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식장애 및 각종 정신질환과 동행하는 인간의 삶
한국의 10대, 20대, 30대의 사망 원인 1위는 자살이다. 40대와 50대는 자살이 2위를 차지한다. 질병이나 사고, 범죄로 사망하는 사람보다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연간 약 1만 3천 명 정도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는 하루에 40명, 30분에 한 명이 자살하는 꼴이다. 한 명의 자살자 뒤에 25명의 자살 시도자가 있다는 통계를 고려한다면 최소 32만 명이 자살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 자살 시도자가 다시 자살하는 가능성까지 더한다면 자살 위기에 처한 인원은 38배나 증가한다.
나는 앞선 글에서 20대에는 늘 자살을 바라 왔다고 밝혀왔다. 지금은 절대로 자살만큼은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죽음 자체를 꿈꾸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내가 싸우고 있는 문제들 앞에서 한 없이 나약한 나를 발견할 때,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느낄 때마다 해결방안의 하나로 죽음이 떠오르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자살을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자살 실패이다. 그보다 더 두려운 것은 반신불구가 되어 눈을 뜨는 일이다. 자살자의 70%가 자살을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기까지 한 시간이 소요됐고 25%는 4~5분이 걸렸다. 어린 나이일수록 자살과정의 시간은 짧아진다. 그만큼 충동적이고 비계획적인 자살이 그렇지 않은 자살보다 많다. 바꿔 말하면 자살하는 것이 그만큼 두렵고 어려운 일이라는 뜻이다. 치밀한 계획 끝에 죽음에 도달하는 것은 웬만한 결심으로는 힘들다.
반신불구의 실패를 맞닥뜨리지 않기 위해 독하게 자살을 준비하지만 그 본인들도 자살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여 자살 계획자들은 그런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혹은 또 다른 해결책으로 때때로 자해를 하기도 한다. 롤러코스터를 타기 전의 긴장감이 타고난 후 해방감, 후련함, 쾌감 등으로 치환되는 것처럼 자신에게 닥친 문제의 괴로움들이 (무엇보다 불안이) 자해의 통증이나 붉은 피의 자극에 경감된다. 또한 많은 이들이 내가 그래 왔던 것처럼 마음이 아픈 것보다 몸이 아픈 것이 낫다는 이유로 자해를 하기도 한다. 육체의 통증으로 정신적인 괴로움과 현실의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다.
높은 염증 수치에도 술을 마시는 일. 상처를 방치하는 일. 감기를 앓으면서도 운동을 하는 일 또한 가혹한 자해에 속한다. 밥을 먹지 않아 영양결핍에 시달리는 것 역시 자해이다. 이렇게 자신을 위태로운 상황으로 내모는 모든 행동을 Para-suicide: 준 자살 (혹은 유사 자살)이라 한다. 거식증과 폭식증, 알코올의 남용, 무분별한 성관계, 심지어 담배를 과하게 피우는 것 역시 Para-suicide에 속한다. 이는 모두 천천히 자살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신체적인 것이든 심리적인 것이든 누군가에게 당했다는 경험은 피해자의 자율성을 침식한다. 그 기간이 오래되고 강렬할수록 피해자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자신의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던 경험. 온전한 자기 세계를 침범당한 경험은 때로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공상이나 자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잃어버린 통제력을 회복하려는 무의식적 시도이다. 자살예방 전문가 육성필 교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자살 결정자들은 내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이다. 이들이 유일하게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자신의 생명이다.
자살의 실행 여부를 나에게 질문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그 하나 남은 자신의 생명 선택권마저도 남에게 주는 행위이다.
2014년도에 나는 실제로 자살을 시도한 적이 있다. 그때는 나 역시 우발적이었고 자살 실행까지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물론 평상시에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지만 구체적인 자살 계획을 세운 건 아니었다.) 어쨌든 나는 살았고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다.
꽤나 오랫동안 나를 살려낸 사람들을 원망해왔다. '그때 그렇게 죽어버렸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했던 적이 많았다. 지금은 자살에 대해서 만큼은 단호한 입장이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만큼은 해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역설적이게도 그렇기 때문에 요 몇 년간 거식증에 더 집착했을 것이다. 음식 거부는 명백히 나를 파괴하는 행위이지만 쉽게 눈에 띄지 않고 오랜 시간이 필요하며 비교적 자살로 보이지 않는 굉장히 수동적인 방법이니까. '나는 자살은 하지 않아.'라고 스스로를 속이며 눈 가리고 아웅거렸다.
나는 3.5화에서 2016년도에 쓴 낙서를 공개했다. 낙서는 먹는 것에 관한 내용으로 1번 항목이 '죽고 싶은데 왜 먹어야 하느냐.'였다. 생을 원하지 않으니 배고픔과 식욕을 느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굳이 자살이란 주제로 글을 쓰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나는 이 흑백논리에 대해 말하고 싶다.
많은 신경증 환자들이 흑백논리의 덫에 걸려들어 있다. 모 아니면 도라는 비합리적 사고는 유연한 삶을 방해한다. 완벽주의자들은 자신이 설정한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면 실패라고 생각한다. 과정은 무시하고 성공인가 실패인가의 관점에서만 세상을 본다. 이렇게 융통성이 부족한 사고는 두 극단 외의 회색지대를 인정하지 못함은 물론 그 존재 자체를 모른다. 완벽하게 할 수 없다면 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학교에 지각하느니 결석을 택하고 일등을 할 수 없으니 백지 답안을 낸다. 완벽한 필기를 할 수 없다면 누구도 알아볼 수 없는 필기를 하고 완벽히 정돈할 수 없다면 청소를 하지 않는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개 이런 행동 양상을 보인다.) 점점 수용과 사고의 폭이 좁아지게 되면서 흑백논리의 끝은 결국 부정적인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70점도 50점도 존재하는데 이분법적 사고의 세상에는 100점 아니면 0점이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100점이 아닌 것은 전부 0점과 같은 것으로 본다. 사고가 왜곡되면 감정과 행동도 왜곡되게 된다. 자살 위험군에 속하는 사람들이 상담을 받을 때 보이는 태도 중에 공통된 점이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상담 안에서 벌어지는 작은 유머에도 난색을 표하는 일이다. 그들은 죽음을 계획하는 사람이 즐겁게 웃어서는 절대로 안된다고 생각한다.
나 역시 그러했다. 죽음을 희망하는 일과 음식 섭취는 너무 큰 모순이라고 믿어왔다. 나는 그동안 이 비합리적 사고의 노예가 되어있었다. 단지 예쁘고 마르고 싶다는 생각 외에도 '죽고 싶다는 사람이 음식을 먹어도 되겠어? 먹는 건 죄야. 식욕조차 느껴선 안돼!'라는 가혹한 사고에 채찍질당해왔다.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말이다.
죽고 싶은 사람은 웃으면 안 되는가? 죽을 만큼 힘든 사람은 밥을 먹으면 안 되는가? 소중한 사람과 사별한 사람은 즐거움을 느껴선 안되는가? 장례식장에서 밥을 먹으면 안 되는가? 그렇지 않다. 세상은 흑과 백이 아니다.
본격적으로 거식증 치료를 결심하고 나서 내게 먹을 수 있는 용기를 주었던 말은 '먹어. 제발 먹어 줘.'가 아닌 '먹어도 돼. 먹어야 해.'였다. 먹는 게 나쁜 일이 아니라는 안심. 먹는 게 당연하고 필요한 일이라는 깨달음. 비합리적 사고들을 깨부수는 직언들과 순간들이 나를 살려냈다.
그렇다면 나는 죽고 싶은가? 죽을 만큼 힘든 것일까? 혹시 너무 살고 싶어서. 너무 잘 살고 싶어서 죽고 싶은 건 아닐까? 나는 삶 자체도 흑과 백으로 봐 온 것이 아닐까?
그렇다. 나는 보란 듯 잘 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으니 차라리 죽어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살을 해결책으로 생각하면 자살하려는 사람은 기분이 좋아진다. 안정감을 찾기 때문이다. 비합리적 사고에 지배당한 나에게 죽음이 해결책인 것은 충분히 설명이 되는 일이었다. 자살이라는 수단은 내게 비전이었다.
어차피 살 거라면 잘 살아야지.라는 문장에 위로받았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잘 산다는 것의 기준을 잘못 설정해왔다. 잘 산다는 게 무엇일까? 단지 사회적 성과를 이뤄내는 것일까? 어떤 삶이 잘 산다는 것일까? 어떻게 살아야 잘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것은 누가 평가하는 것일까? 단 하나의 기준으로 평가할 수 있을까?
주변의 시선과 잣대에 휘둘려온 나에게 사회에서 요구하는 연령별 발달 과업들은 매우 큰 가치였다. 성격 또한 부족함 없이 사랑받고 자란 여자로 비치고 싶었다. 여러 기준에 나를 맞추려다 보니 만족은 있을 수 없었다. 노력해도 역부족인 순간이 늘 찾아왔고 내 과거는 꼬리표가 되어 따라다녔다. 과거를 숨기면 마음에 고름이 차올랐고 받아온 상처를 발설하면 관계에서 생기는 모든 문제의 원인 제공자 취급을 받아야 했다. 가깟으로 한 단계 올라서도 아직 바닥이었고 앞으로 나아갈수록 상대적 박탈감만 거세졌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다. 노력해도 안 된다는 건 노력을 했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아무런 행동 없이 비관하고 포기한 건 아니었다. 무력감을 느껴왔지만 무기력하진 않았다. 지금 내가 멈추어있다고 해서, 넘어진 상태라고 해서 내 삶이 망가진 채 끝나는 것이 아니다. 실패자의 삶으로 정의 내려지는 것도 아니다. 나 외의 누구도 내 삶을 정의 내릴 순 없다.
나는 수많은 역경을 딛고, 상처를 안고, 그럼에도 잘 살아보겠노라고 노력해온 삶을 살아왔다. 시간을 되돌려 다시 어려질 수 있다면 타임머신을 타겠느냐는 질문에 나는 단 한 번도 YES를 외친 적이 없었다. 나는 언제나 한계에 부딪쳤고 언제나 싸워냈다. 인생의 모든 시기를 최선을 다해 살아야 했다. 과거의 고통과 인내를 다시 겪을 자신이 없어 시간을 되돌리는 일은 절대 사양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나조차 '그걸 어떻게 해냈지?' 싶은 일들을 도전하고 성취하며 살아왔다.
내가 정해 놓은 하나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해서 내 삶은 실패가 아니다. 그리고 삶은 계속된다.
다른 한편으로 내가 죽을 만큼 힘든 거라면, 내 고통의 점수는 몇 점일까? 내가 느끼는 고통의 척도에서 몇 점을 넘으면 나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롭다고 느끼는 걸까? 반대로 몇 점이 향상되면 내 삶이 좋아졌다고 느낄 수 있을까? 주관적인 고통 역시 0점과 100점, 두 개의 점수 중 하나로만 판단하지 않기 위해 고통을 척도화해 볼 수 있다. '나는 힘들어-> 그래서 죽어야 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말이다.
이런 질문도 도움이 된다. 지금 죽지 않는다면 나는 뭘 하고 싶지? 죽음과 바꿔서 하고 싶은 일.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면 하게 될 일. 죽음이란 벼랑 끝에서 생각해낸 일. 그것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 목표를 위해 아주 작은 계획부터 세워 보는 거다. 사는 목적을 만드는 일. 삶의 동기를 강화시켜 살아있음의 이유를 만드는 것이다.
<하루에 사과 하나>에서 저자는 거식증을 이겨내야만 하는 이유, 즉 '동기'가 거식증과의 싸움에서 가장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사랑하는 남자가 생기고 그의 아이를 갖고 싶다는 소망이 그녀의 동기였다. 입던 옷이 맞지 않게 되고 몸이 무거워지고 체중의 앞자리 숫자가 바뀔 때마다 그녀는 아이를 생각했다. 그녀의 삶에 새로운 가치가 생긴 거다. 새로운 가치 기준. 마른 몸을 유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가치. 그것이 그녀를 변화하게 만들었다.
사람을 평가할 수 있는 항목들은 몇 가지나 있을까? 내가 나를 정의 내리는 데 있어 체중과 체형은 어느 정도의 비중을 차지할까? 외모 외에 나를 평가할 수 있는 항목에는 무엇들이 있을까? 가족, 취미, 직업, 학업, 친구, 연인. 내게는 이런 다양한 항목들이 부재한 건 아닐까? 아니 잊고 지냈던 것은 아닐까?
조금 실수해도 괜찮다. 그것이 나의 전부는 아니니까.
지금 넘어진 상태여도 괜찮다. 삶은 계속되어 지니까.
외모가, 야박한 나의 기준에서 벗어나도 괜찮다. 나의 가치는 그것 만이 아니니까.
살이 쪄도 나는 여전히 나이다.
나는 삶의 동기를 되찾을 거다. 외모 외의 가치 있는 것들로 나와 내 주변을 채워나갈 거다.
나는 너무 잘 살고 싶어서 죽고 싶었을 만큼 삶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사람임을 잊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