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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g Sep 24. 2022

바이엘 4권의 특별한 의미

체르니 가기 힘들구만

2020년 초, 피아노 학원을 보내기로 결정만 하면 코로나 N차 유행이 빵빵 터져 취소를 반복했다. 몇 번 미루다 2020년 12월 말에 개인 레슨을 시작했고, 지금 진도는 바이엘 4권에 멈춰 있다. 피아노를 20개월 배우면 최소한  <하울의 움직이는 성 OST>나, <부르크뭘러> 정도는 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고, 우리집 아이는 더욱 다르다.

 음악을 가까이하게 하고 싶어 시작한 수업이기 때문에 열심히 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아이는 뭐든지 스스로 잘 한다고 느낄 때까지 적극적으로 하기 싫어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이런 아이를 가르쳐 보는 것이 처음이라 당황스럽다고 하셨다. 밝은 기운을 주체 못 하고 장난을 치는 게 귀엽고 신기하지만, 수업 시간 내내 피아노만 집중해서 치는 아이들에 비해 진도가 늦어지는 것을 걱정하셨다. 진도는 상관없다고 말씀드렸다. 선생님이 힘드실까 봐 걱정이 되어 장난 좀 그만 치라고, 더 예의 있게 행동하라고 아이에게 반복해서 말해야 했다.

 직장 복직 후 수업 시간 내내 감시하던 내가 사라지자, 아이의 장난은 더 심해졌다. 급기야는 수업 중간에 벌떡벌떡 일어나고, 피아노를 장난으로 두드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수업 후 교재에 낙서가 되어 있는 걸 보면 화가 났다.

 강제로 혼낸다고 하는 아이는 아니다. 선생님 역시 엄하게 하는 것보다 한없이 주는 사랑의 힘을 믿는다고 하셨다. 그렇다고 아이에게 잔소리를 멈추기는 힘들었다. '선생님도 엄마와 같은 마음이더라, 너를 믿기 때문에 화내지 않으시는 거다. 당장 그만 둘 생각이 없다면 노력해 주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영영 아이가 이대로 예의 없고 산만한 학생이 되는 게 아닐까 하는 조바심이 날 때는 결국 짜증을 내고 만다. "내가 잘 하라고 했니? 수업 태도가 기본은 돼야 할 거 아냐!" 돌이켜 생각해 보면, 결국 내 기분이 다른 일로 안 좋은 날이었다.

 가족들을 포함한 지인들은 묻는다. 그렇게까지 해서 피아노를 시켜야 하는 이유가 뭐인지. 피아노에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수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으면 관둬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악기 하나 정도는 배워야 하지 않나..' 하는 내 말을 자르고 '그런 거 고학년 되면 다 소용없어! 괜한 돈 쓰지 마.'라고 선배맘들은 말한다. 아이는 피아노 배우기를 그만두고 싶지 않다고 했다. 본인은 괜찮다는데, 내가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이유로 그만두게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초등학교 2학년 때 피아노 학원을 그만두었고 그것을 아직까지 후회한다.

 잘 못하니까 재미가 없는 거고, 재미가 없으니까 집중이 어려운 것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복습을 시키지 않아서라며 자책을 했다. 아이에게 피아노 연습을 시키기 위해, 게임 시간을 보상으로 주었다. 그 주에 배운 걸 복습하기 시작하자, 피아노 실력이 느는 게 눈에 보였다.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수업태도도 조금씩 좋아졌고, 선생님도 아이가 하기 싫어하는 바이엘은 멈추고 동요집만 세 권째 지도 중이시다.
 "동요가 재미있다니 순수하고 어린 마음이 아직 많은 것 같아서, 오늘도 새로운 동요책 하나 더 가져가요~^^"

 아이는 나의 출근 전 아침 시간과, 퇴근 후 밤 시간에만 집에 있을 수 있다. 피아노를 칠 시간이 많지 않다. 아침에 눈 뜨자마자 내복 차림으로 피아노 앞에 앉는다. 집에 와서도 바로 목욕탕으로 들어가라고 외치는 내 말에 바지를 벗고, 또는 티셔츠를 벗은 채로 피아노 앞에 앉는다. 내가 다른 일로 화를 내고 잔소리를 하는 경우에도, 듣기 싫다는 듯 피아노 앞에 앉아서 뚱땅거린다. 사실은 자주 긴장하는 아이가 저렇게 불안한 순간마다 함께할 친구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피아노를 배워본 적 없는 남편은 그저 흐뭇하게 음악 천재를 낳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쟤 지금 악보를 보는 거야? 우와! " 누구나처럼 체르니 30을 배웠지만, 현재 피아노를 전혀 칠 줄 모르는 나는 생각한다. 저 아이는 피아노에 영 소질은 없다고.

 피아노를 계속 배우게 할지 말지 고민하는 과정이 있었기 때문인지, 20년 전 내가 갖고 놀던 삐거덕거리는 디지털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이 그저 이쁘고 감사하다. 아기 때부터 자장가로 쇼미더머니 래퍼의 곡을 들어서 그런지, 클래식을 틀어주면 무섭다고 끄라고 하던 아이였다. 얼마 전에는 캐논 동요 자장가를 배웠다며 파헬벨의 캐논 변주곡을 틀어달라고 하며 말한다. "엄마, 캐논은 가을이야."

 그 많은 레슨 선생님 중 이 선생님을 선택하다니, 역시 나의 감과 인복은 여전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요즘 행복하게 하는 피아노 3중주. 피아노+아들+ 선생님이다. 피아노라는 악기는 가르쳐도 그만, 안 가르쳐도 그만이라 생각한다. 아이가 배우는 것들이 어떤 의미가 될지 지금은 알 수 없다. 아이가 커갈수록 여러 가지 울 일이 많아진다. 아이를 도와주는 방법으로 다그치는 게 옳은지, 기다리는 게 옳은지 여러 번 흔들린다. 엄마로서 최소한 가져야 할 책임감의 경계가 어디인지 고뇌의 연속이다. 하지만 사랑의 힘을 믿는다. 그 기다림으로 아이가 피아노 앞에 앉았듯, 즐겁고 안전한 자리를 하나하나 찾아가 자리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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