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나이 스물다섯부터 중국에서 일을 했어요.
첫 근무지는 중소도시였는데 한국 사람이 거의 없었지요.
어쩌다 만난 한국 사람들은 모두 가족단위의 주재원이었어요.
그러니 20대 중반의 미혼여자가 그곳에 일을 하러 왔다는 사실에
모두 신기해했고 어떤 이는 용감하다고까지 표현했어요..
(네. 저도 이 정도로 한국 사람이 없는 줄 모르고 간 거예요..ㅠㅠ)
직원들도 모두 한족이고 심지어 밥 해주는 아주머니까지 모두 한족.
외국인이 많지 않은 도시라는 건 어떤 의미겠어요?
치안이 많이 불안하다는 뜻이기도 하지요..
아파트 현관문마다 이중으로 철문이 달려 있는 건 기본이니까요.
처음 그곳에 갔을 땐 블링블링한 18k 목걸이를 하고
반지를 끼고 귀걸이를 하고 출퇴근을 했지요~
삼일째 퇴근길이었어요...
갑자기 뒤에서 오토바이 소리가 나더니 제 목 뒤가 뜨끈한 거예요.
만져보니 피가 흐르더라고요?? 목걸이 날치기를 당한 거죠!!
제 머리가 짧아 목걸이가 햇빛에 반짝거렸나 봐요.
직원들이 그렇지 않아도 목걸이 볼 때마다 걱정했다며
팔찌를 날치기했다면 손모가지가 날아갔을 텐데
목만 긁힌 게 어디냐는 살벌한 위로를 해주었어요.
그날부로 액세서리 바이바이~~
며칠 뒤 가방을 옆으로 메고 가는데 또 부웅 소리와 함께
제 가방이 어느새 저 앞 오토바이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거예요..
다행히 책만 들어서 아쉬운 게 없었지만 이젠 가방도 바이바이~~
어느 날은 길바닥에서 돈을 던져놓고 저를 보며 유인을 하더군요?
엮어서 공갈 협박하려는 수법인데 순진한 저는 아무것도 모르고
주인에게 돌려주라고 훈계를 하고 있었죠...
정의감 바이바이~~
정말 어린 나이에 산전수전 겪는 일이 몇 번 생기자 전 결심했죠..
절대 날치기의 목표물이 되지 말자!!
원래도 패알못이었던 저는 더 철저히 망가지기로 마음먹었어요.
길을 걷다 멈춰서도 가로수와 혼연일체가 되는 베이지 아니 나무껍질색과
길바닥에 엎드리면 나인지 길인지 모를 그레이 아니 시멘트색의 옷을 주로 입었어요.
가방 대신 구겨질 대로 구겨진 검은 비닐봉지를 들었어요. 새비닐봉지도 위험해 보였거든요.
지갑은 사치품이에요. 십 원 몇 장을 꾸깃꾸깃 접어 양말 속에 숨겨 다녔어요...
언제라도 치타처럼 뛸 수 있게 츄리닝을 입고 운동화를 신었지요.
어느 날은 퇴근길에 공장 근로자들 대열에 끼었는데 전혀 튀지 않고 소속감을 느끼게 했죠.
누가 봐도 중국판 자연인이다 나오는 비주얼이었어요.
뼈를 깎는 고통과 피나는 노력으로 더 이상 날치기의 표적이 되지는 않았어요.
음하하하 내 작전 대성공!!
그런데 말입니다..... 가만 보니 제가 너무 선을 넘은 거예요...
중국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날치기 안 당하고 예쁘게 다닐 수 있는지 비법을 아는 듯했어요..
중국 남자들이야 배를 까고 단추를 몇 개나 풀어헤쳐도 전혀 섹시하지 않은 신기한 패션이었지만
중국 여자들은 미니스커트에 하이힐에 은근 꾸미더라는거죠..
그러니 눈에 안 띄려던 저의 작전과 달리 저의 부랑자 패션은 더 눈에 띄고 있었어요..
하지만 괜찮아요... 난 원래 패알못이고 돈만 벌면 되니까 이 패션 내 취향저격이었어요.
그런데 말입니다... 저의 보호색 패션은 자주 오해를 받게 되더군요...
집 앞 슈퍼를 가서 이것저것 구경할 때면..
"쟤 한국인이래"
"쟤가?? 어딜 봐서??"
"맞다니까 말투도 좀 이상하잖아"
"말투는 여기 아닌 것 같기는 해. 남쪽에서 왔나? 아님 북쪽?"
"등치 봐!! 확실히 남방은 아니야!! 북방애인가 봐"
(중국에서 남방 - 지식인, 문화인, 호리호리한 몸/북방 - 호전적, 큰 몸뚱아리, 오랑캐 이미지임)
"그런가 보네.. 드라마 봐봐 한국 여자들은 피부도 하얗고 이쁘잖아..저렇지 않지.."
"하긴..."
'이봐!! 나 동쪽에서 왔어!! 동쪽!! 남쪽도 북쪽도 아니고 동쪽!!
너희 동쪽엔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단다. 그 한국에서 왔다고!!'
한두 번이 아니라 갈 때마다 저는 오랑캐였어요!!. 우이 c
하지만 마음속의 외침일 뿐 시원하게 제 정체를 밝히지는 않았어요..
굳이 내 입으로 한국인이라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니며 표적이 되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그래서 어느 날은 북방의 오랑캐가 되었다가 어느 날은 연변 조선족이 되었다가
어느 날은 운남 소수민족이 되었다가 수시로 카멜레온처럼 신분세탁을 당하고 있었죠...
내가 홍길동도 아니고 한국사람인데 한국사람이라고 말을 못 해 답답했지만
나중엔 사람들의 소곤거림을 즐기게 되는 경지에 올랐지요..
그런데 전 뜻밖의 장소, 뜻밖의 사건으로 꽁꽁 숨겼던 제 정체를!!
한밍아웃을 하게 되었어요.
저도 체크카드라는 것을 만들게 된 거예요...
카드를 발급받은 날.. 설레는 마음으로 atm 기계 앞에 섰어요..
내가 까막눈도 아닌데 그날따라 기계 속의 한자는 참으로 낯설게 느껴지더군요..
처음이라는 긴장감과 시간 안에 해야 한다는 촉박함이 섞여 눈앞이 흐려지는데
언제부터 사람들이 늘었는지 제 뒤로 꽤 긴 줄이 서있더군요..
제 뒤의 아주머니가 "티엔나 (세상에) 티엔나(세상에)" 외치며 저를 재촉하니
지금 내가 현금을 뽑고 있는 건지 오징어 게임을 하고 있는지 헷갈릴 정도로
식은땀이 흘렀지요...
아주머니는 "재 왜 저래?? 문맹 아냐?? 답답해 죽겠네"라고 들으라는 듯 말했어요.
급기야 "대체 어느 촌구석에서 왔길래 카드 기계 하나 몰라서 저러고 있다니?"
라는 말까지 나왔고 결국 전 터져버렸어요!!!
"나 외국인이야!! 한국인!! 이것들아 내 꼬라지가 이래도 한국인이라고!!
느리면 좀 기다려 주면 되지!! 너네 만만디라며?? 기다려!! 기다리라고!!"
전 그동안의 설움을 토해내듯 길바닥에서 한국인임을 만천하에 외치며 울부짖었어요!!!!!
"한국인?? 아 그랬구나...어쩐지...쟤 한국인이라서 잘 몰랐다네..."
이해해주는 듯한 뉘앙스에 맘이 풀리려 할 때였어요...
"근데 있잖아.. 드라마 보면 한국 여자애들 피부가 하얗고 예쁘던데..쟤는..."
"한국사람들이라고 다 이쁜 거 아냐!! 다 피부 하얀 것도 아니라고!!"
지긋지긋한 그들의 한국 여자 타령에 또 한 번 울부짖었어요!!
저의 외침에 모두가 숙연해졌죠..
그날 전 눈물의 현금 뽑기를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