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의 미학
서로가 쓰다듬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것입니다. 한 움큼씩 소량으로 봄비가 올 적에도 그렇습니다. 봄비는 풀잎을 적실 정도로 옵니다. 땅이 촉촉해질 정도로 옵니다. 엷은 안개가 끼는 일도 그렇습니다. 박무薄霧는 빗으로 공중을 한 번 빗겨주는 정도입니다. 거미가 구석에 거미줄을 내는 일도 그렇습니다. 나를 걱정해 주는 당신의 목소리도 그렇습니다. 모두 알뜰히 쓰다듬는 일입니다.
쓰다듬는다는 것은 “내 마음이 좀 그렇다”는 뜻입니다. 말로 다할 수 없어 그냥 쓰다듬을 뿐입니다. 말을 해도 고작 입속말로 웅얼웅얼하는 것입니다.
『느림보 마음』문태준
며칠 동안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다 깨기를 반복하다 보니 몸이 개운하지 않았다. 새로운 곳을 탐험하는 것도,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도, 유명한 관광지를 다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힘이 들었고 기운이 없었다.
오후가 되자 나른함이 밀려왔다. 오늘은 밀린 잠을 몰아서 낮잠을 자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평소 낮잠을 즐기진 않지만,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현실을 잊고 싶을 때, 어딘가로 도망치고 싶을 때, 마치 피난처처럼 잠에 빠져들곤 했다.
오늘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불속에서 몸을 늘어뜨리고 뒤척이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푹신한 침대에 몸을 맡기고 그대로 깊은 잠에 빠졌다. 이렇게 하루를 보내는 것도 나름 색다른 기분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저녁을 굳이 챙겨 먹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잠이 이렇게 달콤할 줄이야. 평소 같았으면 오후 산책을 다녀오고 저녁 준비를 할 시간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게으름을 위한 날이었다. 머릿속이 텅 비어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를 괴롭히던 복잡한 생각들, 돌아가면 해야 할 일들, 모든 것이 희미해졌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누워 있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목적을 이룬 것 같았다.
아이가 편안하게 누워 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다. 그 소리에 잠이 깼다. 창밖을 바라보니 어스름한 어둠이 내려앉고 있었다. 꼭 어딘가를 돌아다니지 않아도, 바쁘게 움직이지 않아도 여행은 충분히 의미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이야말로 여행의 본질, ‘쉼’이 아닐까. 있는 그대로의 순간을 음미하며 나를 재충전하는 이 순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하루 종일 잠만 잔 것은 아니다. 온전히 쉰 하루를 보냈다고 하는 편이 맞겠다. 조용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내 몸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오늘 하루가 결코 낭비된 시간이 아니라고.
여행지에서 잠만 자는 것은 어쩌면 최고의 사치일지도 모른다. 우리가 일상에서 잃어버린 느림과 여유를 다시 찾을 수 있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하루를 보내고 나면, 내일은 조금 더 부지런히 움직일 수도 있고, 아니면 또다시 이렇게 게으른 하루를 보낼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나의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는 것. 그것이 여행의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서로가 쓰다듬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문장처럼, 오늘은 내가 나를 ‘잠으로’ 쓰다듬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