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아르코창작기금 선정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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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전의 날이 밝았다. 대원의 계획은 간단했다. 4시간 안에 예식 전 과정을 끝내고 넉넉하게 3시 30분 기차를 타는 것이다. 올라가면 5시. 콘서트는 8시. 서울 안에서 이동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대원도 혼주가 되는 경험은 처음이라 자식들 시집, 장가보낸 동료들에게 물어물어 세운 결론이었다. 자식들도 바로 신혼여행을 가야 하니 대체로 예식장에 오래 머무를 일은 없다고 했다. 주영은 저녁 비행기를 탄다고 했고, 대원만큼이나 촉박한 일정이었다. 폐백은 없고 축가도 없다. 주례는 대원이 준비한 축하의 말 몇 마디 건네고 마무리하면 됐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일어날 만한 거의 모든 사고를 상상했다. 덕분에 전날 새벽부터 대원의 머릿속은 터질 것 같았다. 잠을 설쳐 낯빛마저 칙칙했다. 어쨌거나 오늘은 중요한 날이 아닌가.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에 가는데 대충 씻은 상태로 멀리 서울까지 가고 싶지 않았다. 도리질하며 일어나 의식을 치르듯 목욕했다. 중요한 날일수록 몸과 마음가짐을 바르게 해야 한다. 머리를 털고, 승호가 새로 선물한 향수를 구석구석 뿌렸다. 시원한 향이 곧장 대원 주변을 감쌌다. 하지만 향수를 뿌리는 일은 또 무척 낯설어서 대원은 기침을 여러 번 해야 했다. 기침이 잦아들고 대원은 엄지가 정반대로 가도록 손을 맞잡았다. 아내는 중요한 날이 되면 이렇게 대원의 손을 꼭 잡아 주곤 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상상치도 못한 변수에 시달리게 되는 법이라고. 행운이 필요할 때는 늘 이렇게 행운을 빌어 놓아야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했다.
정신없이 손님을 맞이하고 식장에 마련된 자리에 앉았다. 그 시간쯤이 되자 대원도 혼이 쏙 빠져서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안 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화촉 점화는 생략하지 않았다. 식순에서 그 몫을 빼면 아내의 빈자리가 더 크게 느껴질 것 같아서였다. 융통성 있는 시대 덕분에 아버지가 화촉점화를 하는 것이 아주 이상하지 않은 덕도 있었다. 그런데 막상 차례가 되니 정반대였다. 대원은 심호흡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결국 여기에 대원은 혼자 온 것이 아니다. 대원이 엄마, 아빠의 몫을 모두 해야 했다. 심호흡을 반복하며 마음을 다스리고 지금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초에 불을 붙이면서 사돈어른과 짧은 묵례를 했다. 고운 한복을 입고 예쁘게 머리를 올린 사돈이 부러웠다. 다잡은 마음이 무색하게 혼자 딸의 결혼을 축하하는 자신이 처량하고 초라했다. 갑자기 대원은 한없이 슬퍼졌다. 자리로 돌아와 앉았고 빈 아내의 자리를 내려다보느라 연습한 것들을 몽땅 잊고 말았다. 결혼식을 돕는 직원이 다가와 흔들어 부르고 나서야 대원은 부랴부랴 주영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제야 사소한 행동으로 시간을 지체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러다 혹시 기차를 타지 못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에 자리 잡았다.
급기야 주영 옆에 섰을 때는 속이 울렁거렸다. 주영에게서 나는 향수 냄새와 자신에게서 나는 향수 냄새가 이상하게 섞인 탓이다. 대원은 엄지와 검지 사이를 꾹꾹 누르며 울렁거리는 속도, 긴장도 풀리기를 바랐다. 행진을 위한 음악이 울리고 주영과 함께 식장을 걸었다. 사람들의 환호와 정신없는 조명 탓에 바르게 걷기 위해 애써야 했다. 승호 앞까지 도착해서야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대원은 무심코 주영의 손을 승호에게 건네는 대신 다른 반대편 손을 승호와 맞잡았다. 대원에게 생글거리며 웃는 낯으로 인사하던 승호가 당황하는 모습이 보였다. 연습한 건 이게 아니었는데 대원이 저도 모르게 그랬다. 그러니까 주영은 원래 제 것이 아니었고, 주영 말마따나 우리가 대단히 서로에게 어떤 권한이나 영향을 차지할 만큼 친한 것도 아니었다. 솔직한 말로 이렇게 손을 넘겨주는 일은 대원보다는 아내의 몫인 게 맞았다. 승호와 주영의 손을 양쪽에서 맞잡던 대원이 눈을 몇 차례 끔벅이다 두 사람의 손을 모두 놓았다. 서로의 손을 잡는 것은 부부가 될 두 사람이 알아서 하면 될 일이었다.
그 뒤로도 대원은 드문드문 자신 옆의 빈자리를 보며 헛헛함을 주체할 수 없었다. 화장한 얼굴은 답답해 얼굴 감각이 둔해진 것 같았고. 기차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이 결혼을 누구보다 기뻐했을 아내는 이 자리에 없고. 자신은 끝도 없이 홀로 허둥대고만 있었다. 주례 차례가 되어 얼결에 단상 위로 올라와서야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주영이 너무 황당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대원은 감정이 벅차올라 말을 잇지 못했다. 급하게 사회자가 분위기를 수습하려 했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대원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손수건을 꺼내 팽 소리가 나게 코를 풀었다. 손수건이 닿은 부분만 화장이 닦인 탓에 빨개진 대원의 코가 유독 눈에 띄었다. 대원은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알지 못해 속이 복잡했다. 주영이 다 커서 결혼까지 한다는 사실이 눈물 나게 기쁜 것인지, 아내가 이 중요한 날에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운 것인지. 아니면 대원이 혼자 모든 것을 다 겸하는 것이 서러운 것인지. 여전히 대원은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목을 짧게 가다듬은 대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