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무원을 준비하던 시절에 스마일 메이커라는 물건을 알게 되었다. 예쁜 미소를 위해 입꼬리를 교정하는 기구다. 서비스직인 승무원은 미소가 기본이기 때문이다. 조금만 오래 물고 있으면 침이 고이다 못해 흐르게 하기도 하는, 참으로 하찮은 실리콘 교정 장치이다. 그래도 꾸준하게 착용한 덕분인지 이미지가 좋다, 인상이 좋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그때부터 입꼬리 모양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누구나 평소엔 무표정일 수밖에 없겠지만, 유난히 입꼬리가 'ㅅ'자인 사람들이 있다. 나는 그런 입꼬리를 보면 올려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렇게 하진 못하니 거울효과의 반대급부로 입꼬리에 힘을 주게 된다.(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나는 미소 짓고 있다.) 입만 웃으면 어색하니 눈웃음도 같이 지어본다. 기분이 슬며시 좋아진다. 바이오피드백 효과다.
출근길에 화사한 옷을 입고 밝은 화장을 한 중년의 여성분을 보았다. 헤어스타일까지 모든 게 완벽히 화사하고 단정하고 빛이 나는데 입꼬리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화가 난 상태는 아닌 것 같았고 그냥 피곤할 때 짓는 표정이었다. 아무런 생각도 힘도 주고 있지 않은 무방비의 상태. 나이가 들수록, 중력의 법칙에 의해 피부가 처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듯 입꼬리도 그런 거라고 생각하니 왠지 억울했다. 나는 결코 기분 나쁜 상태가 아닌데 그렇게 보일 수 있다는 사실이!
내가 승무원이 되고자 했던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 과정이 즐거웠다. 그게 안되더라도 손해 볼 게 별로 없었다. 서비스 마인드는 곧 섬김의 자세를 갖추는 것이고, 언어점수와 이미지 메이킹은 타 기업의 입사 준비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승무원은 특히 면접이 중요해서 면접 스터디를 많이 했다. 어느 기업이든 면접에서 좋은 인상을 남기는 건 중요하니까.
이제 특별히 누구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고, 회사에서 하는 노동에 가사 노동까지 이어지니 감정노동은 더더욱 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문득 그 시절 늘 입에 물고 있던 스마일 메이커, 미소 교정기가 생각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느새 익숙해진 자기 방어와 담쌓기가 나름대로 나를 지키기 위한 장치라면, 미소 교정기 같은 하찮은 장치는 어떨까. 나의 미소를 보고 누군가 공격을 멈추거나 마음의 담을 허물게 된다면, 우리는 애초에 담을 쌓을 필요가 없는 것 아닐까.
체력은 장기 전이라 지금까지도 극복하질 못했다. 그래서 덜컥 승무원이 되었다고 해도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 같다. 스케줄 근무는 정말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정시 출퇴근이 보장된 데다 단축근무까지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늘 너덜너덜하다. 휴직기간에 나름 꾸준히 헬스장을 다니기도 했지만 살만 빠지고 체력은 그대로다.
그나마 정신력을 위해 글쓰기라는 지푸라기를 잡고 사는 중이다. 이마저도 각 잡고 진득하게 쓰려면 아이들을 재운 뒤라야 한다. 마음에 넘친 것, 마음에 고인 것을 써내는 중에 아이들이 내게로 오면 그대로 임시저장이다. 고인 것은 그대로 있지 않고 증발해 버린다. 이어 쓰는 글은 어딘지 무미건조하지만 쓰고 싶은 말을 써 내려가는 데 집중한다. 그저 시작했으니 끝을 보리라는 마음으로 쓴다. 그러나 나의 서랍엔 아직도 끝을 맺지 못한 글들이 많다.
그래도 보따리 풀어놓듯 하루를 살면서 힘든 마음도, 석연치 않은 마음도, 기쁜 마음도 몇 자 쓸 수 있는 공간이 있음에 감사하다. 일기에서 그치지 않을 수 있는 건, 누군가와 함께 공유하고 싶은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 가치를 알아봐 주고 따뜻한 미소를 남겨주는 독자님들이 계시기 때문이다.
시답잖은 마음도 써 본다. 별 것 아닌 마음도 전해본다. 하찮은 미소 교정기도 결국 미소를 만들어냈는데, 나라고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적어도 나의 글과 댓글에는 진심이 있지 않은가. 빵 터지게 하는 재주는 없지만, 조용히 미소 짓게 하는 힘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습관처럼 쌓아 올린 마음의 벽을 허물게 하는. 아니면 잠시라도 그 수고에서 벗어나게 하는. 많은 순간 그런 따뜻한 미소를 건네는 사람이고 싶다.
* 사진 출처: 네이버 스마트스토어 와이키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