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산책
분노나 불만이 감정을 압도할 때 거대한 자연이나 예술을 찾아 그 안에 깃들이면 안정감을 찾을 수 있다. 아주 오래 산, 나무와 돌, 우주의 별을 바라보면 내 머리를 쓰다듬고 어깨를 토닥이는 숨결을 느낄 수 있다. 그 앞에 자신의 분노나 걱정거리 등을 내려놓으면 사소하게 만들어 날려버릴 수 있는 힘을 준다. 관점이 자신보다 더 크고 높은 것으로 이동함으로써 생각의 그릇이 넓어졌기 때문이다.
『감정 어휘』, 유선경
생각의 그릇이 넓어졌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오랫동안 제자리를 지켜준 산, 나무, 돌, 이끼, 그리고 뽀드득 눈이 밟히는 소리, 얼음이 깨지는 소리, 졸졸 흐르는 물소리, 바람 소리 속에서 마음이 한결 시원해졌다. 거대하게 뻗은 나무 위로 보이는 파란 하늘과 구름은 어제와 다르게 다가왔다. 그 안에 묻어나는 무언가가 오늘, 나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어제 비가 내린 후 기온이 많이 내려갔다. 오늘 계획하였던 ‘던다스 밸리(Dundas Valley)’를 갈 수 있을까? 바람도 많이 불고, 날씨도 추운데, 다음으로 미루자고 해야 할까? 아침부터 망설이며 고민하는 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계획대로 가자는 전화였다. "날씨가 따스해지면 땅이 녹아 걷기 불편할 거예요. 차라리 땅이 얼어 있을 때가 더 걷기 좋아요."라는 말씀에 망설임 없이 나섰다.
대신 오전에 걷고 나서 점심을 먹으려던 계획을 점심을 먼저 먹고 걷는 것으로 변경했다. 근처에 있는 베트남식당에서 따뜻한 국물이 일품인 쌀국수와 바삭한 오징어튀김을 먹었다. 아이에게 함께 걷자고 했지만, "오늘 해야 할 일이 많아 일하러 들어갈게요"라고 했고, 남은 우리는 던다스 밸리로 향했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차가 몇 대 없었다. 그 큰 숲을 독차지하는 느낌이 들었다. 눈이 녹아 아이젠이 필요 없을 줄 알았는데, 입구부터 예상치 못한 얼음길이었다. 준비해 온 아이젠을 서둘러 장착하고 걷기 시작했다. 얼음길을 밟을 때마다 철커덕철커덕 거리는 소리가 묘하게 안정감을 주었다. 그렇게 발걸음을 내디디며 숲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던다스 밸리(Dundas Valley)는 캐나다 온타리오주 해밀턴 인근에 있는 자연보호구역으로, 한 시간 반 정도 걸리는 짧은 코스부터 길게는 몇 시간 코스까지 아름다운 숲과 자연을 즐길 수 있는 다양한 하이킹 코스가 있다고 했다. 가는 길에 코스별로, 다른 색으로 표시된 이정표가 보였다. 문득 대전현충원 보훈 둘레길의 일곱 빛깔 무지개색 이정표가 떠올라 반가웠다.
오늘은 첫 방문으로 비교적 평탄한 코스를 걸었다. 여러 개의 코스 중 정확히 어떤 코스를 선택했는지 알 수는 없었고, 아마 두 개의 코스를 겹쳐 걸었던 것 같다. 걷다 보니 던다스 밸리 보호구역 내의 방문객 센터인 트레일 센터가 보였다. 이곳에서 주변 자연보호구역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했지만, 오늘은 그냥 지나쳤다. 곳곳에는 아직 눈이 쌓여 있었고, 숲길은 얼음길로 미끄러웠다. 아이젠을 착용하지 않았다면 오늘 걷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오랜만에 울창한 숲길을 걸으며 맑은 공기를 들이마시니 가슴이 탁 트이는 듯 상쾌했다. 자연의 깊은 숨결을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나뭇가지 사이로 들어오는 햇살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는 사람들, 눈길을 용감하게 가벼운 운동화를 신고 걷는 이들, 엄마와 손을 꼭 잡고 걷는 아이까지,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들과 눈을 맞추며 자연스럽게 미소를 나누었다. 이곳에서는 낯선 이와도 스스럼없이 인사를 주고받는다. 짧은 순간 스치는 미소가 정겹다. 찰나의 눈 맞춤과 미소로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기분이었다.
오늘 함께 걸으며 나눠주신 말씀이 마음에 깊이 남았다. '어물쩍하게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이제는 더 이상 주저할 시간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하셨다. 그래서 해야 할 일은 미루지 말고, 바로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는, '주저할 수 없는 나이'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흔히 나이가 들면 주저하고 머뭇거리며 안주하고 싶어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 그 이야기를 듣고, 나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익숙함이나 나이 듦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자신의 생각을 실천하는 모습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 순간, 나는 나이가 단지 지나온 시간의 흔적일 뿐,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가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망설임을 내려놓기로 마음먹었다. ‘어물어물하다가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어느 묘비명의 문구처럼, 나도 안타까운 시간만 흘려보내고 싶지 않았다. 오늘 숲길을 걸으며 크게 심호흡하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리고 문득, 한 점 흐트러짐 없이 곧게 자란 나무처럼 흔들림 없는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