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식장애 및 각종 정신질환과 동행하는 인간의 삶
나는 내가 가난한지 몰랐다.
내가 가난하다는 사실보다 나의 가난을 나만이 몰랐다는 사실이 나를 더 힘들게 했다. 올해 내가 가장 많이 반복했던 말은 내가 가난한지 몰랐다는 이 문장이다. 누구든 붙잡고 앉아 몇 시간이고 나의 가난함에 대해 통곡하곤 했다. 지겨울 만큼.
어쩌면 프롤로그를 쓰던 날부터 나는 무엇보다도 가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을 것이다. 14화에서 드. 디. 어. 그 이야기를 하려 한다.
불과 몇 년 전에 친한 언니와 이탈리안 뷔페에 간 적이 있었다. 언니는 첫 번째 접시를 비우고 난 뒤 다시 음식을 가지러 갈 것을 제안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비워진 첫 번째 접시를 손에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나의 모습을 언니는 놀란 듯 바라보면 왜 사용한 접시를 다시 사용하려 하느냐고 내게 화를 내다시피 했다. 나는 첫째로 내가 사용한 접시가 깨긋하니 당연히 또 사용해도 좋다고 생각했고 둘째로 이 많은 접시를 계속 닦아야 할 주방 사람들을 위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정말 순수하게 그렇게 생각했다. 언니는 놀라며 뷔페에 처음 와보냐고 물었고, 나는 손사래를 치며 웃어넘기느라 진땀을 뺐다.
대학원 재학 당시 동기들과 화장품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MAC, YSL, CLIO 등의 브랜드 명을 나 혼자만 전혀 모르고 있었다. 맥이 뭐냐고 묻는 나를 바라보던 동기들의 눈빛이 지금도 선명하다. 일부러 나를 따돌리는 게 아닌 배려의 차원에서 (말이 안 통하니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그들은 나와 뷰티에 관한 이야기를 점차 하지 않았다.
길가에 내버려 두어도 누가 주어 가지 않을 자전거를 타고 한 달가량 스페인 여행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 한국에서 해외로 자전거를 부치기 위한 패킹 비용은 3만 원이었다. 그 비용을 아끼려고 자전거 포를 찾아가 패킹하는 법을 물어보았을 때 '이런 자전거로 외국 여행을 가려하느냐?'는 대답을 들어야 했다. 나는 순진하게도 구박받으며 배워온 패킹하는 방법을 친절히 내 블로그에 기재했다. 누군가가 나와 같은 서러움을 당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장거리 자전거나 산악용 자전거는(장비까지 합한다면) 최소 백에서 몇 백. 심지어 천 단위의 자전거를 모는 게 일반적인데 말이다. (그런 자전거는 당연히 패킹 방법이 전혀 다르다.)
중요한 건, 내가 사회적 모임에 한 번 참석하기 위해 며칠의 생활비를 아껴야 한다는 따위의 문제가 아니다. 가난함에 익숙해져서 평범함과의 부조화를 감지하지 못해왔다는 게 문제다. 가난이 아닌 나의 삶이었기에. 그 정도를 나는 알지 못했다.
취업을 하고 나서야 경제적 수준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을 겨우 갖게 되었다. 나는 학교 밖 청소년들을 만날 수 있는 곳에서 일을 했었다. 센터에는 아이들이 오면 언제든 먹을 수 있도록 푸드뱅크에서 지원해주는 빵과 간식이 비치되어 있었다. 아이들은 그 음식들이 오롯이 자기들을 위한 것임을 알면서도 매번 우리들에게 묻곤 했다.
이거, 먹어도 돼요?
그건 나의 모습이었다. 음식 앞에서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일. 나를 위해 마련된 자리가 어색하고 불편한 일. 나를 향한 배려가 있을 리 없다는 무의식적 태도. 사랑받는 일이 낯선 모습. 바로 나의 모습이었다.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되었음에도 나는 아직도 어린 시절, 눈치 보던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재직 내내 아이들의 모습에서 나를 보아야 했다.
분기마다 있는 여행 프로그램에 합류되어 아이들과 함께 여행을 가곤 했다. 여행 때마다 각기 다른 그룹의 아이들과 동행하였는데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은 짐이 많지 않았다. 그 흔한 케리어 하나 보기 힘들었다. 해외여행을 가는데도 책가방 하나가 다였다. 나 역시 그랬었다. 휘황찬란한 케리어들 사이에서 책가방을 메고 수학여행을 갔었다. 등록금을 벌러 해외에 갈 때에도 나는 백팩을 메고 있었다.
여행을 가서는 어떠했는가. 숙소에서 몇몇의 아이들이 잠옷이라며 짧은 반바지를 꺼내 입었다. 달력은 11월 말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때에도 나는 몰랐었다. 지인에게 잠옷을 선물 받고 나서야, 나와 그 아이들이 잠옷에까지 돈을 쓰지 않는 사람들이란 걸 알았다.
더 속상한 것은 부모가 없는 아이들을 볼 때였다. 부모가 없는 아이들은 아무 잘못이 없어도 쉽게 주눅이 들었다. 같은 학년인데도 가족이 있는 아이들에게 이유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자신들의 권리를 빠르게 포기하곤 했다.
부모가 없는 아이들과 한 부모 가정의 아이들이 한데 섞인 여행 프로그램에 동행한 날이었다. 시설 아이들은 내게 저녁으로 고기나 푸짐한 밥을 먹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가족이 있는 아이들이 가볍게 저녁을 먹고 노래방에 가고 싶다고 하자 시설 아이들은 일제히 배가 고프지 않다고 말했다. 더 충격적인 건 그 뒤였다. 시설 아이들은 노래방 가격이 본인들이 주로 가던 학생 위주의 노래방과 판이하다는 걸 알자 노래방에 가는 것을 극구 거부하였다. 아이들은 돈을 그렇게 쓸 수 없다며 차라리 그 돈으로 먹을 걸 더 사달라고 말했다. 결국 조 별로 나뉘어 저녁 시간을 보냈다. 시설 아이들은 노래방에 가지 않고 큰 마트에서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고를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노래방을 다녀온 아이들에게도 당연히 간식비가 주어졌다. 결국 가정이 있는 아이들은 저녁과 노래방, 간식. 모든 이익을 챙겼다. 시설 아이들과 다르게 배부르다며 간식을 많이 고르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한파가 왔다. 새로이 부각된 문제는 외투였다. 시설 아이들은 잠바가 없었다. 얇은 티셔츠 위에 후드티를 입고 마의를 걸치고 돌아다니더니 한파가 오자 단추가 다 떨어진 패딩을 입고 나타났다. 그 마저도 친구 옷을 빌려 입은 거였다. 나는 어떠했던가?
19살에 같이 살던 언니는 결혼한 남자와 불륜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 남자는 식료품을 몇 박스씩 집으로 배달해주기도 하고 편히 씻을 수 있도록 목욕 쿠폰을 끊어주기도 했으며 언니에게 현찰을 주기도 했었다. 언니는 비싼 참치며 소고기를 먹을 수 있었고 엠피쓰리와 디지털카메라, 노트북 등을 받아왔다. 그리고 계절마다 옷 선물을 받아왔는데 당시 등골 브레이커로 유명한 노스페이스 브랜드의 옷을 종류별로 받아왔었다. 언니는 선심 쓰듯 같이 살던 나에게 노스페이스 잠바를 한 개 주었었다. 할렐루야였다. 겨울마다 하던 잠바 걱정을 그날로 안 할 수 있었다. 겨울이면 나는 그것을 교복처럼 입었다. 21살 겨울, 썸을 타던 남자에게 '너는 왜 등산 잠바만 입느냐'는 핀잔을 들어도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그 잠바를 나는 아직도 입는다.
어느 날 직장 동료가 케리어를 가지고 출근을 했다. 퇴근시간이 되자 동료는 안 입는 옷을 몇 가지 챙겨 왔는데 가져가라며 케리어를 내게 내밀었다. 동료가 건넨 케리어에는 상표도 뜯지 않은 옷이 한가득이었다. 나는 27살에 처음 가져봤었던 케리어를 동료는 옷과 함께 가지라며 쿨하게 넘겨주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울지 않았던 날이 없었다. 먹지 않아 몸은 피곤했고 아이들을 거울 삼아 나를 마주했던 마음은 억장같이 무거웠다. 회사에서 제공하는 티와 커피마저 눈치를 보며 먹는 나였다. 빵을 먹어도 되냐고 묻는 아이들에게 "당연하지. 너희들 먹으라고 챙겨 놓은 건데 마음껏 먹어."라고 말할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곤 했다.
거식증인 나는 음식에 욕심이 없었다. 이런 것도 모르냐는 상대의 태도가 날 초라하게 할 뿐이었다. 나이가 들어도 비비나 파운데이션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23살에 결심한 나는 비싼 화장품을 바르고 싶다는 욕심도 없었다. 그렇다고 기초제품 하나 없이 바디로션으로 얼굴부터 발까지 바르는 게 피부 관리의 전부라고 말하고 다닐 필욘 없었다. 유럽에 다녀온 경험이 있다는 정도로 끝내면 될 것을 스페인에 도착했을 때 수중에 300달러가 있었다고 굳이 밝힐 필요도 없었다. 무료배송으로 2천 원에 산 구두라고 말할 필요도, 3천 원짜리 가방이라고 말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가진 옷은 전부 친구나 주변 사람들에게 물려받은 옷이고, 지금 입고 있는 카디건은 친구가 5년을 입고 내가 물려 입은 건데도 새 거 같지 않느냐고 말할 필요도 없었다. 속 없이 재잘거리는 나를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
내 형편이 어려운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가난한 줄 몰랐었다. 이게 부끄러운 일인 줄 몰랐던 내가 미치도록 후회되어 괴로웠다. 그 서러움이 목까지, 아니 눈까지 차올라 눈물로 샘솟았다.
사람들은 쉽게 믿지조차 않는다. 이런 삶이 있다는 것을.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난에 대한 인식은 어떠할까? 얼마 전 작가 표범 씨가 SNS에 글을 기재하며 이슈가 되었던 사건이 있었다. 기초수급자 아이들이 돈가스를 사 먹는 게 불쾌하다며 센터에 항의가 들어온 사건이었다. 6천 원이 넘는 돈가스를 나눠먹는 것도 아니고, 각자 하나씩 먹고 있었다며 상황을 묘사하던 시민은 점심 먹으러 갔다가 기분만 잡쳤다고 언성을 높였다. 가난한 주제에 감. 히. 돈가스를 먹는다고 말이다.
표범 씨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에게 무료로 영어를 가르쳐왔다. 어느 날 그는 3800원짜리 틴트를 아이에게 선물했다. 뛸 듯이 기뻐하던 아이는 며칠 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학교 선생님에게 '너는 틴트 살 돈은 있나 보지?'라는 말을 들었어요. 친구들과 함께 있었는데..."
나 또한 이런 대접을 받은 기억이 왕왕 있다. 가장 근래의 일은 아이폰을 사용하는 나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였다. 사람들은 내게 정말로 이렇게 말했다. "네가 아이폰을 어떻게 써?"
아이폰은 선물 받은 휴대폰이었다. 아이폰을 건네는 지인에게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비싼걸 제가 어떻게 써요. 저는 아이폰이랑 어울리지 않아요."
어려서부터 어른들에게 틴트 사는 것조차 허락받지 못하고, 돈가스 먹는 것조차 항의받으면서 자라면 이렇게 된다. 나 같은 건 값비싼 물품을 사용할 자격이 없는 존재라고 믿게 된다. 회사에 비치된 커피를 먹으면서도 눈치를 보는 어른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 행복을 추구할 권리조차도 가난한 사람은 그 수준에 맞게 요구해야 하는 것일까? 항의 전화를 넣은 시민의 행동은 그래야 하는 게 맞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계층을 나누고 자신의 발아래 선 사람들을 우아하게 내려다보며 "내가 (세금으로) 도와주는 너희들은, 내가 언제까지고 흐뭇할 수 있도록 <내가 허락한> 행복만을 누리라"라고 말하는 것이다.
꿈을 이뤘다고 생각했다. 센터 문을 열고 들어오는 위기 청소년들을 맞이할 때 나는 꿈을 이뤘다며 기뻐했다. 너희들이 지금 얼마나 힘들지 안다고, 너희는 혼자가 아니라고, 어서 이리와 여기서 같이 따듯한 밥을 먹자고, 그래도 세상은 아직 따듯하다고 말해줄 수 있는 위치까지 온 내가 대견했다. 아이들에게 희망의 산 증인이 될 수 있는 내가 자랑스러웠다. 그리고 딱 그만큼 절망스럽고 괴로웠다.
14화에 와서야 가난이란 주제로 글을 쓰는 건 13화의 내용과 연결 짓기 위해서다. 거처할 곳이 없어 떠돌던 청소년기의 나는 주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끼니를 챙겨주던 교회 사람들, 자장면을 사주던 교생 선생님, 이용당하는 줄 알면서도 돈을 빌려줬던 사람들, 가슴에 남는 조언을 해주었던 어른들. 도움을 받기만 했던 나는 어느 날, 나와 반대편에 서서 내게 도움을 주는 저 사람들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저 사람들이 서 있는 세상으로 가고 싶다. 나도 저곳에 서고 싶다. 그 소망이 나를 지켜냈다. 그 꿈이, 그 목표가 나를 십 년을 더 살게 했고 마침내 위기 청소년들을 맞이할 수 있는 위치에 설 수 있게 만들었다.
이제 막 서른을 넘어선 나이. 앞으로 나의 새로운 꿈과 목표는 무엇일까?
몇 달 전, 술에 취한 나는 충동적으로 죽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자살을 시도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어떤 행동을 했다. 묶여있는 돈은 어쩔 수 없지만 갖고 있는 현찰이라도 정리하자 싶어 주변의 고마운 사람들에게 통장의 돈을 이체한 것이다. 그때 가장 먼저, 가장 많은 돈을 이체한 사람이 있다. 언젠가 나는 그 사람에게 소원이 있다면 무엇이냐고 물었던 적이 있었다. 그 사람은 망설임 없이 "너 자신을 제발 사랑해, 그게 소원이다."라고 말했던 사람이었다. 객관적인 눈으로 나를 볼 수 있게 만들어 준 사람이었다. (자살 충동에 휩싸였던 그날도 갑자기 이체된 돈의 정체가 뭐냐며 화를 내는 그 사람 덕에 다음날을 맞이할 수 있었다.)
이제 나는 그 사람처럼 되고 싶다. 그 사람처럼 본인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자존감이 높은 사람들의 세계에 서고 싶다. 늦은 건 아무것도 없다.
진부한 교과서적 이야기가 아니다. 이 열망은 내 삶의 새로운 목표이며 나를 움직이게 만들 동력이다. 무기력에서 벗어나게 하고 돈을 벌게 하고 그러기 위해 밥을 먹게 만들 무기이다.
우선은 지금 살고 있는 옥탑을 벗어나는 것이 중간 목표이다. 여름에는 밤에도 39도가 넘고 겨울에는 수도가 터지고 변기가 얼어 공중화장실을 전전해야 하는 곳이 아닌 더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갈 것이다. 나는 지붕에서 물이 새고 곰팡이가 만개한 곳에서 사는 게 당연한 존재가 아니니까. 나는 소중하니까. 이런 환경에 익숙해지는 것이 아닌 더 나은 삶의 질을 추구하는 사람이 될 거다. 나는 소중하니까.
적당한 일을 찾아 일하고 그러기 위해서 먹을 것이다. 내가 노력의 20대를 보내온 것처럼 나는 결국 쟁취할 것이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말 거다.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내가 나를 지켜낼 것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면 그때 비로소 당당히 아이들 앞에 설 수 있을 것이다. 다시 아이들 앞에 섰을 때 나는 누구보다 건강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안아줄 수 있을 것이다. 그때서야 당당히 아이들에게 마음껏 먹으라고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라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