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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든 Jul 08. 2024

1호선은 왜 전설이 되었나

빌런의 뒷편을 상상하다


6월의 이상 고온이 지속되던 지난주, 영등포역에서 비둘기 한 마리가 사람의 무리를 따라 들어왔다. 사람들이 빈자리에 다급히 엉덩이를 던지는 동안, 비둘기는 그들 위 손잡이 봉으로 몸뚱이를 날려 앉았다. 전철의 문은 닫힐 때가 되어 닫혔고, 문 안쪽에서는 이 낯선 승객에게 잠시 시선이 모였다.


   사람들은 휴대폰을 들어 작은 이벤트를 저장했고, 누군가에게 공유하는 듯 손을 바삐 움직였다. 비둘기는 봉의 시작 지점에서 두 번 정도를 뛰어 중간 지점에 안착해 머물렀다. 비둘기 아래의 사람들은 예상되는 비위생에도 불구하고 어렵사리 구한 자리를 지켰다. 몇 개의 역을 이동하며 관심이 사그라들 즈음되니 비둘기는 보이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휴대폰 말고 지켜볼 만한, 또 수다의 소재가 될 만한 재미있는 사건이 끝난 것에 내심 아쉽기도 했다.


   1호선은 서울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많은 이들의 집과 일터를 잇는 일상의 공간이다. 동시에 하루 걸러 하루의 꼴로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없는 인간군상을 마주치는 곳이다. 걸인, 노숙자, 정신질환자는 흔한 편이다. 손잡이에 발을 걸고 거꾸로 매달린 ‘스파이더맨’, 황금 갑옷을 두르고 큰 모형 검을 흔드는 노인 ‘자르반 84세’ 등 상식을 벗어난 인물들이 등장한다. 인터넷상에서 이들은 쾌적한 전철 이용을 방해하는 ‘빌런’으로 불리곤 한다.


   이런 광경을 목격한 이들은 ‘전설의 1호선’이란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이들이야말로 수도권이 제공하는 시청각 콘텐츠이자 문화적 혜택 중 하나라고 비틀어 표현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단조로운 일상 속 일종의 여흥 거리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젠 하다 하다 사람을 넘어 문명화된 비둘기까지 마주치고 말았다.


   그러나 어디서 나타났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는 다른 빌런들과 달리, 비둘기는 익숙함과 낯섦의 경계를 밟고 있었다. 어디서나 볼 수 있으나 이곳에서만은 볼 수 없는 존재, 비둘기는 이 공간 너머의 여정을 상상하게 했다. 영등포 땅에서 서식하던 비둘기가 10량짜리 쇳덩이에 실려 노량진 땅에, 또는 강 건너 용산 땅에 옮겨졌다. 우리에게 일상인 전철은 비둘기에게 비일상이었다. 그리고 옮겨진 낯선 땅에서 다시 일상을 일구고 있을 것이다. 눈치 없이 날아든 비둘기 한 마리가 공고한 일상과 비일상의 경계를 흐트러뜨렸다.


   우리가 비일상이라 부르는 많은 것들이 당연히 존재하지만 단지 볼 수 없었던 것은 아닐까 부끄러이 생각했다. 수많은 괴짜와 빌런들도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않았을 뿐, 나름의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자르반 84세’의 노인도 한 인터뷰에서 한때 택시를 운행하던 사회인이었음을 이야기했다. 인터넷에 심심찮게 올라오는 ‘오늘자 1호선 레전드’는 늘 존재해 왔으나, 인생의 어느 시점에 도시의 생활양식과 어울리지 않아 볼 수 없었던 이들이다.


   도시의 울타리는 쓸모 있는 것들만 시야에 남겨둔다. 나름의 경제활동으로 현대문명을 영위하고 재생산에 기여하는 사람, 또 그들과 그럴싸하게 어울리는 것들이다. 영 쓸모가 없어 보이는 걸인, 노숙인, 정신질환인, 발달장애인들은 시야에서 내쫓긴다. 그렇게 우리의 일상은 그들의 발 디딜 곳이 줄어들며 함께 협소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전철은 사회에서 숨겨진 이들을 마주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다. 그들 또한 우리와 다른 곳에서 나름의 일상을 영위하는 사람임을 인식한다면, 잠깐의 자극과 여흥으로 느껴지는 그 소동들은 나와 소외된 이들의 서로 다른 일상이 교차하는 사건이 된다.


   이젠 전철을 타며 ‘이상한 사람’을 보았다고 자리를 피하고 단톡방에 공유하기보다, 비일상이 된 그들의 일상을 짐작해보려 한다. 바닥을 기며 구걸하는 이가 견디어야 했을 수치심을, 악취에 무뎌진 노숙자의 자존심을, 괴상한 옷을 입은 포교자의 절망과 구원을, 언성을 높이는 노인의 찬란한 과거와 설움을, 정상적이지 않아 보이는 모든 이들의 삶의 모습을 떠올리려 한다.


   기껏해야 몇 정거장을 지나는 동안 한 공간에 머물 뿐이지만, 우리의 깔끔한 문명이 저들의 소외에 빚지고 있음을 기억하려 한다. 쾌적한 이동을 방해하는 ‘빌런’보다, 함께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대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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