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학교를 안 가고 쉬는날.
엄마 아빠는 일찍이 일하러 나갔다. 할머니가 바로 옆집에 살지만 역시나 밭일이 바쁘고 할아버지는
몸이 아픈 환자라 우리를 온전히 돌봐줄 수 없다. 이런 날엔 바로 아랫집인 외할머니 집으로 놀러 가야지.
외할머니는 나에게는 외숙인 아들네와 사는데 총 8명이나 되는 대가족이다.
그래서 밭일보다는 아들 부부와 다섯 손자들 먹일 음식 장만으로 항상 바빴다.
"할머니 저희 왔어요"
"응 지선이 왔냐?"
마당 한쪽에 있는 할머니 가마솥은 오늘도 팔팔 끓고 있었다.
"할머니 오늘은 뭐 만드는 거예요?"
"응 청국장 끓인다. 좀만 기다려 밥 차려주마"
할머니가 밥을 하는 사이 나와 내 동생들, 종국이, 종국이 동생 혜진이는 마당에서 이리저리 뛰 다니며 놀았다.
종국이 위로는 형이 세명 있는데 두 오빠들은 친구 만나러 일찍 나갔고 셋째인 종훈 오빠만이 우리와 같이 놀아주었다. 혜진이는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리지만 오빠들이 많아서인지 항상 나보다 한 수 위다.
평소 혜진이에게 당하는 일이 많아 홧김에 욕을 하기도 했다가 또 언제그랬냐는듯 어울려 놀곤했다.
4학년인 종훈 오빠는 잘 놀아주는 착한 사람이지만 항상 혜진이 편을 들기에 나는 쌓인 불만이 많았다.
방금도 분명 혜진이가 먼저 날 때렸는데 혜진이가 울어대니 나만 혼냈다. 늘 이런식이다. 혜진이가 울면 상황끝!
억울한 기분도 들고 나도 내 편 들어줄 언니 오빠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애들아 밥 먹어라. 얼른 평상에 앉어"
할머니는 동그란 은색 양철 밥상에 각종 나물 반찬과 밥을 차려내고 오늘의 요리인 청국장도 한그릇씩 떴다.
나는 꼬린내 나는 청국장을 싫어한다. 할머니가 퍼준 청국장을 손도 안 대자
"지선이 저거는 이런 거 못 먹더라?!"
종훈 오빠가 내 꼴이 보기 싫다는 듯 말했다.
"발 꼬린내 나서 못 먹는 거야"
"너 오리탕도 못 먹잖아? 너는 못 먹는 게 왜 이렇게 많냐? 너 혼자 입이 고급이냐? 너 쫌 거시기해"
라며 또 나를 무안하게 했다.
할머니는 오리탕도 자주 끓였다. 압력밥솥에 나무 약재와 오리를 푹 끓여 진한 국물이 우러난 오리탕이 나는 싫었다. 난 맛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오리 기름이 두껍게 둥둥 떠있는 국에 내 숟가락을 담그는 게 내키지 않았다.
할머니가 떠준 오리탕도 그대로 남길때가 많았는데 종훈 오빠는 그 꼴도 보기 싫었던 모양이다.
내가 생각해도 난 못 먹는 음식이 많다. 엄마가 잘하는 간재미 무침, 홍어무침을 한 번도 먹은 적이 없다.
간재미 무침은 빨간 양념 속의 생선이 싫고 홍어 무침은 홍어 냄새가 싫다. 그러니 이런 놀림을 당하는 것이지.
하지만 오빠가 모르는게 있다. 난 청국장과 오리탕을 못 먹지만 할머니가 만든 다른 음식은 좋아한다.
특히 산자, 떡과 같은 명절 음식들. 명절이 다가오면 할머니는 찹쌀가루 반죽을 얇고 넓적하게 밀어 산자를 만들었다. 뜨듯한 방에 신문지를 깔고 그 위에 얇게 민 산자를 널어 몇 날 며칠을 말렸다.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최소한의 길만 터놓고 방안에 산자를 다 깔아놓았기에 조심히 다녀야 한다.
실수로 산자를 밟거나 그쪽에 넘어지기라도 하면
"아 조심하제 뭐단다고 거기를 밟고 그러냐. 아야 정신 사나우니까 밖에 가서 놀아라"
라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어쩔 땐 "염병들을 하네"라는 욕도 들어야 했다.
잘 말려진 산자를 기름에 튀겨내 조청을 바르고 쌀 튀밥을 묻히면 맛나디 맛난 최고의 명절 음식이다.
제사상에 올릴 음식이지만 오며 가며 할머니 몰래 먹다 보면 어느새 바닥을 드러낼 때가 많았다.
하지만 우리는 제사상에 올릴 건 따로 감춰둔 것을 알고 있었기에 혼날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인절미도 직접 만들었는데 잘 쪄낸 찹쌀을 도구통(절구통)에 넣고 도구대(절구공이)로 찧는다.
외숙의 도구대가 하늘을 향해 올라간 틈에 할머니는 도구통안의 쌀을 고루고루 찧이게 정리한다.
자칫 잘못하면 도구대로 손을 찍을 수 있으니 모두 숨죽인 채 구경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또
"아야 밖에 가서 놀아라"라는 말과 함께 신작로로 쫓겨날테니까.
마루에 깔아 놓은 큰 비닐 위에 노란 콩가루를 뿌린 후 방금 치댄 찹쌀떡을 납작하게 펴내고 그 위에 노란
콩가루를 또 고루고루 뿌린다. 가마솥 뚜껑을 떡 위에 세우고 굴렁쇠 굴리듯 왔다 갔다 하면 떡이 잘라졌다.
솥뚜껑으로 자른 긴 떡을 도마 위에 놓고 칼로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내 콩고물에 던져 손으로 섞어 내면 고소한 인절미 완성이다. 콩가루를 뿌릴 때부터 이미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하니 우리는 그때부터 옆에 서서 촐싹거리며 떡이 완성되기를 기다린다. 할머니가 떡 한 점을 집어 내 입에 넣어주면 고소함이 가득 퍼지고 쫄깃한 떡 맛에 나도 모르게 할머니에게 쌍따봉을 날리게 되지.
할머니가 잘하는 떡이 또 있는데 바로 화전이다. 봄이면 뒷산에서 따 온 진달래를 비롯한 색색의 꽃잎들을 구운 찹쌀떡 위에 놓는데 너무 예뻐 떡이 아니라 또 다른 꽃 같다.
먹기 아까울 정도인데 실상 맛은 인절미의 고소함이 없는 밋밋한 맛이다.
여름이면 우리가 잡아온 다사리(다슬기)를 할머니는 초록색의 이끼 물이 다 빠질 때까지 도구 통에서 깨끗하게 씻어냈다. 그리고선 된장과 마늘을 넣고 익혀내면 된장이 스며든 그 맛이 또 일품이지.
다사리를 쪽쪽 빨면 내입으로 쏙쏙 들어오는 쫄깃쫄깃한 다사리는 최고의 여름 간식이다.
내가 좋아하는 할머니 음식이 이렇게 많은데 아무것도 모르고 내가 쫌 거시기 하다는 오빠의 말이 섭섭하다.
그때 종훈 오빠가 된장 덩어리를 기분 좋게 한입에 먹더니 곧 뱉어냈다.
"아 진짜!! 고기인 줄 알았는데 된장 덩어리야!!"
종훈 오빠는 퉤퉤퉤를 연달아 하며 입속에 남은 작은 된장 덩어리들까지 뱉어냈다.
"오빠 된장도 못 먹었어?? 오빠 쫌 거시기 하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오빠를 놀렸다.
오빠가 나를 쳐다보더니 할 말이 없는지 조용히 먹던 밥을 계속 먹었다.
아 통쾌해!! 아까 혜진이 때문에 억울했던 마음까지 싹 사라져 밥맛이 좋았다.
오늘도 외할머니덕인지 종훈오빠덕인지 모를 맛있는 한끼를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