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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 아빠, 30대 아들의 페로 여행 21밤 16.1

8/23 맑다 비오고 맑음

by 페로 제도 연구소
16일 차 동선
삭순(Saksun) > 트외르누빅(Tjørnuvík) > [점심] Seven > [트레킹] Skálhøvdi > [마을] Skop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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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날씨를 보니 10시부터 2시까지 맑다! 그럼 뭐다? 아껴둔 삭순(Saksun)으로 바로 출발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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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구름과 파란 하늘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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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순으로 들어가는 길은 위험하진 않지만,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대체 왜 이런 길을 1차선으로 만든 거야? 그래도 속도를 낼 수 없기에 주변 환경을 더 만끽하며 달릴 수 있다. 물론 반대쪽에서 차가 올지 항상 예의주시하며 가야 하는 것은 좀 불편하지만... 차가 물가로 굴러 떨어질까 봐 걱정이 한가득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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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순에 거의 도착해 가는데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다. 그래도 작년에는 비가 와 아무것도 못 하고 마을만 찍고 돌아갔는데, 이 정도면 양반이지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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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순의 오래된 교회(사진을 안 찍었다...)를 대충 둘러보고 트레킹을 하러 갔다. 여기 요금소 같은 게 있어서 유료 트레킹으로 전환됐는지 헷갈렸는데, 박물관에 입장하려면 돈을 내야 하고 트레킹은 무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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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 초입에 도달했는데 너무 방심한 탓이었을까? 빗발이 조금씩 굵어지기 시작했다. 삭순에는 비가 오는 게 디폴트라는 걸 잠시 망각한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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삭순의 트레킹 코스는 트외르누빅(Tjørnuvík) 마을로 이어진다(올라가서 알았다). 비가 계속 와서 그런지 트레킹 코스 초입은 이미 진흙밭으로 변해있었다. 경사도 상당히 가팔라 올라가기도 전에 미끄러져 다리가 골절될 것 같아 펜스 바로 옆 평평한 지역을 따라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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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가다 보면 첫 번째 뷰포인트인 폭포가 눈앞에 보이는데, 이곳의 백미는 눈 뒤의 풍경이다. 바다인지 호수인지 쉽사리 구분되지 않는 이 풍경이 뭐라고 사람 가슴을 뛰게 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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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보이는 삭순의 풍경. 플로 위장한 지붕 덕분인지 자연과 어울리는 형태의 디자인이란 바로 이런 게 아닐까라는 생각도 든다. 길이 진짜 질퍽질퍽하고 미끄러웠는데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양 똥이 거의 없다는 거. 이것만 없어도 트레킹의 질이 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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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때처럼 우리를 기다리는 중간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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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이나 계속 뒤를 돌아보게 만드는 삭순의 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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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오니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 이곳의 지형이 얼마나 신기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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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뒤쪽에서 다가오는 비구름은 덤. 산맥에 경계가 쳐진 저 부분에 비가 오고 있는 것이다. 트레킹 코스의 중간까지는 뷰가 좋았지만 올라갈수록 별로였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하는데 빨리 갤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아 여기서 내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래서 아빠한테 여기서 내려가는 건 어떻냐고 물어봤는데, 아빠는 길이 있으면 끝까지 가봐지~라고 대답해 차마 내려가자고 주장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계속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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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마을이 작아져 보이지 않을 정도까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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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오는 길에 두 남자를 만나 '끝까지 가려면 얼마나 가야 해?'라고 물었는데 '한 시간'이라는 대답이 돌아와 좀 좌절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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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머리가 알려주는 그날의 힘듦... 중간에 만난 스위스에서 온 노부부가 내 어깨에 있는 게 뭐냐고 물어보길래 인스타360을 간단히 설명해 줬더니, '내가 네 친구였어야 하는데'라고 하길래 나도 모르게 이메일 주소 주면 얼마나 걸릴진 모르겠다만 영상을 보내주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1년이 걸려도 상관없다고 했다. 두 사람의 행복한 순간을 남겨주고 싶어 부부의 사진도 찍어주고 메일 주소를 교환했다. 그 사람들은 내가 일본에서 왔다고 생각했고 미안하다고 했다. (한국에 돌아와 사진을 보내줬는데 답장이 없어 영상은 안 보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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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중간지점까지 한 시간은 남아 보이는데 부슬비도 계속 맞으니까 체력이 감당이 안 돼서 아빠한테 그만 돌아가자고 했는데 아빠가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어서 그럼 더 가보든가 했다. 저쪽으로 넘어가면 마을인데 그걸 몰랐나 보다. 사실 나도 몰랐다. 그래서 아빠는 끝이 있으면 상징성이 있으니까 가보려고 했는데 그냥 넘어가는 언덕이면 굳이 안 가도 될 것 같다고 해서 내려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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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자꾸 양만 보면 메에에에에 거린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이때 좀 지쳐서 짜증이 났다 아빠 미안...) 너무 젖어 체력이 방전돼 내려왔는데 나오니까 또 기가 막히게 날씨가 개기 시작한다. 잘 내려왔는데 막판에 진흙이 바짓단에 다 묻어가지고 진짜 찝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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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을 마치고 화장실에 갔는데 안에 조명이 없다 근데 문은 닫아야 한다... 그래도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면 페로의 화장실은 거의 무료이고, 관리가 잘 돼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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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에 흩날려 처참해진 와플. 박물관 입장료는 인당 3만 원이라 안 들어가고 커피 두 잔이랑 와플을 시켰다. 자리로 오려고 하는데 옆에서 누가 '정상까지 올라갔니?'라고 하길래, '아니'라고 하면서 '그건 왜 물어보지?'라고 생각했는데 아까 위에서 본 남자 둘이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어디로 가는지 물어보고, 자기들이 온 마을로 태워줄 수 있는지 물어봤다. 돌아가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아빠에게 새로운 경험을 시켜드리고 싶어 '어차피 갈 곳'이라고 둘러대면서 태워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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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걔들을 태우고 트외르누빅으로 나가는 길에 웬 트럭이 길을 막고 있길래 뭐지? 했는데 누군가 길 옆에 빠져있던 것을 구출하러 온 것 같다. 아마 트럭을 비켜주려다가 빠졌거나, 아니면... 그냥 빠졌거나. 역시 삭순은 위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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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스테르담의 두 친구를 태우고 가는 길에 여러 얘기를 나눴지만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너희 무슨 관계야?'라고 물었을 때 '우리 결혼했어'라고 대답한 것이다. 좀 놀라긴 했는데 표정관리를 하며 '오 그렇구나... 좋네.'라고 하니 '한국에선 그게 흔하니?'라고 물어봐서 '그럴 수도 있다. 근데 그 사람들이 밝히길 원하지 않아서 적어 보일 수 있다.'라고 적당히 둘러댔다.


또, 한국이 올만한 나라냐고 물어보길래, '글쎄 밤늦게까지 놀고 싶고 옛 유적과 현대의 조화, 좋은 치안과 대중교통 시스템을 경험하고 싶으면 와봐. 근데 일본이나 중국이 여행하기엔 더 낫다'라고 했다. 그리고 한국인들은 전후 모든 것이 파괴되어 전통이랄 것이 별로 없고, 경쟁만 하느라고 이웃집에 누가 사는지 관심이 없다고 했더니 그 말을 듣고는 꽤 놀라워했다.


두 사람은 페로에는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어 왔다고 한다. 그래서 '어딜 가봤냐'라고 물어봤더니 나미비아, 보츠와나, 칠레 토레스 델 파이네 등에 가봤다고 했다. 근데 아이슬란드는 안 가봤단다. 참 나 황당해서... 그래서 아이슬란드를 영업하며 '너 되게 가깝게 살잖아?'라고 했더니, '솔직히 고백하건대 난 잔세스칸스(네덜란드의 유명 관광지)도 언제든 갈 수 있으니까 안 가봤다.'라고 한다. 하긴, 나도 서울 토박이지만 왕십리가 어디에 있는지 작년에 알았으니까...


환기도 할 겸 아빠 나이를 맞혀보라고 하니 50이라고 하더라. 62인데... 후후. 역시 동양인이 동안이긴 한가 봐. '내가 안 태워줬으면 어떻게 가려고 했는데?'라고 물어보니 '원래 계획은 온 길로 되돌아가는 거였는데 오면서 너무 미끄러워서 계획을 수정했고 택시도 안 잡혔다. 아마 우리를 못 만났으면 다시 온 길로 돌아 걸어가는 수밖에 없을 거다.'라고 했다. 서양애들은 일단 지르고 보는 게 패시브인가 봐. 이윽고 목적지에 도착해 간단하게 인증샷을 남기고 각자의 길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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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전에 왔을 때와 달리 날씨가 너무 맑아 잠시 머무르기로 했다. 너무 초반에 왔었어서 그런지 아빠는 여기 온 걸 까먹은 것 같았다. 역시 비 오는 페로는 괜찮지만 안개 낀 페로는 가급적 피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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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다, 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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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를 만끽하고 나오는 길. 날씨가 맑은 걸까, 흐린 걸까? 몇 번이나 얘기하는 거지만, 페로의 진정한 매력은 흐리면서도 맑은 날씨에 있다.


글이 길어져 2부에 계속@




페로 제도가 어떤 곳인지 궁금하다면?

https://brunch.co.kr/@airspace20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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