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10주년 기념 여행이라는 타이틀은 괌에 오기 위해 갖다 붙인 수많은 이유들 중 하나에 불과했지만,막상 괌에 오고 나니 매우 중요한 과제라는 것을 직감했다. 기분 좋은 순간에도 우리는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였으며, 여행지에서의 일상은 찬란했지만 동시에 고단하기도 했다. 많은 고민을 두고 멀리까지 날아왔지만 신경 쓸 일은 여전히 있었다. 모든 것이 처음인 타국에서 서로가 의지되어야 할 상황에, 미덥지 않은 존재는 마음을 무겁게 하는 짐이 되었다.
렌트차량을 가볍게 들이받은 사건은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새는 정도가 아니라 바가지를 깨부순 사건이 되어, 그의 모든 행동은 어머님과 나니의 심기를 건드렸다. 사실 평소 같았으면 시댁에 갈 때마다 잔소리 폭탄을 맞는 남편을 보며 은근히 고소해했을 것이다. 매번 남편에게 잔소리를 듣는 나의 입장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 주는 것이 내심 통쾌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그는 한 번의 실수 이후 나름대로 조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칭찬은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다. 못하면 경보음이 교차로 울리고, 잘하면 쥐 죽은 듯 고요했다.그가 분위기를 환기시키려고 하는 말들도 전부 제지해야 할 헛소리가 되었다. 뭐든 잘해야 본전인 상황이었다.나라도 그의 편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는 수많은 장점을 가졌음에도 단점이 도드라지는 편이다. 대부분 본인이 하는 말에서 반작용을 일으킨다. 말과 행동이 90퍼센트 이상 일치하는 보기 드문 남자인데, 문제는 말을 넘치게 한다는 점이다. 뱉어낸 말들이 110퍼센트, 120퍼센트로 모수를 높여서 본인의 행동 비율을 스스로 낮추는 안타까운 상황을 자주 연출한다.이러한 이유로 그는 사실 믿을만한 구석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직스러운 이미지를 갖지 못했다.
나는 반대의 기술로 인해 신뢰성이 높은 이미지를 가졌다. 기술이랄 것도 없지만 말을 별로 안 하는 게 팁이라면 팁이다. 남편에 비해 행동력이 현저하게 낮지만 애초에 무엇을 한다고 단언하거나 남들에게 해야 한다고 강요하지도 않는다. 꼭 해야 할 일들만 목표로 삼고 선언할 뿐이다. 어쩌면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태만함과 하거나 말거나 신경 쓰지 않는 무심함,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오만함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일까, 나는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는 말을 믿는다. 믿음직스러워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고, 내 마음과 똑같은 사람은 없다. 아무리 믿을만한 사람일지라도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게 바로 사람이다. '(말 안 하고)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간다'는 말을 적극 실천하고 그 효과를 톡톡히 보며 살고 있는 나로서는, 나와 같이 그 중간쯤에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굳이 높게 평가하진 않는다. 오히려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무엇이라도 발언하고, 표현하고, 그 반응에 상처받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지지하는 편이다. 그들은 어떤 면에서는 남들의 소리보다 자신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용기를 가진 자들이다. 자칫하면 독단이 될 수 있지만, 타인의 거절과 반응에 상처받고 아파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에겐 함께 가려는 의지가 있음을 본다. 그리고 나는 나의 남편에게서 그것을 본다.
괌에서 수많은 야자수를 보았다. 서울의 올림픽공원에 있는 나홀로나무가 생각났다. 결혼 전 남편은 내게 그것을 보여주며 '왕따나무'라고 소개했다. 그 나무가 꼭 나의 남편을 닮았다고 생각했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남편이 느끼는 외로움은 그 나무를 제외한 여백만큼이나 넓고 광활했다. 그 어마어마한 공간을 내가 다 채워줄 순 없겠지만, 그저 곁에 있음으로 온전한 그의 편이 되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내가 그와 결혼하기 전 그에게 품었던 마음이었다.
그러나 10년 동안의 결혼 생활에서 나는 그 마음을 지키지 못했다. 어느새 나는 그와 멀리 떨어져세상의 눈으로 그를 판단하고 있었다. 당신이 그러면 직원들이 싫어해, 당신이 이러니까 아버님이 그러시는 거지, 당신이 그러니까 상사가 누르는 거야, 당신이 그러니까...
그는어쩌면모르지 않았다. 그저 스스로 알 때까지 그를 믿고 기다려줄 온전한 그의 편이 필요했을 뿐이다. 나도 그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모른 척 외면해 왔다. 그리고 이제야, 그를 보고 처음 품었던 그 마음이 떠올랐다. 떠올라도금세 흩어지고 말았던 그 마음이 고였다. 모였다. 그가 보였다. 올림픽공원의 나홀로나무처럼, 괌의 야자수처럼 광활한 외로움의 여백을 견디며 꿋꿋하게 뿌리내리고 서 있는 그가.
그래서 나는 말했다. 부디 남편이 운전할 때 조용히 해 달라고. 그녀들은 누구보다도 남편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보다도 더. 내가 감히 그녀들에게 남편의 편이 되어준답시고 어떤 말을 해도 될까 싶었지만, 그녀들은 나의 마음을 받아주었다. 아열대 기후 특성상 괌에는비가 자주 내리고 그쳤다. 유난히 비가 세차게 내리던 시간, 우리를 무사히 숙소까지 데려다준 남편에게 세 여자는 트리플 따봉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