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이 Nov 14. 2024

브런치는 불행의 전시장인가


브런치에서 이혼, 불륜을 소재로 쓴 글들이 자주 눈에 띈다. 누군가는 이를 두고 브런치가 불행의 전시장으로 전락했다고 한다. 누가 더 행복한가를 전시하는 인스타와는 달리 브런치는 누가 더 불행한가를 겨루는 것 같다고. 그런 글들이 메인 화면에 노출되는 것은 자극적인 주제로 썼기 때문이라고 한다. 타인의 불행을 위안 삼는 자들에 대한 비판도 곁들이며 안타까움을 표한다.


나는 오히려 이런 시각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낀다. 나는 차라리 저것이 글쓰기의 힘을 모르는, 주로 글을 골라 읽는 독자로서의 푸념이라 믿고 싶다. 브런치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고,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글이 갖는 치유의 힘을 조금이라도 경험했을 것이다.


"재능을 자랑하려고 글을 써요? 아니면 마음에 있는 것을 표현하려고 써요?"
- 영화 <호밀밭의 반항아> 중


글을 씀으로써 얻을 수 있는 수많은 효과들 중 지적 효과나 명예심을 부정하는 게 아니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전달하기 위해 쓰는 글도 가치 있지만 나 자신을 위해 쓰는 글도 마찬가지다. 나를 제대로 사랑해야만 다른 사람도 제대로 사랑할 수 있으며, 나 자신을 이해해야만 나와 닮은 사람과 세상까지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글쓰기의 힘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이 그 힘을 이용하는 것에 대해 지지할 수 있어야 한다. 글의 내용에 반대되는 견해는 가질 수 있지만 글의 소재 자체에 대해, 누가 무엇을 쓰는지에 대해서까지 검열할 권리가 있는가. 물론 불평비판도 그의 자유다. 하지만 만약 내가 이혼을 했고, 배우자의 불륜으로 인해 마음에 큰 상처가 난 상황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인가.


그 방법으로 글쓰기를 선택한 사람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어느 누구에게도 피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어디에도 털어놓을 수 없는 자신의 마음을 달래는 방법이자, 스스로를 일으키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가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고통을 털어놓고 위안받고 힘을 내서 남은 자식을 키워내고, 다음 날 회사에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기 일을 처리해 낸다면 결국 누구에게 좋은 일이냐는 것이다. 그는 내 가족이 될 수도 있고, 내 직원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우리가 서로 응원하고 지지하는 일은 개인의 차원을 넘어선 사회적 역할이 될 수도 있다.


독자의 반응을 이끌어내기 위한 의도가 지나쳐 보인대도 그것은 글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의식하는 독자에 대한 갈망일 것이고, 상처 입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필요로 하는 청자에 대한 손짓일 것이다. 그리고 자주 메인에 노출된다는 것은 그 아픔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고, 이혼율이 높은 사회에서 이런 반응성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게 배우자의 외도로 인한 결과라면 더더욱.


자신의 불행을 자랑하고 싶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감추고 감추다 무엇이 진짜 내 마음이고 인생인지 잊어버린 채 상처를 끌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글로나마 풀어낸 자신의 기록을 폄하할 자격은 아무에게도 없다. 일기는 일기장에,라는 말도 비슷한 맥락의 폭력이다. 일기와 에세이의 차이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데,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쓰며 어떤 의미라도 길어 올릴 수 있다면 그것은 가치 있는 글이라고 믿는다. 우리에겐 연결되고 싶은 마음이 있으며, 누군가는 나와 비슷한 삶의 이야기에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기 좀 쓰면 어떤가. 당신에게 보내는 이메일도 아닌 누구나 쓸 수 있는 플랫폼에서. 트위터처럼 특정인에 대한 저격글을 피드에서 바로 볼 수 있는 구조도 아니고, 기껏해야 제목 정도로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인데.


그럼 그런 글들을 읽는 사람은 과연 타인의 불행을 위안 삼기 위해 읽는 것일까? 그런 사람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비교의식이 있는 인간에게는 타인의 행복을 질투하는 마음이 있는 것처럼 불행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응원하는 마음으로 읽을 것이다. 그가 그런 아픔을 겪고 어떻게 살아냈는지, 어떻게 살아낼 것인지. 그가 잘 극복해 냈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형태가 다른 나만의 고통을 대입해서, 고통과 마주하는 연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마음이 없다면 불편한 글을 애써 읽어낼 리 없다. 단지 내가 그보다 낫다는 위안을 얻기 위해 타인의 그림자에 들어설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고통의 문제는 외면하는 편이 차라리 쉽기 때문이다.


이혼, 불륜, 가난 등은 마주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주제가 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해봐야 한다. 모양만 다를 뿐 인생에서도 고통은 피할 수 없는 문제다. 긍정적인 자극을 주는 유익한 글, 밝고 재미있는 글, 삶에 대한 의지를 불태울 수 있는 자기 계발서 같은 글은 애초에 많지가 않다. 주야장천 그런 글만 쓸 수 있는 사람도 많지 않다. 삶은 실패가 일반이라 성공이 특별하듯, 절망을 나열하는 이유도 그 속에서 빛나는 희망을 찾기 위함이다. 고통의 경험과 감정을 쓰는 것은 고통 속에 가려진 인생을 찾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러니 브런치는 불행의 전시장이 아니라 고통의 문제와 맞서고 있는 용기의 발전소다. 


얼굴도 모르는 이에게 건네는 위로와 응원은 또 다른 에너지가 된다. 먼저 꺼내놓은 이야기에 마음을 열듯 상처를 직면하고 쓰는 용기에 또 다른 용기가 더해진다. 구겨지고 일그러진 마음들을 꺼내놓고 차곡차곡 쌓아서, 서로가 읽고 위로받는 한 권의 책이 되길 소망한다.


나는 빈센트의 우울과 광기 자체가 그토록 위대한 작품을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광기와 우울로부터, 트라우마의 무시무시한 공격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해 내려는 강력한 의지가 그의 그림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아픔으로부터 치유되기 위한 그 모든 몸부림이 빈센트의 예술 세계였다. 그는 '아픔을 재료로' 예술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아픔에 맞서기 위한 불굴의 용기'로 그림을 그렸음을 믿는다.
- 정여울, <빈센트 나의 빈센트>


* 사진 출처: Unsplash


이전 23화 나와 글 사이의 여백이 부족해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