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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멋질고개 Mar 05. 2024

9. 서울로의 상경

대학 입학이 다가올 무렵, 어머니는 목화 농사를 해서 얻은 솜으로 겨우내 서울에서 공부할 아들의 이불을 만들어 주셨다. 1985년 3월 1일, 그 산더미만 한 이불을 아버지와 양쪽에 들고 서울로 상경했다. 문제는 막상 학교 앞에 도착해 하숙할 방을 구하려니 방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때야 방을 구하기에는 늦었다는 걸 알았다.

 

대학교 주변 산꼭대기부터 훑어 내리듯 돌아다녀도, 하숙방이나 자취방을 구할 수가 없었다. 동네 아주머니들이 종일 촌에서 올라와 이불 보따리를 들고 산동네를 오가는 우리를 보고 안타까웠는지, 동네 분들과 소통하며 도우려고 하셨다. 근처에 있는 미용사 아주머니께서 ‘같은 교회 장로님이 하숙을 위해 방을 수리 중’이라며 그 방을 구해 주었다. 온종일 땀 흘리며 산동네를 오르내리다 보니, 험난한 서울 생활이 예감되었다. 마치 초등학교 시절, 마산으로 전학해 오면서 느꼈던 그런 낯선 도시의 불안감을 새삼 느꼈다.


그 집은 방이 여섯 개나 되는 한옥으로 깨끗하게 수리하고 있었다. 나는 그곳에 첫 하숙생으로 들어갔다. 일요일 저녁 늦은 시간, 짐을 풀고 정리한 후 아버지와 함께 인천에 계신 고모님 댁으로 갔다. 아버지는 고모부와 밤늦게까지 약주를 하셨다. 

“촌에서 아들 뒷바라지한다고 고생 많았십니더.”

“내가 뭐 한 게 있노. 농사만 짖제.”

“아이고, 촌에서 자식 서울에 보내는 게 얼마나 힘든데예.”

“황 서방이 여기 있으니까 우리 아들 좀 부탁하네-.”

“걱정 마이소. 처남도 이제는 서울에서 자주 보겠네예.”

“나도 서울 한번 살아봐야 하지 않겠나?”

아버지는 앞으로 서울에도 한 번 살아볼 꿈을 꾸고 계셨다. 아버지의 행복해하시는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당신의 잃어버린 꿈을 다시 찾아드린 것 같아, 나는 묘한 성취감을 느꼈다. 처음으로 올라온 아버지와의 서울 상경은 소처럼 일했던 농군의 평생 꿈을 이룬 것이었다.


다음날 나는,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의 마산행 버스 탑승장에서 아버지와 헤어졌다. 초등학교 때 마산으로 전학 갔을 때가 문득 생각났다. 그리고 왠지 또 불안해졌다.

아버지도 그런 마음이 있으셨는지 버스에서 다시 내려 내게로 오셨다. 그리고 호주머니를 뒤적거리시더니, 시골 들어가는 시외버스 차비만 남기고 가지고 계신 동전까지 모두 꺼내서 내게 주셨다. 

“밥 굶지 말고 이 돈 아꼈다가 묵고 싶은 것 사무라.”

뒤돌아서 버스를 타고 가셨다. 나는 고속버스터미널을 빠져나오면서 앞으로의 걱정과 왠지 모를 슬픔이 복받쳐 눈물이 났다. 나도 모르게 우리가 세상에서 제일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울고 나면 항상 머리가 맑아지고 앞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이 구체적으로 떠올랐다. 나는 그때를 놓치지 않고 기억하며 실천을 통해 습관으로 만들었다. 

그 후로 오랫동안 쌀 보따리, 김치통, 참기름, 마늘 등 수많은 가난을 들고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을 오고 갔다.


대학에 입학하고 보니, 주위 학생들 대부분이 지방에서 올라온 촌놈들이었다. 부산, 공주, 진주, 괴산, 고흥, 김해, 함안…. 시골 촌놈과 도시 촌놈, 모두 서울에서는 촌놈이었다. 이곳에서는 서울 사람 외는 모두 ‘촌놈’이란 단어로 부르고 있어, 그들 속에 묻혀 사는 게 좋았다. 서울에 사는 사람의 90%가 촌놈이란다. 여기서는 촌놈들이 더 당당하다. 서울은 촌놈들에게 평등했고 편견도 없었다.


대학에서는 여덟 명의 같은 과 친구들과 서로 가깝게 의지하며 친하게 지냈다. 그들 덕택에 나는 비교적 안정적인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가끔 생활비가 부족할 때는 주인아주머니가 빌려주셨던 만원의 배려, 그리고 친구들 간의 금전적 도움도 고마웠다. 그러나 친구들과 술을 마실 때, 나는 뒷전에서 돈을 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미안했지만 내 여건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학 1학년 때 친구들과 당구를 치기 시작했다. 어느 날 당구 게임비를 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호주머니에 5천 원이 있었지만, 나는 돈이 없다고 했다. 나는 그날부터 당구를 치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는 그런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대학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내가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지게 하는 그런 열린 세상이었다. 대학은 품격이 있었다. 그리고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공간이었으며, 나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노력할 수 있도록 지성과 낭만이 있는 공간이었다. 그곳에는 차별과 폭력도 없었다. 그때 나는 그곳이 ‘내가 더 성장해야 할 곳’ 임을 깨달았다. 나는 다시 한번 그런 기회를 준 부모님의 희생에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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