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생각연습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든 Jul 31. 2024

헬스장과 트로트, 그 기묘함에 대해

출근하지 않는 일상은 웬만한 의지가 아니고서야 쉽게 나태해진다. 전업 대학원생이 되면서부터 운동시간을 아침으로 옮긴 이유다. 아침에 눈을 뜨면 뇌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운동화를 신는다. 헬스장에서 1시간가량 땀을 흘리면 하루를 잘 살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헬스장은 활력 있는 곳이다. 오로지 몸을 움직이기 위한 공간이니 당연한 말이다. 거기에 더해 넓은 공간을 채우는 쇳덩이들, 에어컨 바람에 저항하는 인체의 열기, 강한 비트의 힙합과 EDM은 한 뼘의 무기력함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곳에선 시간을 젊음에다 붙잡아둘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한 기분마저 든다.


   몇 주 전부터 작은 변화가 생겼다. 다니는 헬스장에서 이른 아침 시간에, 딱 내가 운동하는 시간에 트로트를 틀기 시작했다. 쿵짝 리듬 위에 들리는 정직한 가사와 끓어오르는 목소리, 트럼펫의 간주를 듣고 있자니 별스런 웃음이 났다. 명절날 어르신들이 모인 거실에 어정쩡하게 서있는 기분이었다.


   에스파와 두아 리파가 아닌 박상철, 장윤정 씨와 운동하려니 자꾸 힘이 빠졌다. 숨을 들이마시고 배에 단단히 가둬야 하는데, '흡'하고 참은 호흡이 '아~그리운 사랑' 하는 간드러지는 소리에 새어나가기 일쑤였다. 음악이 운동에 이토록 큰 영향을 주는지 전에는 미처 몰랐다.


   당혹스러움에 제대로 운동하지 못하는 며칠이 지났다. 그리고 땀에 젖을까 두고 다녔던 이어폰을 챙기는 것으로 나름의 돌파구를 찾았다. 그리고 다시 익숙한 감각을 되찾으려 하니, 보이는 풍경이 조금 달랐다.


   저녁시간대에 헬스장을 찾으면, 주류는 바디프로필이 어울리는 청년들과 코어근육을 갈망하는 중년의 직장인들이다. 수십 년 구력의 몇몇 몸짱 할아버지를 제외하면, 노인들은 보통 러닝머신이나 자전거에서나 간간히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아침 시간대 헬스장의 주 고객은 노인들이었다. 특히 환갑을 갓 넘겼을, 얼마 전 자녀의 결혼식을 치렀을 법한, 주기적으로 단골 미용실에서 검게 염색한 것 같은 할머니들이었다. 몇 달을 다니면서도 기구에 자리가 여유로워 좋았을 뿐, 사람의 차이를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 도대체 왜 이런 음악을 트는 거지 하고 의문을 가지려는 찰나, 비로소 그들이 눈에 들어왔다.


   내가 상당한 결심으로 시작한 아침 운동이 그들에겐 일상인듯했다. 고강도 근력운동 대신 가벼운 걷기 운동과 스트레칭으로 아침을 깨우고 있었다. 내가 그토록 괴로워했던 트로트를 흥얼거렸다. 대화 없이 신음만 들리던 저녁과 달리 소소한 잡담이 있었고, 또 한 명 한 명 입장할 때마다 반갑게 인사했다.


   17세기 철학자 베이컨은 종족의 우상을 말하며, 모든 것을 인간의 잣대로 바라보지 말 것을 경고했다. 나는 이보다 더 좁은 청년, 또는 직장인, 경제활동인구의 잣대로 그 공간을 해석했다. 헬스장은 당연히 젊고 힙하고 고독하고 땀내 나는 공간이어서, 트로트는 어울리지 않는 에러라고 생각했다. 세상엔 나와 달리 해석하고, 다른 방식으로 삶을 사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도 말이다.


   여전히 뽕짝 리듬에 힘을 내기는 어렵다. 고강도 근력운동에는 확실히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그뿐이다. 헬스장은 말 그대로 '건강'을 위한 곳이기에 신체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있을 수 있으며, 건강을 추구하는 방식도 다양하다. 그곳에 고강도 근력운동에 최적화된 '힙한' 음악만 나오란 법은 없다.


   '힙하다'는 말은 비주류, 개성을 추구하는 '힙스터'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최근의 용례로는 그 반대로 주류 문화, 유행을 충실히 따르는 것을 지칭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의미로 트로트를 틀어주는 헬스장이야말로 주목받지 못한 비주류에 집중하는,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진정한 힙스터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1호선은 왜 전설이 되었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