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을 먹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사실 나는 공황장애 고수이다. 처음 기억할 수 있는 발작은 아마도 초등학교 3학년 때쯤? 외삼촌이 해준 외계인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며칠간 숨이 안 쉬어지고 밥도 못 먹고 잠도 자지 못했다. 상상력이 풍부한 극 N인 어린 나는 외계인이 당장이라도 쳐들어 온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무기력함 때문에 매일 공포영화 속을 사는 듯한 기분이었다. 당연히 그런 말은 엄마에게 할 수 없었고 시름시름 앓고 있는 아이를 데리고 지금의 나보다 더 어렸을 엄마는 거의 1년을 병원이며 한의원이며 안 다녀 본 곳이 없었다. 예상대로 의사 선생님은 건강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이제는 그것이 공황 발작과 불안장애 때문이었다는 것을 엄마도 나도 잘 알고 있다. 엄마는 얼마 전 내게 말했다.
"엄마가 미리 몰랐어서 미안해. 그때도 오은영 박사님이 계셨더라면 어린 네가 불안이 심해서 그랬다는 걸 알았을 텐데…"
엄마는 오늘까지도 나에게 미안해한다.
나의 기질적 불안함은 아주 어릴 때부터 분명히 나타났다. 엄마가 들려준 많은 에피소드들이 있는데 그중 가장 자주 듣는 말 중 하나는 겁이 많아 멍멍이가 무서워서 유치원을 못 다녔다는 것이다. 사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멍멍이가 무서웠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새로운 것, 새로운 장소, 새로운 것들에 대한 거부감이 컸다는 것은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어린 나는 그것들을 어떻게 설명할 줄 몰라 괜히 멍멍히 탓을 했던 것 같다. 이 것 이외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동생과 엄마와 함께 낮잠을 잘 때 땅으로 빨려 들어가는 이상한 느낌이 무서웠다. (지금 생각해 보면 신체증상이었음)
불안에서 오는 불편한 기분을 잘 설명하지 못해 매번 배가 아프다고 말했다. 그래서 이유 없이 소아과 병동에 입원한 적이 몇 번이 있다.
학교 소풍이나 수학여행 전 며칠 동안 숨이 답답하고 신나는데 불편한 기분이 심해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었다.
맨날 소화제와 진통제를 달고 살았다. 어떤 이유던간에 신경 쓰는 일이 생기면 편두통이 심하고 소화가 잘 되지 않아 고등학교 친구들은 진통제를 달고 사는 나를 곧잘 놀리기도 했다.
이 외에도 신체증상에 민감하고 변화에 예민했다. 주로 감각이나 신경계가 예민했던 것이지 그렇다고 까다로운 아이는 분명 아니었다. 그땐 내가 왜 그렇게 느끼는지 왜 나만 이렇게 불편하게 많은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난 단지 엄마 말대로 "남들보다 예민한 아이"라고만 생각했다.
내가 겪은 것이 공황발작이라는 걸 처음 알았을 때는 시간이 아주 많이 지난 고3 졸업 후 대학교에 가기 직전이다. 누군가가 엄마에게 선물해 준 차이티 한 팩 5인용을 1인분인 줄 알고 한 번에 원샷을 했는데 갑작스러운 고용량 카페인에 당연히 내 몸은 정직하게 반응했다. 질식감, 손 발 마비, 어지러움, 울렁거림, 등 나는 내 신체반응에 적잖이 놀랐다. 마침 미국 유학을 바로 앞두고 있었는데, 여러 스트레스받는 일들이 많이 있을 때였다. 안 그래도 생각이 많은 참에 생전 처음 겪어보는 이상한 신체반응이 갑자기 나타나니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내가 똑바로 살 지 않아서 신에게 벌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었고 영화에서 보던 데로 내가 귀신에게 조종당하는 건 아닐까 하는 비이성적인 생각들이 들어 공포는 더욱더 심해졌다. 그런 게 아니라면 내가 겪는 이상한 느낌과 기분, 이 모든 것들이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러다가 결국 내가 미쳐버리거나 죽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몇 달을 불안에 시달렸다.
몇 달이 지나 대학생활을 시작하니 차츰 공황 증상에 대해 신경 쓰지 않게 되었고 대학생활 재미에 빠져 나도 모르게 불안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지만 주기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거나 몸이 아프면 지레 겁부터 먹고 어김없이 불안과 공황을 경험했다. 그러기를 10여 년. 나는 이제 공황을 꽤 잘 달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공황. 발작 순간에는 고통스럽지만 이제는 뻔해서 쉽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