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초원 위 설산 한 점, 리기산
한국에서 절대 볼 수 없는 풍경을 가진 알프스는, 여행 전부터 선택장애를 불러왔다. 어떤 사진을 봐도 다 경이로웠기 때문이다. 모두가 또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어 무언가 포기하기 힘들었고, 결국 최대한으로 즐기기로 했다. 구매한 스위스 패스도 더 알차게 사용할 겸.
설산을 보고 한껏 들뜬 우린 인터라켄에서 이 절경이 주는 행복감을 최대한으로 누렸다. 산 정상부터 아래쪽 마을까지, 주어진 시간 내 갈 수 있는 만큼 다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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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마지막으로 한발 떨어져서 바라볼 차례. 바로 리기산에서 말이다.
리기산은 대부분 루체른에서 간다. 페리, 기차, 케이블카를 타고. 다양한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것도 이 산 방문의 매력이다. 스위스 패스만 있다면 모두 무료. 루체른에서 갈만한 곳 중 유일하게 완전 무료혜택이 있기 때문에 더욱 인기가 많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페리 선착장으로 향했다. 이미 들어서있던 배 한 대가 출항 준비 중이었다. 주변을 둘러볼 정신도 없이 서둘러 티켓을 구매해 곧장 달려갔다.
리기산 교통 Info.
루체른에서 리기산으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비츠나우까지 페리를 타고 가서 산악열차를 타고 올라가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베기스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가는 것. 어떤 방법을 이용해도 무료고, 걸리는 시간에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갈 때는 전자, 올 때는 후자, 또는 그 반대로, 두 개의 교통수단을 탑승하는 것이 흔하다. 우리도 갈 때는 산악열차, 내려올 때는 케이블카를 타고 오기로 계획했다.
먼저, 루체른에서 비츠나우까지 배를 타고 가는 길. 호수에서 바라보는 루체른 풍경은 참 아름답다. 고풍스러우면서 아기자기한 산속 마을 같은 분위기가 난다. 명확히 표현하기 어려운 스위스 특유의 감성이 진하게 느껴진단 말이다. 호수지만 잔잔하게 일렁이는 파도와도 꽤나 잘 어울렸다.
그 위에서 맞는 바람은 또 어찌나 시원하던지. 6월 말의 무더운 여름날이 싹 잊혔다.
"아빠가 배 타지 말라했는데."
"여기서 가는 방법은 이거밖에 없어."
때는 부다페스트에서 유람선 사고가 난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모녀를 타국에 여행 보낸 아빠는 사고 날 만한 일엔 관여되지 말라며 늘 전화로 신신당부했다. 그중 하나가 배를 피할 것. 걱정 많은 엄마는 배에 타고서도 한참 아빠한테 보고하느라 바빴다. 리기산에 가기로 마음먹었으면 이 선택지뿐인데 어쩌겠나. 현 상황을 연락하면서 계속 입으로 신경 쓰고 있는 엄마가 그저 안타까웠다. 이미 올라탔으면 주어진 걸 즐겨야지!
비츠나우에서 내려 산악열차를 타고 리기산에 도착했다. 한참 창가에 달라붙어 정신없이 밖을 바라보고 있으니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금세 도착했다.
산악열차 Tip.
케이블카, 산악열차 모두 페리 도착 시간에 맞추어 시간이 편성되어 있기 때문에 장시간 대기는 걱정할 필요 없다. 어떤 색깔 열차가 올진 모른다. 리기산에 갈 때 산악열차를 탑승하는 경우, 아름다운 풍경 감상을 위해 꼭 좌측 좌석에 앉기를 바란다. 반대편도 물론 멋있지만, 조금 더 광활한 자연을 느낄 수 있다.
"오~"
솔직하게는 감흥이 떨어진 감탄사였다. 시간 들여 찾아왔으니 애써 매력을 찾고자 하는 마음에 끌어올린 그런 감탄사. 샤모니부터 며칠 째 설산에 둘러싸여 있었더니 멀리서 보는 이 풍경은 우리의 감탄을 자아내지 못했다. 푸르른 언덕을 보니 발걸음도 떨어지지 않았다. 눈길이 갔던 건 산악열차 정차구역 바로 앞의 광활한 자연이 전부였다.
우린 알프스 앞에서 매너리즘에 빠진 게다.
언뜻 보고 마음이 가지 않아도 그 자리에 서 있는 것이 가장 바보 같은 일이다. 이곳까지 들인 돈과 시간을 생각해서라도 사람들을 뒤따라 언덕 위로 올라왔다. 별로라고 판단하는 건 직접 보고 해야 맞는 것이니까.
"여기서부터 여행을 했으면 정말 좋았을 거야."
"그렇지? 샤모니가 너무 강렬했어."
알프스 중 어디가 가장 좋았냐고 묻는다면, 샤모니 몽블랑을 손에 꼽는다. 그곳이 압도하는 힘도 있었겠지만, 그간의 경험을 되짚어보면 여행 순서가 만들어낸 인상도 있을 듯하다. 뭐든지 첫인상이 오래 남으니, 살면서 만년설을 처음 접했던 샤모니를 이길 수 있는 건 없었다.
어느덧 산을 몇 차례 방문하면서 우리만의 즐기는 방식이 생겼다. 샌드위치나 요거트 먹기. 요거트를 먹기 위해서 다회용 미니 숟가락까지 들고 다닐 만큼 우린 진심이었다. 한국보다 다양한 요거트를 파는 유럽인지라 여러가지 맛을 먹는 재미가 있어서. 또, 산만큼 맛에 조미해주는 곳이 없다. 무엇을 먹어도 맛있는 최고의 식사장소.
소소한 재미를 누리고 찬찬히 길을 따라 걸으며 둘러봤다. 얼마 되지 않는 길이지만 대충 둘러보니, 반대편보단 이쪽 방향이 마음에 들더라. 몸은 반대편이 보이는 언덕 정상까지 올라갔음에도 계속 이곳만 바라봤다. 설산이 멀리 있다보니 녹빛과 함께 넓은 시야 안에 들어오는 게 더 아름다워서.
리기산 정상에서는 사실 시간을 길게 보낼 일이 없다. 그나마 낮은 산이기에 하산 길에 가벼운 하이킹을 할 순 있지만, 다수가 정상에서만 즐기다 가는 듯했다. 우린 이미 앞선 알프스에서 트래킹을 꽤나 한 상태라 이번엔 생략하고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왔다.
50명은 물론 꾹꾹 눌러 타면 100명은 탈 것 같은 꽤나 컸던 케이블카. 과연 관광 대국답다. 산에 방문하는 여행객이 워낙 많으니 케이블카의 규모도 남달랐다. 다행히 크기에 비해 탑승객은 훨씬 적어 다각도로 풍경을 감상하며 내려갈 수 있었다.
"좋긴 좋았어."
솔직하게 리기산은 스위스에서 방문한 곳 중 대화에서 가장 덜 회자되는 곳이다. 방문했을 때쯤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건후가 다녀와 집에서 우리의 소식을 들으며 방송을 보던 아빠에게 오히려 더 특별한 곳이랄까. 다른 곳에 비해 리기산을 이야기할 때면 반응이 밋밋한 게 스스로도 느껴질 정도.
연이은 트래킹과 이동에 쌓인 피로와 이어지는 익숙한 풍경에 덜해진 시각적 자극이 만나 낳은 아쉬운 결과다. 하지만 분명한 한 가지. 싫어할 수 없을 만큼 충분히 아름다운 자연이고, 충분히 멋있는 곳이라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