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영환 Oct 20. 2023

20화. 공황장애

소설 같은 이야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가슴 근처 근육이 땅겼다. 심장이 아픈 것 같았다. 자주 이런 증상이 나타났다. 아침 6시에 일어나 바로 준비해서 출근하고, 매일 밤 11시에 집에 들어왔다. 무려 두 달 동안이나 야근은 계속 이어졌다. 부서를 옮기고 나니 일이 2배가 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부서에서 내 업무를 맡은 사람에게 인수인계해야 했으니까. 게다가 새로운 업무를 파악해야 했으니까.     


무엇보다 내 성격이 문제였다. 완벽주의에 남의 부탁을 거절 못 하는 전형적인 성실한 YES맨의 표상이었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인 시기도 나름 몫을 했다. 이제는 단순히 주어진 업무를 하는 게 아니라 기획을 맡아야 했으니까. 게다가 관리자가 주는 업무를 나누어 후배들에게 분배하고 이끌어 나가야 했으니까.     

 

군대에서 가장 일을 많이 하는 시기를 일말상초라 부른다. 일병 말봉에서 상병 초봉을 의미한다. 이제 어리버리 단계를 넘어서서 나름의 능력치가 생겼고, 중간에서 가교역할을 해야 하니까.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여자친구가 가장 많이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 때이기도 하다. 사회에서는 삼말사초가 바로 그 시기라고 보면 된다.

      

20대 후반 혹은 30대 초반에 일을 시작했을 테니 대략 10년가량 경력이 있다. 그리고 직급은 대부분 과장급으로 부장과 대리 사이에서 만능 멀티 플레이어 역할을 해야 한다. 업무적으로뿐만 아니라 사람 관계에서도 중간 역할을 해야 하니까. 능력이 좋으면 다른 부서에서도 도움을 요청하기도 한다. 관리자한테 바로 부탁하기는 어렵지만, 그만한 능력 있으면서도 조금 만만한 사람이니까. 잘못하면 동네북이 될 수도 있다. 이곳저곳에서 다 불러제끼니까.     


요즘 MZ 세대는 업무 할 때 니꺼내꺼가 분명하다고 하던데. 80년대 초반에 태어난 우리는 그럴 수가 없다. 선배들이 그렇게 해왔고, 우리도 그렇게 배워왔으니까. 하지만 아래 세대에 그대로 전달되지는 않는다. 물론 되어서도 안 되어야겠지만. 그래서 말 그대로 낀 세대가 된다. 위아래로 모두 비위를 맞춰야 하니까.      


게다가 대부분 가장으로서 경제적 부담을 가장 많이 느끼는 시기다. 아이는 태어나 계속 교육비 지출이 늘어나니까. 버는 돈은 한정적인데 나갈 돈이 많으니 어깨가 무겁다. 항상 가슴이 답답할 수밖에. 어두운 밤하늘에 달 보고 나와서 다시 달 보고 들어가는 삶이 계속되어도 참아야 한다. 나 혼자라면 당장 그만둬도 괜찮겠지만, 내 새끼를 밥이라도 굶지 않게 하려면 그래서는 안 되니까.      


가끔은 혼자서 살았다면 어땠을까 상상을 한다. 혼자 있는 시간이 가장 편하고 좋으니까. 20대에는 외로워서 빨리 결혼하고 자리 잡고 싶었다. 하지만 40대가 되니 혼자가 편하다고 느낀다. 길 가다가 연인들이 행복하게 웃으며 지나가면 속으로 생각한다. 그들이 만일 결혼한다면, 나처럼 삶의 무게를 지고 살아가야 할 테니 똑같이 한번 경험해보길 바란다.      


‘좋을 때 구만. 너희도 꼭 결혼하고, 애 낳아서 길러라.’     


     


  

실내에 있으니 답답해서 자주 밖으로 나가서 숨을 크게 쉬고 들어 왔다. 담배도 피우지 않는데, 자주 밖에 나가게 되었다. 그러지 않으면 갑자기 쓰러질 것과 같은 기분이 들었으니까. 20대 군대에 있을 때 지금과 비슷한 느낌이 들 때 쓰러져서 발작을 일으킨 적이 있었기에. 행여나 다시 그럴까 무서웠다. 주변 사람들에게 내가 바닥에 누워서 부르르 떨고 있는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으니까.      


발작 사유는 바로 과호흡이다. 심한 스트레스를 받거나 신체적인 피로감을 느낄 때 호흡이 가빠지면서 숨이 안 쉬어지는 느낌이 든다. 그러다 갑자기 쓰러져서 발작을 일으킨다. 의식은 있지만, 주변 시야가 사라지면서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패닉 상태에 빠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 자신과 마주한다. 고통스럽다. 공포 속에서 괴롭다. 온몸이 쪼그라들고 수축하기 때문이다.      


이때 옆에서 누가 주물러 주지 않으면, 안된다. 마치 가위에 눌린 것과도 같은 느낌이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지만, 숨막히는 고통이라는 게 가장 적절한 표현인 듯하다. 그리고 과호흡이라 봉투 같은 게 있으면 입을 가려야 한다. 호흡이 과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것이다. 그러면 다행히 안정 상태로 금방 돌아온다.      


과호흡의 첫 경험은 ROTC 하계 훈련에 갔을 때였다. 30도가 넘는 매우 더운 날이었지만, 교관은 지독하게 우리를 괴롭혔다. 사격하는 날이었는데, 대기하는 동안 PRI를 받았다. 정식 명칭은 잘 모르겠지만, 다른 의미로는 ‘피(P)’ 터지고, ‘알(R)’ 배기고, ‘이(I)’ 갈리는 것으로 해석한다. 휴식을 주지 않고 계속 굴리니까 피로가 쌓인 상태에서 악마처럼 웃으며 우리를 바라보는 교관의 모습에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다시 일어나서 PRI 자세를 취하려는데 신호가 왔다. 이상하게 호흡이 잘되지 않았다. “어? 어? 이상해. 숨이 안 쉬어져.” 이렇게 말하고는 그냥 그대로 쓰러져 발작을 일으켰다. 동기들이 떼 거지로 몰려와서 내 옷을 풀어헤치고, 다닥다닥 붙어서 온몸을 주물렀다. 그래도 호흡은 계속 돌아오지 않았다. 고통은 오래 이어졌다.

      

하필이면 깊은 산속에 사격하러 들어간 거라서 의무병이나 의무관이 빨리 올 수도 없었다. 다들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다. 그때 다른 조에 있던 다른 학교 동기가 와서 내 입을 막았다. 물론 그때는 누가 입을 막는지 몰랐지만, 나중에 정신 차리고 보니 모르는 동기였다. 다행히 그 동기는 과호흡이 왔을 때 대처법을 알고 있던 거였다. 주변에 봉투가 없으니 손으로라도 입을 막고 호흡을 천천히 하도록 도운 것이다. 덕분에 나는 살았다. 동기들도 나의 희생으로 더는 피 나고, 알배기고, 이를 갈지 않아도 됐다. 더는 환자가 생겨서는 안 됐을 테니까.    


 



두 번째 발작은 훈련을 다 받은 후 부대에 발령받은 직후였다. 나는 기갑 병과라서 탱크를 탔다. 먼 지역으로 훈련하러 가기 위해서는 화차에 탱크를 실었다. 코끼리 50마리 무게인 탱크를 기차에 싣고 안전하게 고정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인력이 들어갔다. 조이고 풀고를 무한으로 반복했어야 했으니까.      


원래 밤샘 근무를 서고 나면, 잠시 낮잠을 잘 수 있다. 그런데 그날은 훈련 전날이라서 쉬지 못하고 기차 레일이 죽 늘어선 다른 부대로 이동했다. 밤새고 나면 마치 뼈가 빠지는 느낌이 든다. 다 뻐근하다. 그때는 20대였는데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밤샘 근무하니까 피로가 누적됐다. 그런 상태에서 성격상 뺑끼를 부릴 수 없으니 열심히 했다. 하지만 그게 문제였다.     


거의 다 일을 마치고, 화차가 출발할 때까지 대기하며 쉬고 있었다. 그때 신호가 왔다. 호흡이 안 되는 게 느껴졌으니까. 마찬가지로 혼잣말로 “어? 어? 호흡이 안 돼. 어떻게 하지?”라고 하고선 또 쓰러져 발작을 일으켰다. 사람들이 놀라서 선배 장교는 나를 재빨리 차에 태워 바로 우리 부대로 달렸다. 정문을 향할 때쯤 운전병이 소리쳤다.     


“쇠사슬이 있어서 지날 수가 없습니다.”

“그냥 끊고 달려!!!”     


남의 부대 정문 쇠사슬을 끊어버리고 경주용 차처럼 먼지 바람을 일으키며 부대로 달렸다. 다행히도 부대까지 거리는 차로 1~2분 거리였다. 나는 차 안에서 계속 공포와 고통과 싸웠다.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시름시름 앓는 소리를 냈다. 부대에 도착했고, 의무실로 옮겨졌다. 70kg 되는 나를 여러 장정이 드니까 쉽게 들렸다.   

   

침상에 눕히고 옷을 다 벗겼다. 팬티만 남기고 다들 또 나를 주물렀다. 그때 다른 데 있던 군의관이 왔다. 내 상태를 보더니 급히 비닐로 된 봉투를 찾았다. 그리고 내 얼굴을 감쌌다.    

  

“호흡 천천히 크게 하세요. 네. 잘하고 있어요. 계속 그렇게 천천히 하셔야 해요.”     


의식은 있었기 때문에 지시대로 따랐다. 그러니 금방 호흡이 돌아왔다. 호흡이 돌아오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치 의식이 나갔다가 돌아온 것처럼. 눈을 떠보니 하필이면 군부사관도 같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왜 ‘하필이면’이라고 말하냐면, 그 사람은 여자였기 때문이다. 팬티만 달랑 걸치고 있는 모습을 그렇게 보였으니 창피할 수밖에.     


이상하게 과호흡으로 쓰러져 발작을 일으키고 난 후에는 탈수 증상이 나타났다. 그래서 수액을 맞았다. 당연히 훈련에는 따라갈 수 없었다. 아프면 열외다. (그래서 소시오패스가 그걸 노리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나는 그때 이후로 조금이라도 비슷한 느낌이 들면, 열심히 그 자리를 벗어나 호흡에 집중했다. 다시는 누군가 앞에서 쓰러지고 싶지 않았으니까.         


 



주말까지 쉬지 않고 두 달 동안의 야근으로 내 몸은 완전히 지쳐있었다. 커피를 못 마시니 매일 데자와를 마시며 카페인을 충전했다. 그리고 시간이 없으니 쉬는 시간도 없이 계속 일만 했다. 해를 보지 못하고, 건물 안에서 키보드와 전쟁을 치렀다. 그리고 집에 와서는 매일 야식 먹으며 스트레스를 풀었더니 두 달 만에 몸무게가 10kg이나 늘었다.      


결혼하고 나서 10kg 쪄서 80kg이 되었다. 그래도 그때는 1~2년 동안 몸무게가 는 거라서 건강에 이상은 없었다. 하지만 단기간에 10kg이나 느니까 건강에도 이상이 생긴 것이다. 자꾸만 내 몸이 보내는 신호에 긴장해야 했다. 호흡이 안 될 때마다 무조건 밖으로 나갔던 이유도 그래서다. 그래야 좀 진정이 되니까.      


게다가 밤에 어두운 길에 운전하고 집으로 오는 길은 지옥으로 가는 길 같았다. 비가 오지도 않았는데, 차선이 자꾸만 흐리게 보였다. 잘못하면 다른 차선으로 넘어갈 것 같고, 벽에 부딪힐 것 같아 빨리 달리지 못했다. 그러다 갑자기 호흡이 이상하다는 게 느껴지면, 중간에 안전한 곳에 세워 잠시 숨을 쉬고 출발했다. 설상가상 진퇴양난이었다.      


하루는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느끼며 그렇게 간신히 집에 도착했다. 두 달 가까이 아이들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그런지 그날따라 아이들 냄새가 그리웠다. 샤워하고 나와서 아이들이 있는 방으로 갔다. 새근새근 잠든 아이들을 보니 천사 같았다. 하지만 갑자기 눈물이 흘렀다. 왜 이러고 살아야 하나 싶었다. 토끼 같은 내 새끼 잘 키우려고 열심히 사는 건데, 이 아이들과 함께할 시간이 없으니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기 때문이다.  

   

울면서 잠시 생을 마감하면 어떨까 생각했다. 아무런 의미 없고, 쳇바퀴처럼 일만 하는 삶을 끝내고 싶었다. 하지만 천사들의 얼굴을 보니 그럴 수 없었다. 나 때문에 태어난 이 아이들은 무슨 죄냐 싶었으니까. 다시 정신 차리고 눈물을 닦고 나오느라 거의 20분 정도 아이들과 있었다. 거실로 나오니 쉬고 있던 아내가 말했다.

     

“울었어?”     


그 말에 다시 무장했던 내 정신은 해제가 되었고, 아내를 부둥켜안고 펑펑 울었다.     


“그냥 다 그만두고 싶어.”     


두 달 동안 아내와도 대화가 별로 없었다. 다만 아내는 내가 과호흡이 와서 봉투를 얼굴에 쓰고 있던 장면만 한 번 본 상태였다. 두 달이 거의 다 되어 가는 주말이었다. 아이들이 싸우는 소리에 내가 스트레스를 받고, 갑자기 신호가 왔기 때문이다. 급히 봉투를 찾아 들고 다른 방으로 도망갔다. 아내가 급히 따라왔다. 그리고 고통스러워하는 내 모습을 봤다. 하지만 나는 괜찮다고 말하며 아이들한테 가라고 했다. 아이들한테는 그 모습을 절대 보여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아내는 내가 많이 힘들다는 걸 알고는 있었고, 매우 안타까워했다. 도와줄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그런데 아내의 ‘울었어?’라는 한 마디에 나는 터져버렸던 거다. 아내가 나를 이해하고 걱정해주는 느낌이 들었으니까. 한참을 울고 난 후에 아내와 진지하게 상의했다. 직장을 그만두는 것에 대해서.     


“여보. 많이 힘들면 그만둬도 돼. 내가 있잖아. 내가 일하면 되니까. 무리하지마.”   

  

고마웠다. 그리고 미안했다. 하지만 그 말을 들으니 더 그만둘 수는 없었다. 내 삶의 무게를 아내에게 넘기는 건 싫었기에. 대신 살고는 봐야 하니 차선책을 찾아야 했다. 퇴직이 아니라 휴직은 어떨까 싶었다. 그것도 경제적으로 큰 타격이 있지만, 우선은 건강을 회복하는 게 먼저였다. 하지만 직장에서 휴직을 허락할지 그것도 미지수였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임원을 찾아가 다음 해에 휴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행히 내 이야기를 잘 들어줬다. 하지만 아직 다음 해까지는 시간이 있으니 조금 더 지켜보면 어떻겠냐고 회유했다.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 말에 나는 이미 아내와 짜놓은 각본이 있었기에 다음 단계로 넘어갔다.      


그러면 바로 병가를 내겠다고 했다. 그리고 병가를 허락하지 않으면, 바로 그만두겠다고 했다. 그러니 흠칫 놀라면서 휴직을 올려보겠다고 했다. 최종 권한은 자기가 아니니 조금 기다리라고 말하면서.      


다행히 휴직 처리는 되었다. 사실 나를 회유하려는 순간에 그동안 쌓였던 직장 부조리에 대해서 다 이야기하며 눈물을 쏟아냈다. YES맨으로 살면서 내가 겪은 수모를 다 말했다. 호의가 호구가 되는 삶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때 병원을 다섯 군데에 가서 다양한 검사를 해도 병명이 나오지 않았을 때라 건강에 관한 이야기도 했다. 이러다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말과 함께 울면서 진심을 전했다.      


다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심전도 검사, 혈액 검사, 초음파 검사, 뇌 MRI, 등 안 해본 검사가 없었다. 하지만 의사는 모두 병명을 알지 못했다. 다만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에서 답을 알 수 있었다. 혈압이 190~200이 나오는 건 혈관 문제일 수도 있지만, 스트레스도 원인이라고.      


“정신과에 한 번 가보세요. 아마 도움이 될 거예요.”     


내가 정신과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정신과는 정신병에 걸리면 가는 곳이라는 인식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경이었으니 그 말을 무시할 순 없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정신과 정보가 많았다. 그리고 이 말이 눈에 들어왔다.     


‘현대인들은 누구나 우울증이라는 마음의 감기에 걸립니다.’     


감기라는 말이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감기는 누구나 걸리니까. 겨울이면 자연스레 걸리는 질병이니까. 이제는 우울증이 감기와 같은 게 되었구나 싶었다. 용기가 생겼다. 검색해보니 집 근처에만 3~4군데나 있었다. 의외로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대인들이 마음의 감기게 자주 걸리니 수도 늘지 않았을까.     


막상 들어가 보니 분위기가 편했다. 드라마에 나오는 정신병원 같은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개인정보에 주의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름과 생년월일을 종이에 쓰게 하고는 입력 후에 바로 매직펜으로 보이지 않게 지웠다. 게다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첫 진료에는 신분증을 제출해야 한다고 했다. 심지어 복사도 했다. 아무래도 약 성분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이름이 불려 진료실에 들어갔다. 의사 선생님은 차분하게 병원을 찾은 이유를 말했다. 나는 그동안의 일을 가감 없이 말했다. 의사 선생님은 내가 말하는 속도만큼 빠른 속도로 타자 치며 기록했다. 그리고 몇 가지 검사를 하고 다시 들어오라고 해서 밖에 나와서 기계로도 하고, 질문지로도 하고 이것저것 여러 개를 검사했다.

     

다시 검사 결과를 들으러 갔다. 결과는 긴장도가 다른 사람의 3배 정도 높은 상태였다. 그리고 우울감이 있다고 했다. 끝으로 위생에 대한 강박감이 크다고 했다. 내가 평소 아이들이 더러운 거에 노출되는 것이 싫고, 위험한 상황이 싫었던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과호흡 증상은 호흡을 오히려 많이 해서 호흡이 안 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거라고 말했다. 그럴 때일수록 천천히 심호흡하고, 어깨를 펴는 동작을 하라고 했다. 몸을 이완시켜야 하니까.     


다섯 군데 병원에 가면서 이유를 알지 못해 답답했다. 차라리 죽을병이라고 아니면 고칠 수 있는 병이라고 알려주면 좋았을 텐데. 답을 알지 못하니 더 걱정되고 긴장했던 것 같다. 하지만 마음의 병이 약간 찾아왔고, 긴장도가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마음이 편해졌다. 죽을병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약을 꾸준히 먹으면 좋아질 거라고 했다. 밖에서 30분 이상 태양 빛을 받으며 산책도 하라고 했다. 세로토닌이 생성되어야 멜라토닌이 생겨서 불면증이 사라질 거라고.          





예전에 같이 일하던 친한 누나한테 전화가 왔다. 내가 휴직한다는 소식을 들은 모양이다. 이유를 물었지만, 차마 정신과에 다니고 약을 먹는다고 말하기가 그랬다. 그런데 누나가 먼저 말을 꺼넸다.     


“혹시 우울증 같은 건 아닌지 확인해봐. 우리 남편도 다 검사해도 결과가 안 나와서 걱정했는데, 알고 보니 스트레스로 인한 마음의 감기였더라고.”    

 

이미 큰일을 겪은 누나는 담담하게 나에게 상세히 알려주었다. 그리고 착하고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한 사람일수록 오히려 이런 병을 얻는다고 했다. 어디에다가 말 못 하고 혼자 끙끙 앓으면서 일을 다 처리해야 하니까. 자기 이득 다 챙기고 남에게 일을 미루거나, 정신병자 같은 사람들은 오히려 갈 일이 없다고. 마음 편하게 사니까.     


생각해보니 하루는 내가 밤새 잠을 못 잤는데, 정신병자가 되어있었다. 나를 괴롭혔던 소시오패스를 새벽 3시에 허공에 대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욕을 하며 있었으니까. 그만큼 그동안 당한 거에 대한 발악이라도 하듯 미친 행동을 했던 거였다. 그런 면에서 마음의 감기가 심해지면, 정말 미치는 건 아닐까 싶다. 더 심해지기 전에 빨리 뿌리를 뽑아야하지 않을까?     


약을 먹고 나서부터 멍하니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하루는 종일 잠만 잤다. 먹고, 자고, 먹고, 자고, 먹고, 자고를 반복하며 하루가 다 갔다. 어떤 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부정적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게 하는 효과인가 보다. 연말까지 약을 먹으며 간신히 버텼다. 나의 휴직 처리도 완료되었다. 내년부터는 정말 쉴 수 있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다. 단, 위기를 극복했을 때 하는 말이다. 넘기지 못하면 위기에 빠진 거니까. 이왕 다시 살기로 했으니 회복에 힘쓰기로 했다. 우선은 정상으로 돌아오는 게 급선무였으니까. 내 몸무게는 어느새 100kg에 육박해 있었으니까. 몸을 움직여야 했다. 세로토닌을 위해서 그리고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마지막 날 직장에서 연말 회식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참여하지 않았다. 괜히 사람 많은 곳에 있으면 또 숨이 안 쉬어질 것만 같았기에. 일하는 직장에서보다 더 회식 자리는 숨 막히는 곳이니까. 양해를 구하고 가지 않았다. 이걸 생각해보면, 의사는 따로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공황장애였던 것 같다. 연예인들이 갑작스럽게 앓는다던 그 공황장애 말이다.      


    

(엔딩곡)     

“언젠가 그가 너를. 맘 아프게 해 너 혼자 울고 있는걸 봤어. 달려가. 그에게 나 이 말 해 줬으면...”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

- 1997년 6월에 발매된 가수 김경호의 ‘Kim:Kyungho 1997’ 2집 앨범, 6번 트랙에 위치한 타이틀 곡    

 

끝.

이전 20화 19화. 소시오패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