조심했으니, 옷 몇 박스와 식기류 정도뿐 딱히 짐이랄 게 없었다.


해봤자 냉장고, 세탁기, TV, 밥솥, 에어프라이어와 전자레인지, 선풍기, 청소기, 퀸 사이즈인 매트리스와 침대프레임, 협탁, 속옷 따위를 담아 두는 서랍장, 의자가 두 개, 그가 직접 만든 아일랜드 식탁과 티비장, 유자 집, 수납장…. 응? 꽤 많은데?


우선 쉬운 것부터 챙겨 보려고 옷 방으로 들어갔다. 순간 제주도로 오려고 겨울 옷을 택배 박스에 넣다가 더위에 숨이 막혀 이대로 죽는 게 아닌가 싶었던 5년 전 여름이 데자뷰처럼 떠올랐다. 경험을 살려 거실에 에어컨을 켜고, 옷방에서 옷을 몽땅 끌고 나왔다. 차곡차곡 박스에 개어 넣고 세탁이 필요한 옷은 따로 분류했다. 입지 않을 옷을 추려 헌옷수거함에 보내는 것으로, 옷 정리는 끝. 덩치는 작지만 짐 싣는 공간이 넓어 이사 할 때마다 제 역할을 톡톡히 해준 그의 차에 옷이 담긴 상자를 실어 새 집으로 옮겼다.


다음은 그릇. 어린 시절부터 이리저리 이사를 해왔던 지라 이 정도는 일도 아니다. 신문을 몇 부 챙겨 그릇끼리 직접 맞부딪히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싼다. 신문지 놓고, 그릇 올리고, 신문지 이쪽 귀퉁이를 접어 그릇 올리고, 다시 반대쪽으로 접어 그릇 올리고… 애초에 2인 식기세트 두 벌에다가 냄비 몇 개가 전부인 소박한 주방살림인데, 그마저도 설거지를 할 때마다 그가 한 개씩 깨트려 줄어 있었던 터라 이것도 금새 끝났다.


그 다음은 몇 권의 책을 비롯한 잡동사니를 정리한다. 미처 다 돌리지 못해 남은 청첩장이며, 크리스마스마다 벽에 장식했던 다이소 출신 가랜더며, 연애시절 만들었던 포토북이며,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꺼내고 꺼내도 나온다. 쓰지 않는 것들은 100L 쓰레기 봉투로 과감히 보내버리고, 필요한 것들만 남겨 상자에 담는다. 그릇과 잡동사니를 담은 상자도 역시 그의 차에 실어 새 집으로 옮겼다.


이제 남은 것들은 이사날 그의 어머니께 1.5톤 트럭을 빌려 실어 보내야 한다. 그런데 그쯤 되어서야 큰 문제를 깨달았다. 큰 짐이 별로 없고 이미 상당한 짐들을 보냈다고는 해도, 냉장고와 세탁기처럼 몸집이 큰 가전이 있는데, 과연 우리 둘의 힘으로 이 가전들을 차에 실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 때서야 이리저리 용달이나 소규모이사를 찾아 보았지만, 손 없는 날에다가 휴일인 그 날은 이미 예약으로 꽉 차 가능한 곳이 없었다. 별 수 없지, 스스로의 힘으로 집을 알아 보고 계약하고 대출을 받고 전세금을 주고 빈 집을 손보고 가꾼 것처럼! 이사도 직접 하는 수밖에!


다행히 이사날 이 천둥벌거숭이 같은 신혼부부를 가엾게 여긴 양가의 부모님들이 행차하여서, 그의 어머니는 직접 차를 몰아 가져다 주셨으며 엄마는 냉장고 속 음식들을 정리하고 냉장고 청소를 말끔히 해주었고, 아빠는 편치 않은 몸으로 큰 짐들을 나르는 것을 도와 주었다. 이전 집이 2층이었고 1층까지는 엘리베이터로 갈 수 있어서 그나마 가능했다. 1층에서 지상으로 내려오는 5개의 계단을 어떻게 어떻게 내려가 짐을 실었다.


과연, 앞서 열거한 짐들을 다 실어 놓고 보니 굉장한 위용이 아닌가. 공간도 좀 부족할 뻔 했는데, 냉장고에서 나온 음식들(이사 전에 최대한 털어 먹었는데도 상당했다)과 조미료들, 그리고 손상되기 쉬운 것들은 엄마 차에 실어서 이사짐 테트리스에 성공했다. 아, 처음부터 까불지 말고 얌전히 포장이사를 부를 걸 그랬다.


깊은 후회를 곱씹다 보니 어느새 새 집에 도착했다. 짐을 내리려는데, 그의 어머니가 집으로 들어가는 진입로 앞에 신문지로 불을 피웠다. 그리고 가장 먼저 밥솥을 들고 불 위를 넘어 들어가야 된다고 하셨다. 참고로 우리 집은 독실한 기독교 집안으로, 엄마는 목회는 하지 않으시지만 개인적인 신앙의 열심으로 전도사 안수까지 받은 분이다. 예상치 못한 광경에 나와 엄마아빠가 잠시 얼어 붙어 있는 사이 밥솥을 든 그가 불 위를 넘어 집으로 들어갔다.


이후에는 짐을 옮기느라 정신이 없어서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중간부터 비가 내려서 빨리 집안으로 짐을 넣어야 한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거실 바닥이 진흙발자국으로 더러워져 갔다. 그래, 처음부터 까불지 말고 얌전히 포장이사를 부를 걸 그랬다.  


어찌저찌해서 모든 짐들을 집 안으로 집어 넣었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모님들과 함께 근처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카페에서 커피도 테이크아웃해서, 그나마 짐이 덜 차 있어서 바닥이 보이는 방에 둘러 앉아 커피를 마시며 숨을 돌렸다. “비가 오면 잘 산다더라”, “짐 정리하려면 고생하겠네”와 같은 덕담을 해주고는 부모님들은 각자의 집으로 가셨다.  


집에 둘만 남았다. 물론 유자도 있었지만, 전쟁터처럼 집안 살림이 널부러져 있는 상황에서 강아지 발바닥은 귀엽긴 해도 별 도움은 안 된다. 털을 뿜어 내니 청소할 거리만 남겨줄 뿐. 이전 집 곳곳에도 먼지와 강아지 털이 남아 있어서, 짐 정리는 잠시 뒤로 미루고 40분 거리의 이전 집으로 한 번 더 청소를 하러 갔다. 쓰레기까지 정리해서 배출하고 나니 물에 젖은 종이처럼 몸이 부스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새 집에 모든 짐들이 그야말로 쑤셔넣어진 상황. 혼신의 힘을 다해 침대는 침실로 보내고 옷 상자는 옷방으로 보내고 주방살림들을 정리하고 소가전들을 배치해서 공간을 만들었다. 신발을 신고 오갔던 흙발자국도 닦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까불지 말고 입주 청소도 부를걸 그랬다.


모든 난장판이 일단락된 후에, 지친 몸을 침대에 누이니 안도의 한숨이 절로 나왔다. 어쨌든 비가 오는 와중에 아무도 다치지 않고 모든 짐을 싣고 내려서 새 집 안으로 집어 넣는데 성공했고, 가전들도 이상 없이 작동하는구나. 감사의 기도라도 올리고픈 심정이었다. 마찬가지로 이 분야는 하늘에 계신 신들의 소관은 아닌 것 같으니, 적당히 이사의 신이 보우하사 우리집 만세인 상황이랄까.


다음에 이사를 한다면 반드시 포장이사와 입주청소를 부르리라 다짐하면서, 아니 더 이상 내 인생에 이사는 없다고 다시 다짐하면서, 친구가 선물해 준 새 침구의 보드라운 감각을 낯설게 느끼면서, 그렇게 우리 집에서의 첫날밤이 깊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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