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씨에게 희망을

by 약산진달래

어린 시절 시골집으로 걸어오는 길은 채송화 봉숭아 나팔꽃들이 예쁘게 피어있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다른 집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것이 없다. 하지만 우리 집은 아버지의 시대와 큰 오빠의 시대, 조카의 시대로 건너오며 많은 변화가 있는 집 풍경이다.

한국기행 우리는 겨울바다로 간다 촬영 당시 우리 집 풍경

엄마가 집을 떠나시고 뒷밭은 시골에서 농사를 짓기로 결심한 섬마을 농부인 조카의 창고가 되었다. 그 많던 과일나무도 모두 베어지고 여름이면 고추가 익어가고 가을이면 고구마 밭이 되었던 곳에 이제는 커다란 창고가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다. 그 앞으로 냉랭한 시멘트 바닥에는 바람에 흙먼지만 날리고 있었다.


아버지 시절 감나무가 많이 자라던 앞 밭의 감나무를 모두 베어내고 그곳에 큰 오빠는 농기계를 보관하는 파란 창고를 지었다. 그런데 섬마을 농부가 뒷밭에 새로운 창고를 세우자 이제는 쓸모가 없어졌다. 가을이면 곡식을 실어 나르는 큰 차들이 매일 집 앞을 지나 새로운 창고로 드나든다. 그러다 보니 집 앞의 파란 창고를 섬마을 농부는 철거하기로 결정했다.


어제 시골에 내려와 보니 파란 창고는 이미 사라지고 허허벌판이 되었다. 감나무 한 그루만 그곳이 원래는 단감나무가 많이 자라던 곳이었음을 알려주며 외로이 서 있었다.

바람이 오늘도 심하게 불어댄다. 바람을 막아주던 창고가 없어서인지 더 썰렁하고 바람소리가 세차게 들려왔다.

이웃집의 홀로 사시는 90세 할머니를 만나 인사를 드렸다. 오늘 고추 모종을 하셨다고 한다. 올해는 150 모를 심었다고 알려주셨다. "저희도 좀 심어야 할 텐데" 하며 남은 거 있냐고 여쭈어보니 이제 남은 것이 없다고 하신다. 벌써 가을의 결실을 기대하며 농부들은 모종을 심고 씨앗을 뿌리는 시기가 되었다.


섬마을 농부인 젊은 조카는 몇 해 전 결혼을 하고 완도에 신혼집을 차렸다. 섬과 섬을 연결하는 다리가 놓인 후 젊은 농부들은 문화를 누리는 것도, 생활의 여유를 갖는 것도 포기 하지 않는다. 섬마을 농부는 시골에서 농사를 전문으로 짓고 있지만 출퇴근하는 농부이다.


오후에 조카며느리가 증손녀를 데리고 집으로 방문했다. 백발의 증조할머니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증손녀가 인사를 하니"똑똑하게 생겼다."며 아이를 위해 칭찬 한마디를 던졌다. 집으로 오는 길 고속도로의 피로가 아직 안 풀렸는지 이내 눈을 감아 버리신다.


지난 여름 해바라기씨와 코스모스, 백일홍 씨앗을 말려 두었던 것이 생각이 났다. 작은 아이와 함께 흙모래가 날리는 마당이라고 할 수도 없는 자갈밭으로 나갔다. 새로운 생명이 피어나기를 바라며 아이의 손에는 씨앗이 들려있었다. 오랫동안 주인이 떠난 빈집 삭막해진 땅에 따뜻한 기온이 올라오기를 기원하며 씨앗을 심어보려는 마음에서다.


작은 아이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해바라기 씨앗을 떼어낸다. 호미로 메마른 흙을 파주니 그 안에 씨앗을 조심스럽게 뿌린다. 흙을 덮고 물을 주고 메마른 땅에 생명이 솟아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동요를 불러본다.


씨 씨 씨를 뿌리고

꼭꼭 물을 주었죠

하룻밤 이틀 밤

뽀로통 뽀로통 싹이 났어요

싹 싹 싹이 났어요

또또 물을 주었죠

하룻밤 이틀 밤

어 어 어 꽃이 폈어요.


작은 아이는 처음 꽃씨를 심어 보는 것이 신기하고 오랫동안 집을 떠나 돌아온 나는 어린 시절 예쁜 꽃들이 피어있었던 시골집을 회상한다.

그 옛날 포근하고 정다운 우리 집 걸어오는 길처럼 해바라기도, 코스모스,백일홍도 예쁘게 피어나 정겨운 그 시절의 풍경을 만들어 주기를 꽃씨에게 희망을 걸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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