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아침부터 먹구름이 끼더니 점점 흐려져 금방이라도 비가 올 것 같았습니다.
오후가 되자 예보대로 세찬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군요.
우산으로 감당할 수 없는 큰 비였기에 시끌벅적하던 놀이터는 오랜만에 조용했습니다.
저희 아이들도 굵은 빗줄기에 놀라 감히 나가자는 말을 못 하더군요.
그토록 염원했던 놀이터 패스에 신이 난 저는 내 집의 편안함과 안락함을 느끼며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엄마. 형아는?"
"형아 방에 없어?"
"응 없는데"
집안 곳곳을 찾아봐도 큰 아이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학원 갈 시간도 아니고 비가 이렇게 오는데 놀이터도 안 갔을 테고. 전화도 안 받고 대체 어딜 간 거지?
말도 없이 친구 만나러 갔나? 대체 어딜..... 설마.... 설마.... 이 비에 미치지 않고서야... 에이 설마....'
한 시간이 넘도록 아이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자 속이 탄 저는 우비와 우산을 챙겨 엘리베이터를 탔습니다.
초조함으로 1층에 도착해 열린 문 앞에는 아이가 끌고 간 자전거와 함께 비에 쫄딱 젖은 모습으로 서 있었습니다.
온몸은 비에 젖었다지만 얼룩진 얼굴은 비 때문이 아니란 것쯤은 금세 알 수 있었습니다.
시뻘게진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흘러나왔고 축 처진 입술 사이로는 침까지 줄줄 흘리며 울고 있더군요.
"어디서 뭘 하다 이제야 오는 거야?"
"친구랑 놀이터에서 딱지 쳤는데 내가 져서 제일 아끼던 것을 잃었어.. 엉엉엉"
이 큰 비에 딱지 치는 어떤 미친 x이 설마 있을까 했는데 그 미친 x이 제 아들이더군요.
아이의 눈물이 폭발하는 순간 저도 그동안 참았던 화가 폭발했습니다.
집으로 끌고 와 따뜻한 물을 받은 욕조에 밀어 넣으며 소리쳤습니다.
"아무리 여름이라도 그 비를 맞으면서 딱지를 치면 어떡해? 감기라도 걸리면 누구를 고생시킬라고 그래?
일단 따뜻한 물에 몸을 좀 담그고 니가 오늘 뭘 잘못했는지 반성해!!"
너의 죄를 니가 알기를 바라며 문을 닫고 뒤돌아서는데 대성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더군요.
"실버디~~ 실버디~~ 내 실버디야~~ 아아아~내 실버디~~ 엉엉엉 잘 가라 내 실버디~~ 엉엉엉"
부모 잃은 아이나 나라 잃은 독립군에 비할바는 못되나 적어도 아이는 분신을 잃은 듯 서럽게 울어대니
니 죄를 알기는커녕 아이를 다그치는 내 죄를 묻는 듯했습니다.
10분이 넘어가도록 대성통곡하는 아이의 속상함에 저도 잠시 목이 메이더군요.
"그래 울어라. 실컷 울어. 실컷 울고 털어버려."
실컷 울라는 저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악을 쓰며 실버디를 찾아대니 이웃들이 우리 집에 살지도 않는 실버디의 안부가 궁금해할 지경이었습니다.
실성의 위기를 딛고 일어선 아이는 또다시 연습에 매진하더군요. 학교 공부를 이렇게 했다면 서울대는 무조건 합격일 텐데 에너지를 다른 곳에만 쓰는 아이가 못마땅하더군요.
그 형에 그 동생이라고 1학년 둘째도 곁눈질로 형을 흉내 내더니 일찌감치 재능을 보였습니다.
자연스럽게 형을 따라 놀이터 엘리트코스를 그대로 밟으니 실력이 일취월장했지요.
주변에서는 대체 뭘 먹이길래 형제가 딱지를 저리도 세차게 잘 치느냐는 비법까지 물어오더군요.
다른 어머님들에게는 학원 정보를 물으면서 왜 나한테는 딱지 비법을.....
내가 아들들을 참 잘 낳아놔서 이리 놀이터를 벗어나지 못하고 지박령이 되려나보다..
내 팔자야 내 팔자야 소리가 절로 끊임없이 리듬을 타니 저도 재능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엘리트코스를 밟는 수재들인데도 보고 있자면 한숨이 절로 나오는 저와 달리 아이들은 그저 해맑게 웃으며 즐기니 그래 니 행복이 곧 내 행복이다라는 정신승리를 하였지요.
사실 놀이터 엘리트코스도 아무나 밟는 게 아닙니다.
호기롭게 시작했지만 도저히 연습할 시간이 없던 한 아이는 학원을 땡땡이치면서까지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곧 쫓아온 엄마에게 목덜미를 잡혀 끌려갔으니 그 뒷모습이 참으로 불쌍했지요.
마음은 얼음장이고 싶지만 진판(진짜 내기)에 멘탈은 얼음처럼 녹아내려 눈물로 승화되니 옆에 있던 엄마도 같이 무너져버리니 마음의 평화가 더 시급해 보였습니다.
내기에 임하는 태도가 신의 포스였던 여자 아이는 가녀린 팔뚝으로 체력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중도 포기하였으니 보는 제가 안타까운 심정이었지요.
남들 다 가는 학원도 안 가고 남들 다 가는 집에도 안 들어가고 놀이터에서 사는 저희 아이는 엘리트 코스를 밟기 위한 모든 조건을 갖추었다 말하자니 제가 너무 슬퍼지는군요.
이 모든 어려움과 역경을 이겨내고 몇 명의 아이들이 최후의 승자가 되었으니 그중 하나가 첫째였지요.
이번엔 우리끼리 협회가 아닌 놀이터 친구들, 학부모 모두가 인정하는 고수 반열에 올랐으니 더 이상 이룰 목표는 없을 듯했습니다.
드디어 이 판을 떠난다는 생각에 소름 끼치도록 좋았던 저는 아이의 또 다른 선택에 복잡한 심정이 들더군요.
"엄마. 나 딱지 그룹을 만들었는데 내가 대장이야. 내 허락 없이는 우리 팀에 못 들어와."
듣도 보도 못한 딱지팀이라니. 아이의 자랑에 진심으로 궁금해지더군요.
"근데 너의 그 팀은 왜 필요한 거야? 그냥 1:1로 치면 되는 거 아니야?"
"엄마 아직도 몰라? 1:1도 치고 팀 대결도 하는 거지!"
"그래? 그럼 누구누구 니 팀인데?"
"2학년부터 5학년까지 다양해. 하여튼 내가 대장이야"
그동안 공들인 노력과 시간에 대한 보상으로 내 아이가 리더가 되었다는 뿌듯함에 이번엔 제가 실성의 위기가 오더군요.
그럼에도 실성이 기쁨으로 벅차오르는 순간이 있었으니 올여름이었습니다. 아파트 단지 내에서 주민들을 위한 행사가 열려 많은 아이들이 참여하게 되었지요.
키링 만들기, OX 퀴즈 등 여러 코너가 있었지만 아이들을 가장 설레게 한 건 딱지치기였습니다.
비슷한 연령대 아이들끼리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해 우승자에게는 문화상품권을 준다는 소식에 아이들은 저마다 자신의 승리를 다짐했지요.
단, 공평한 내기를 위해 주최 측이 준비한 종이로 자기 딱지를 만들어 참여해야 했습니다.
드디어 시작된 딱지치기!!
첫째가 먼저 1라운드를 시작했습니다. 가벼운 승부가 될 거란 예상과 달리 상대의 미니 딱지가 아이의 큰 딱지에 눌려 뒤집어지지 않았고 미니 딱지는 힘이 없어 큰 딱지를 뒤집지 못하니 시간이 지날수록 둘은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보다 못한 사회자가 가위바위보를 제안했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아이는 긴장한 표정으로 임하였지요.
단판 승부에 진 아이는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아마 이제는 가위바위보를 연습해야겠다고 다짐했을지 모릅니다.
실망도 잠시 아이는 조용히 한쪽 벤치에 앉아 사람들의 관심으로부터 달아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아이의 바람과 달리 지나가는 친구들이 "야 너 진짜 탈락이야? 왜?" 한 마디씩 던지니 부끄러움은 아이의 몫이었습니다.
아이들뿐인가요? 어떤 어머님은 자신이 더 놀래며 "애!! 너 졌어? 네가?? 왜??"를 외쳐주시니 아이의 탈락은 최대 이변으로 꼽혔지요.
첫째의 탈락이 조금은 허무했지만 신에게는 아직 둘째가 남아있습니다.
형에게는 한참 못 미치지만 친구들 사이에서는 월등한 실력을 뽐내니 조금은 기대하게 되더군요.
헌데 둘째는 생각보다 더 높은 기량을 발휘하여 모든 게임을 한방에 끝내는 저력을 보이니 점점 우승에 가까워졌습니다.
결승에서도 한방 승부로 보는 이들의 감탄을 자아냈으니 둘째의 우승 또한 최대의 이변이었습니다.
역시 스포츠는 각본 없는 드라마입니다.
문화상품권을 손에 넣고 좋아하는 둘째를 보니 역시 엘리트코스는 신의 한 수였다 생각되더군요.
1년이 넘도록 딱지에 진심이었던 두 아이는 얼마 전 명예롭게 은퇴했습니다.
아니 은퇴당했습니다. 이제 놀이터는 저마다 핸드폰으로 포켓몬고를 하는 아이들로 넘치기 때문입니다.
각고의 노력 끝에 따온 딱지들은 거실 한쪽에서 존재가 잊히다 못해 애물덩어리로 전락해 베란다로 밀려나는 신세가 되었지요.
딱지치기에 진심이었던 아이들은 대세의 흐름에 맞게 올해는 포켓몬고에 진심입니다.
포켓몬도 레벨업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작년 같은 열정을 또다시 게임에 쏟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제 심정이 복잡해집니다.
딱지처럼 마냥 응원하고 뒷바라지 하기에는 참 묘한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도저히 게임에 미친 자여 마음껏 즐기라고 못하겠습니다. 정해진 시간 잘 지켜라 정도가 딱 좋겠습니다.
이 또한 지나고 나면 언젠가 저희 아이도 공부에 미치는 날이 오겠죠.....? 엄마가 간절히 원한다. 아들아.
포켓몬 응원은 잠시 접어두었다 공부에 미치는 날 다시 펼치겠습니다. 기회가 오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