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력증을 한방에 날려버린 아들의 엽기적인 엽서

by 아이쿠

올봄 저는 무기력증으로 세상 모든 게 귀찮았습니다.

가게일도 집안일도 아이들 케어도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것 없이 억지로 억지로 하루를 보내는 날들이었지요.

어버이날이라며 학교에서 만들어온 카네이션과 감사편지들을 뿌듯한 표정으로 건네는 아이들에게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화장대 한구석에 그대로 방치할 정도였습니다.


답답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고 아무 생각도 없이 초점 없는 눈으로 한 곳을 응시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날도 보지도 않는 티브이를 틀어놓고 아주 긴 멍을 때리고 있었습니다.

분명 방금 전까지 영화를 소개하는 프로였던 것 같은데 어느새 티비에서는 시크릿 쥬쥬가 마법이 안 통한다며 걱정하는 대사가 흘러나오고 있더군요.

아들 둘을 키우는 동안 카봇이나 공룡메카드는 자주 보았어도 한 번도 본 적 없는 시크릿 쥬쥬를 아무런 의식도 없이 30분째 틀어놓고 있는 저를 발견하고는 무기력증의 심각성을 깨닫는 순간이었지요.

어떻게든 이 상태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에 평소 자주 들어가는 카페에 방금 겪은 황당한 일에 대해 썼고 많은 분들이 산책을 하든 외출을 하든 집안일을 하든 몸을 움직여야 활력을 되찾는다고 조언했습니다.


조언에 따라 집안을 둘러보니 제 눈길이 향하는 곳곳에서 그동안 무책임하고 무심했던 제 상태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더군요.

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밀린 빨래를 돌리고 화분 분갈이도 하며 집안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조금씩 깨끗해지는 집을 보며 답답했던 마음도 조금은 해소가 되는 기분이었습니다.

청소의 끝 즈음 화장대 앞에 방치되어 있던 어버이날 카드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엄마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매년 받는 편지이지만 아이들의 감사 인사는 매번 몽글몽글한 감동을 선사합니다.

둘째는 저학년답게 예쁜 그림이 그려진 엽서까지 끼워두었으니 그 깜찍함에 웃음이 절로 나오더군요.

이 귀여운 녀석들을 위해서라도 내가 이겨내리라 다짐하며 둘째가 준 엽서를 자세히 들여다보던 저는 그야말로 웃다 울다를 반복하며 광기를 보였습니다.


무슨 일이냐고요? 둘째의 엽서는 이런 모양이었습니다.


아직 잘 모르시겠다고요? 뒷면이 요렇습니다... 스크롤을 올려 다시 앞면을 보시겠어요?



광기의 순간에도 무언가 익숙함이 느껴졌습니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였더라... 네... 이 앙증맞은 엽서가 며칠 전 엘리베이터에 꽂혀있던 게 생각났습니다.

멕시카나가 절 속인 건지 둘째가 절 우롱한 건지 모르겠으나 이래저래 현타가 오는 순간이었지요.

하교한 둘째에게 터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 못 하며 물었습니다.

"아들아. 크크크 이게 뭐야? 크크크"

"엘리베이터에 있길래 가져온 거야. 엄마 나 치킨 사줘"

"너 혹시 어버이날을 어린이날로 착각한 거 아니니? 크크크"

말은 이렇게 했지만 어떻게 안 사줄 수가 있나요.

아이의 엽기적인 엽서덕에 그날 저의 무기력증은 한 방에 해결되었으니까요.

이쯤 되면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것이 마땅하다 생각되네요.

고마워요 멕시카나! 고맙다 아들아! 덕분에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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