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생각연습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든 Jan 13. 2023

개와 고양이, 그리고 사람

내 한 몸 챙기기에도 힘에 부치곤 하지만, 언젠가 생활에 여유가 생긴다면 적막을 깨뜨려 줄 다른 종과 어울려보고 싶다. 그리고 그때가 된다면 강아지보다는 고양이가 좋을듯싶다. 단순히 취향 문제는 아니고, 내가 하는 생각이 자주 그렇듯 많은 고민을 거친 결론이다.


   강아지에겐 미담이 많다. '온 세상이 날 버려도 날 좋아해 주는 유일한 존재'라던가, '홈캠을 보니 현관 앞에서 온종일 나만 기다리더라' 같은 이야기들이다. 애정과 호기심이 많은 순수한 어린아이를 떠올리게 한다. 반면 고양이는 혼자 있기를 좋아하며 까칠하고 제멋대로인 종으로 묘사된다. 인간으로 치면 사회성이 떨어지는 셈이다. 고양이의 주인들은 주종관계를 역전하여 '집사'를 자처하며, 역전된 '주인'의 심기를 보살핀다는 농담이 자주 들려온다.      


   그럼에도 고양이에게 더 관심이 가는 이유는, 내겐 강아지의 애정과 관심을 감당할 용기가 없기 때문인 것 같다. 고양이가 요구하는 안락한 공간과 식사, 적당한 산책까지는 감당하겠지만, 책임과 친절의 범위를 넘어선 능동적 애정을 주어야 하는 강아지에게는 겁이 먼저 난다. 애정은 복종보다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한때 꿈이었던 선생님이 되는 것을 포기한 이유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다. 동물 한 개체도 쉽지 않은데, 사람의 무리는 오죽하겠는가. 나는 정말이지 마음의 그릇이 작다.     


   호모(사람) 속의 사피엔스가 수많은 동물과 친척 종들을 제치고 지구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이 마음 그릇의 크기, 친밀함의 너비, 사회성 덕분이라고 한다. 개가 번성할 수 있었던 것도 같은 이유며, 고양이는 아마 귀여운 외모로 거두어지지 않았다면 멸종하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야생의 개는 있지만 야생의 고양이는 없는 것을 떠올려도 그렇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같은 유형의 사람이, 고양이처럼 귀엽지도 않은 채 선사시대에 존재했다면 오래지 않아 유전자가 사멸했을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사람이 지금 살아있는 이유는 현대사회의 높은 밀도로 이루어진 안전망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게 부족한 ‘타인을 향한 관심과 애정’을 주변의 수많은 이들이 보상해주고 있기에 생존을 넘어 삶을 추구할 수 있다는, 다소 인류애적이고 따뜻한 상상에 이른다. 심지어 이런 상상이 아주 무용한 것임에도 들어주는 이들이 있어 마음을 지키는 데 큰 이로움을 얻는다. 파고들면 끝이 없다. 선생은 못 되어도 선생을 돕는 일을 하고 싶은 이유가 이것일까.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아니 그보다 둔탁한 사람이로소이다. 그렇기에 내게 말을 걸고 다가와 준 이들이, 용기 내어 붙인 말에 응답하는 이들이, 볼 것 없는 글을 격려하는 모든 이들이 한없이 따스하다.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강력한 처벌과 불매운동, 그리고 사유하는 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