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공무원의 정치판 이야기
나는 일단 무려 '빅토리아 주정부 차관 보좌관'이라는 있어 보이는 직업을 가진 사람을 처음 만났어.
정치를, 페미니즘을, '위안부' 이슈를 나한테 이렇게 본질적으로 설명해 주는 사람도 처음 만났어.
누구보다 오래 고민한 문제를 말하면서도 결론짓지 못하고 본인이 틀렸을 가능성을 계속 염두에 두는 사람도 처음이었어. 대부분은 아주 조금 아는 것도 크게 말하고 싶어 하는데 누구보다 깊게 알고 있으면서도 그조차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 그게 안나였어.
타국의 정치판에서 잔뼈 굵은, 30대 커리어 우먼의 똑부러진 말 중간중간 까르르 - 분수의 물방울처럼 알알이 터지는 웃음. 가벼움과 무거움의 적절한 조화.
인터뷰를 시작하면서 안나가 말했어.
앨리스, 나는 너 같은 사람이 진짜 부러워. 좀 맹~한 거 같은데도 머리도 잘 돌아가고 말도 재미있게 잘하고. 참 사람 색깔이 다양한 거 같아. 앨리스 너는 완전히 진짜로 이상한 나라에서 온 앨리스 같아.
ALICE IN WONDERLAND! 그 이름이 딱 맞아.
그 말을 듣는데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더라. 누가 할 소리?! 나는 정말로 네가 원더랜드에서 온 애 같은데?
네가 사는 세상 이야기가 나한테는 더 이상한 나라 이야기 같다고.
정말로 모자장수랑 토끼가 나오고 버섯이 나오고 체셔 고양이가 물담배를 피우는 나라에 뚝 떨어진다고 해도 안나가 이야기 해준 세상보다는 덜 신기할 거 같다는 생각을 했지.
만 겨우 말할 줄 알던 12살짜리 한 수줍은 한국 여자아이가 뉴질랜드라는 낯선 나라에 떨어져서 우왕좌왕 어린 시절을 보내고 세계 평화를 위해 설립된 단체의 도움으로 미국 교환학생을 하며 정치와 인권에 눈을 뜨게 되고 호주로 정치학을 공부하러 왔다가 페미니즘에 눈을 뜨고 그 힘으로 위안부 인권 운동으로 20대의 반을 격렬하게 보내고 나서는 호주의 공무원이 되어서 영국 총독부에서, 빅토리아 주 다문화 부서에서, 차관 사무실에서 활약하면서 생겨난 그 많은 컬러풀한 에피소드와 그 안에서 그녀가 느끼고 배운 것들. 그녀의 눈으로 본 세상.
한마디로, 진짜로.
REALLY, REALLY, FASCINATING!
이런 이야기들을 내가 직접 듣고 엮어서 한국의 청년들, 특히 20대의 여자 후배들에게 전달해 줄 수 있는 것은 특권이고 내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건 정말 잘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어.
그녀의 이야기가 대단한 것은 그녀가 소위 말하는 고스펙의 잘난 사람이라서가 아니야. 호주 정치판에서 날고 기는 커리어 우먼이라서, 스펙이 어마어마한 높은 사람이라서 그녀의 이야기가 좋은 게 아니야.
다문화, 정치, 페미니즘, 호주의 정치, 공무원 사회, 여성과 아시안의 유리천장, 한국과 이민자와의 애증관계... 이 어려운 주제들을 어떻게 이렇게 균형 있고 통찰력 있게 - 그러면서도 유머러스하게 -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게 나는 놀라웠어. 녹음 파일을 계속 들으며 감탄했을 정도야.
한국, 뉴질랜드, 미국, 호주 다양한 환경 속에서 그녀에게 덧입혀진 색깔들이 서로 상충하지 않고 균형과 조화를 이뤘다는 게 느껴졌어. 마구잡이로 어린 네 머리 위로 쏟아부어진 문화들이 버거웠을 텐데도 잘 버티고 그 무게를 견뎌줬구나, 그래서 이렇게 멋있게 자라주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
머리에 스쳐 지나가는 얼굴들이 있었어.
방향성을 영 종잡을 수없는 20대라는 캄캄한 터널을 지나며 가치의 충돌과 방향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후배들, 동생들. 누구보다 똑똑하고 특별한 그 아이들이 꼭 그 터널을 이겨내고 안나같이 중심이 잡히고 본질적인 고민을 할 줄 아는 30대로 성장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안 할 수가 없더라.
좀 웃기지 않나 싶지만 이건 내가 아니고 안나의 이야기니까 마음껏 자랑스러워 할게.
나의 새로운 친구 - 이 우주 위 하나의 작은 존재로 사는 내가 복잡한 세상의 이치에 혼란스럽고 균형을 잃을 때 찾아갈만한 그런 친구, 안나의 글을 자랑스럽게 소개해.
문화차이로 인해 논란이 되는 부분이나, 보면서 불편할 수 있는 부분도 있는 것 같지만 최대한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어. 너무 길어서 좀 줄이려고 했는데 줄일 부분이 없더라구.
재미있게 읽어줬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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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 안녕 안나! 아침잠 많은 내가 이렇게 주말 아침에 나와서 좋은 사람이랑 커피 먹고 하니까 신이 나. 인터뷰 기쁘게 응해줘서 고마워. 우리 먼저 소개부터 시작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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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 안녕 내 이름은 안나라고 해. 앨리스랑 동갑인 83년생 여자이고 나는 원래는 뉴질랜드 이민자인데 15년 전에 대학 진학을 호주 멜버른으로 해서 그 후 호주에서 쭉 일하면서 살고 있어. 뉴질랜드 시민들은 호주에서 자유롭게 일하고 살 수가 있거든. 올해 호주 영주권이 나와서 호주에도 '공식 이민'을 한 셈이 되었네. 나는 올해로 25년 차 이민자이고 호주 주정부 소속 차관 사무실에서 보좌관으로 근무하고 있는 5년 차 공무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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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 한국계 이민자 중에서 정부에서 일하는 공무원분들이 계시는 건 알고 있었어. 시청에서 일하는 분들은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몇 번 만나적이 있지만 차관 사무실이라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은 내 평생 호주는 물론, 한국에서도 만나본 적이 없거든. 어떻게 그 일을 시작하게 됐는지 그 계기부터 시작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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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 먼저 나는 멜버른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했어.
학교를 다니면서는 인권운동, 학생운동에 완전히 빠져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나는 '위안부' 인권운동을 활발히 했거든. 국제기관에 어필을 하고 호주 정부에 입장을 표명하고 하는 과정에서 힘의 움직임, 내가 낼 수 있는 목소리의 힘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 개인이 모여서 소리를 지르는 것과 한 정부가 대신 목소리를 내주는 것이 얼마나 다른지 뼈저리게 느낀 거지.
그때의 나는 젠더나 인종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할 때였는데 '힘없고 작은 동양 여자'로 이 세상을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굉장히 컸어. 그런 취급을 받지 않고 내가 당당히 살고 진정으로 누군가를 돕고 싶다면 힘이 흘러가는 이치를 공부하고 내가 그 힘을 올바르게 쓰는 방법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한 거지. 이 바닥만큼 이 파워라는 게 흘러가는 게임을 배우기 좋은 곳이 없더라고. 그렇게 정치를 배우고 정부의 행정 일을 시작하게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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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 나는 한국에서의 공무원 시스템에 대해서는 좀 알지만 호주에서는 완전히 백지상태거든. 그래서 궁금한 게 아주 많아. 먼저 한국은 공무원이 가장 직급이 낮은 9급부터 8,7 급으로 올라가는데 호주는 어떤 시스템으로 공무원이 나뉘는 거야? 너는 어떠한 위치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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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 호주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아주 넓은 분야에서 다양하게 공공서비스를 하는 공무원들이 일을 하고 있어. 그래서 공무원들이 어떻게 무슨 일을 한다고 딱히 정의해서 말할 수 없는 것은 한국과 똑같아. 다른 점은 호주는 한국과 반대로 1급이 가장 낮아. 1급부터 6급까지 공무원들이 있고 그 위로 다시 이그제크티브 레벨로 1부터 3급이 있어. 나는 지금 5급에서 6급으로의 진급을 앞두고 있는 상태야. 호주는 주정부와 연방정부가 분리되어 있는데 나는 주정부 소속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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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 한국은 공무원은 안정적인 직장 1위라는 인식이 있어. 공무원, 이라고 하면 안정적이다라는 게 첫 번째 이미지일 거야. 연봉은 일반 회사보다 적지만 '철밥통'이고 나중에 연금이 나와서 노후보장이 된다는 게 가장 큰 장점으로 꼽혀서 인기가 많은 거지. 오래 버틸수록 호봉 수가 올라가면서 받는 돈도 많아지고 진급도 되고. 호주는 어때, 비슷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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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 응, 한국 공무원들 그런 이야기 들을 때마다 완전 부러워. 호주는 그런 거 없어. 연차 올라간다는 개념, 무슨 호봉? 이런 게 어딨어. 오래 버텼다고 자동으로 진급이 되거나 평생 보장되는 직장이라거나 그런 개념 진짜 제로. 자기가 잘해야 진급되고 돈 올려 받고 안 잘리는 거지! 퇴직 후 연금이 없는 건 아닌데 호주 내 다른 정규직이랑 똑같아. 공무원이라고 특별한 연금이 있거나 노후보장받는 거 없어.
그리고 말이 정규직이지 정권 바뀌어서 부서 정리하면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고 정치판이 그렇듯 변동도 많고 부서 재배치가 진짜 많거든. 버티기가 쉽지가 않지. 요새는 3년 5년짜리 계약직들도 많아. 물론 개인적으로는 지금 감사한 정규직이지만 철밥통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 살아남으려고 고군분투해야지. 다른 직장들과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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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 한국은 공시, 행시라고 불리는 공무원 시험, 행정고시 등을 치고 공무원이 되는 시스템이야. 면접이 있기는 하지만 비중이 높지 않고 시험으로 경쟁률을 뚫수 있는가 없는가가 관건이거든. 가장 골자는 이 시험을 봐야 한다는 거지. 호주에서는 어떤 절차를 밟아서 공무원이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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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 호주는 어떤 획일화된 국가고시로 공무원을 뽑지는 않아. 방법은 여러 가지 있지. 한국보다는 일반 회사의 채용 시스템이랑 더 비슷한 거 같아. 대표적인 방법들을 이야기 볼게.
첫 번째는 대학원이나 대학교를 졸업하고 4단계의 채용절차 (온라인 지원 - 서류 - 면접과 그룹 활동 - 최종면접)를 거쳐서 정규직이 되는 방법. Graduate Program이라 하는데 첫 1년을 연수처럼 많은 부서일을 배울 수 있게 3개의 부서로 로테이션시켜줘. 2번째는 에이전시를 거쳐서 짧게 계약직으로 일하면서 정규직을 노려보는 방법이 있고, 또 다른 방법으로는 정부 협력업체에서 일하면서 관련된 경력을 쌓은 후 일자리를 옮기는 방법이 있어.
나는 첫 번째 방법을 거쳐서 공무원이 됐는데 그 해에 빅토리아 주정부 Graduate Program에서 93명을 채용했거든. 매해 평균 한 1000명씩 지원하는 것 같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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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 한국은 공무원 경쟁률이 지금 100대가 넘어가고 직종에 따라 틀리지만 진짜 바늘구멍에 낙타 집어넣기라고 하거든. 고등학생들 장래희망 중에 공무원이 1위고 고등학교 중에 공무원을 키우기 위한 공무원 준비반 이런 거도 특성화 고등학교도 생기고 그래. 그런 거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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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 와, 처음 들어. 공무원을 키우는 고등학교라니 무언가 충격적이다. 공무원 일이라는 게 사실 이론으로 배울 수 있는 것도 있지만 없는 것도 엄청 많을 정도로 다양하고 복잡한 거거든. 그리고 공무원 안에서 하는 일이 엄청 다양해서 막상 대학을 졸업하고 경험을 쌓은 후에 들어와도 이 일이 나한테 맞는지 아닌지 아니면 이 안에서도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거든. 나는 개인적으로 좋은 공무원이 될 자질들이나 현장에서 필요한 요소들을 책상에서 가르칠 수가 있는지 의문이야. 예를 들면 인내심, 상사 비위 잘 맞추기, 인맥 관리 잘하기, 그리고 개인적으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통찰력 있는 판단력 기르기인데 - 이걸 고등학교 교실에서 어떻게 가르친다는 거지? 가르칠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리고 정말 하고 싶은 일이나 살고 싶은 삶이 뭔지 진지하게 고민하고 나야 행복한 직장인, 어른이 되는 건데, 고등학생 때 나의 평생직장을 이미 정하는 건 조금 위험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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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 나는 인권문제나 소수자 문제에 관심은 많았어도 정치에 관심이 있지는 않았거든. 그 두 가지가 연결되어 있지 않은 별개의 문제로 느껴졌다고 해야 하나. 그나마도 고등학교 대학교 때는 사회문제는 내 알바 아니고 연애하고 친구들이랑 술 먹고 노느라 정신없었지. 어렴풋이 나라꼴이 엉망이고 인권문제가 엉망이고 편견이 뿌리 깊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나 같은 작은 존재가 정치적으로 어떤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어. 너는 대학 입학 전부터 정치에 관심이 있다고 했잖아. 어떻게 그 어린 나이부터 정치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거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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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 정치와 인권 문제, 정부의 역할 등에 대한 눈을 뜨게 된 건 만 16살, 고2 때였어. 그때 내가 좋은 기회로 AFS라는 기관을 통해 12개월 동안이나 미국 교환 학생으로 갔거든. 이 기관의 정신이라고 해야 하나 성격을 먼저 설명을 할게. AFS는 American Field Service - 세계 1/2차 중 자원봉사로 전쟁터에서 앰뷸런스 운전하던 미국 아저씨들이 1946년에 미국-독일 교환학생 프로그램을 했던 게 시초였어. 전쟁을 겪은 세대들이 다음 세대들이 본인들처럼 적군이라는 이름으로 만나지 않고 친구라는 이름으로 만난다면 전쟁은 일어날 수 없다는 믿음으로 설립을 한 거야. 이런 믿음에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자원봉사자로 참여해. 생판 모르는 먼 나라의 학생들에게 집을 무료로 내어주고 보살펴주면서 세계 평화의 정신을 계승하는 거야. 나의 미국 호스트 가족도 먼 뉴질랜드에서 온 동양인인 나를 가슴으로 친구로 품어주었어. 사실 그때 정말 환율이 똥값이었거든. 뉴질랜드 1달러에 38센트인가 그랬다니까! 학비는 교환학생 제도로 해결이 되었고 체류비가 많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정말 어린 나이에 내 세상을 통째로 흔들어 깨우는 다양한 경험을 많이 할 수 있었어.
특히 그 때 만난 Sally Ann 이라는 아주머니가 내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고 해도 과장이 아니지. Sally Ann 아주머니는 틈이 날 때마다 나를 이곳저곳 데리고 다녔어. 전설적인 인권운동가 였던 마틴루터킹 주니어 기념 행사 (미국 흑인 케뮤니티가 주도한)도 가고, 홀로코스트 생존자 강연장이나 미국 원주민 리더들과 만찬 또 한국계 미국 정치인 연설 현장 등등을 데리고 다니시면서 나한테 입버릇처럼 하신 말씀이 있거든.
나는 세계 평화가 가능하다고 믿는단다. 너희 세대들은 이룰 수 있어.
인종과 나라를 넘어선 우정을 통해서.
나는 그렇게 아주 자연스럽게 인권과 평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대학교 때 진로를 정할 때 정치학을 고르게 되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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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걸로 알고 있어. 대표적으로 '위안부' 이슈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활동을 많이 했는데 어떤 활동들을 했니? 어떤 생각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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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 대학생활 내내 내가 페미니즘 공부에 빠져 살았거든.
진정한 페미니즘이 뭔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는 시기였어. 그때 페미니스트는 공부로 만 하는 게 아니라 활동 (activism)을 해야 한다 배웠거든. 내가 쓸모가 될 수 있는 곳이 있을까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찾고 있었어. 그러다가 국제 앰네스티가 '위안부' 이슈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을 시작했어. 국제 앰네스티의 멤버로 시작해서 시드니에 있는 박은덕 변호사님과 함께 '호주 친구 모임'을 시작했고 멜버른 지부에 내가 도울 수 있다고 강력하게 어필을 해서 이 이슈를 국제 사회에 알릴 수 있도록 2주 순례 강연 캠페인을 추진한 거야. 고 장점돌 할머니의 강연에 함께 하며 통역해드리는 걸로 시작해서 호주에 사시는 피해자 할머니 얀 러피 오헨 할머니 모시고 2007년 워싱턴 DC에서 열린 미국 국회 청문회 갔고 이용수 할머니 고 김군자 할머니 통역해 드리는 일을 했어.
호주 친구들과 호주 국회에 결의안 통과를 위해 캠페인 했고. 덕분에 얀 할머니, 길원옥 할머니, 정대협 식구들이 고생 무척 하셨는데 나중엔 호주 상원이 일본 정부를 지지하는 결의안이 통과가 돼버린거야. 너무 죄송하고 면목이 없었어. 10년이 지난 지금도 난 그 괴로움이 남아있어. 피해자 할머니들께서 증언하시면 그날 밤 보통 악몽 꾸셔. 당한 게 기억이 다시 나시니까. 철없는 20대를 믿어주시고 힘든 걸 참아가며 순례 강연과 캠페인을 해주셨는데 기대보다 성공적이지 못해서 아직도 참 죄송해.
변화는 한 번에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믿었기 때문에 좌절하지 않고 그 후로도 수요집회에 참석하고 콘퍼런스에 참여하고 그랬어. 처음 시작할 때에는 그렇게 오래 하게 될 줄 몰랐는데 5년을 넘게 그 일에 매달렸었어.
처음 위안부 할머니들의 증언, Testimony 자료를 읽고 나서 그냥 한 3일 동안을 내리 끙끙 아팠어. 계속 들었던 생각은 단 하나, 이 피해자 여성들과 내가 다른 점은 그저 다른 시대에 태어났다는 점 하나라는 것.
내게 주어진 자유의 힘으로 내가 받은 교육, 알게 된 지식, 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무언가라도 해야겠다 싶었지. 아니, 더 솔직히 표현한다면 그냥 그때는 뭔가를 안 할 수가 없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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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 10살 때 너는 이민을 간 거잖아. 어땠니? 그때는 어떻게 기억으로 남아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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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 이민을 간 건 만 10살 때였어. 초등학교 5학년 때 뉴질랜드의 프라이머리 스쿨로 바로 들어간 거야. 내가 그때 아는 단어가 TOP, SUN. 써먹을 일도 없는 팽이와 해. 달랑 두 단어만 아는 채로 교실에 투입이 된 거지. 완전 벙어리처럼 육 개월을 지냈어.
뉴질랜드 초등학교에는 스토리 타임이라는 게 있거든. 한국 유치원처럼 카펫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선생님이 동화 같은 거 이야기해주는 걸 듣는 거야. 내가 키가 큰 편이라 뒤에 앉았거든. 영어를 못 알아듣는데 스토리가 뭐야. 그냥 멀뚱허니 앞에 얘들 뒤통수만 보고 있는 거지. 그런데 하나도 안 지루했던 게 이 뒤통수 하나하나 마다 색깔이 다 틀려. 이게 난 너무 신기한 거야. 창밖에서 빛이 들어오고 하면 빨간 머리, 갈색머리, 금발도 또 여러 색이 되면서 얼마나 예쁜지 몰라. 반 친구들이 다 착하고 순진해서 금방 적응했어. 선생님이 안나는 영어를 못하니까 도와줘야 한다고 하니까 다들 열심히 도와주곤 했었지. 착한 반 친구들이 맨날 나 도와준다고 다가오고 하면 애들 눈 색깔 관찰하고 그랬어. 어쩜 이렇게 다 다를까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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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 자연스럽게 그런 경험을 하는 것이 밑바탕이 되면서 다양성에 대해 더 열린 사고를 가지게 되는 걸까? 나는 고등학교 다닐 때 반에 머리가 자연갈색인 얘가 있었는데 학생부에서 이거 진짜 자연색이냐며 매일 불러서 괴롭히고 너의 갈색머리를 용인(?)해주면 다른 얘들도 다 봐줘야 한다고 집요하게 뭐라고 해서 결국에는 검은색으로 염색했거든. 갑자기 그 생각이 나네. 어린 마음에 엄청 신기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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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 응, 뭐 온통 문화충격이었지. 뉴질랜드에서는 아이들은 운동하는 게 직업인 거 같아. 나는 진짜 내성적인 성격이라 나가서 뛰어노는 걸 싫어했어. 맨날 집에서 과자 까먹으면서 책만 읽고 그랬는데 뉴질랜드 와서 보니 애들이 다 맨발 벗고 하루 종일 뛰어다니는 거야.
크로스컨트리라고 마라톤 같은 행사가 매년 있어. 첫 참가하는 해였는데 운동회 같은 거라고 해서 나는 한국에서 하던 대로 하얀 양말에 하얀 운동화 예쁘게 준비해서 갔지. 그런데 비가 많이 오는 계절이라서 땅이 다 젖고 진흙밭이었거든. 운동화는 오히려 미끄러지고 발목이 삘 수 있다고 운동화 착용을 금지시키는 거야. 난 말도 잘 못 알아들을 때였는데 선생님은 내 신발을 벗기려고 하고 나는 잔뜩 놀라서 버티고. 암튼 그러다가 결국에는 뺏기고 맨발로 애들 따라서 뛰게 되었거든. 그때 맨발이 차가운 진흙에 닿는 그 느낌, 그 묘하게 해방감을 느끼던 그 기분을 나는 아직도 기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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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 진짜 재밌다. 나는 성인이 다돼서 호주에 와서 그렇게 세상이 막 뒤엎일 정도로 문화충격을 겪고 성격이 변하고 하는 일은 없었거든. 너의 이야기로 어릴 때 이민 온 1.5 세들이 어떤 혼란을 겪는지 조금은 더 잘 이해하게 된 거 같아. 우리 그럼 이제 다시 정치로 돌아와 볼까, 내가 사실 한국에서 미국 문화, 국제 외교를 공부하고 있는 대학생 다슬이에게 너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이 친구 입장에서 너한테 궁금한 게 없냐고 물었거든.
한국에서 후배에게 날아온 따끈따끈한 질문 두 가지부터 시작해보자.
정치라는 게 물론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이 지금 당장 살아가는 데 영향을 끼쳐서 중요하기도 하지만, 일단 어느 정도 소속감이 필요하잖아요. 내가 이 사회의 구성원이고, 주인이니까 중요한. 근데 이민자로서 이런 소속감을 처음부터 느끼기 힘들어서 아예 호주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아요. 호주 정치에 무심한 다른 이민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지 궁금해요
BY 다슬 (서강대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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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 우리가 사실 더럽다 어렵다 귀찮다는 이유로 정치판을 외면하잖아. 그런데 사실 정치는 삶의 아주 중요한 부분인 거야. 개인이나 단체가 의견, 요청, 요구, 항의 등 의사를 표현하고 싶고, 내가 속한 사회의 어떠한 방향을 결정하는데 내 의견을 내고 싶고 하는 자체가 정치거든. 내 삶과 떨어트릴 수가 없는 요소인 거야.
내가 평소에 신기하다고 느끼는 거 중에 하나는 나처럼 이 곳에서 산지 20년이 넘은 한국 어른분들을 만나면 여기 주 총리가 누군지 이 나라에 어떤 정당이 있는지도 모르는 분들이 정말 많아. 이분들이 정치에 관심이 없느냐? 그것도 아닌 게 한국에서는 지금 어디 정당에 누가 무슨 일을 하고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꿰뚫고 있고 의견도 엄청 내거든. 이 분들한테는 정치가 어떤 이념 같은 거지. 내 삶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실존적인 것이 아니고.
내가 차관 사무실에서 보좌관으로 있잖아. 나 같은 사람들이 하는 일 중에 꽤 큰 한 부분은 시민들로부터 온 편지를 읽어보고 회의를 하고 그것에 답해주는 일이야. 장관 사무실로 편지가 오면 나 같은 공무원이 읽고 이런 이슈가 있구나, 이런 문제점이 있구나 파악을 하고 그것이 논의가 되거든. 왜 무언가 제안이나 항의나 호소를 하고 싶으면 국회의원한테 장관한테 편지 쓰라 그러잖아. 그게 진짜야. 정말 편지를 쓰면 영향을 미칠 수 있어.
(앨리스 : 정말? 나 같은 사람이 편지를 써도 그걸 누가 받아서 본다고?)
응! 너 같은 사람이 장관에게 편지를 쓰면 나 같은 공무원이 읽고 서류 작업받는 거지! 진짜로 논의가 되고 내 상사인 차관과 절차를 거쳐 결론을 도출해서 공무원은 답장을 장관 사무실에 결제받으러 올리는 거야. 그냥 다 복붙 해서 같은 내용으로 읽은 척하고 답변을 하는 게 아니고.
특히 올해처럼 선거가 있는 해는 소수민족 커뮤니티가 뭐를 원한다고 장관들한테 이야기를 하면 정치인들은 그 커뮤니티의 환심을 사야 하니까 더 적극적으로 민심이 흐르는 곳을 찾으려 노력하지. 그런 찬스가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많아. 예를 들자면 내가 '위안부' 활동 같이 했던 박은덕 변호사님이 어필을 강력하게 하셨거든. 그래서 결국에는 그 당시 수상이었던 존 하워드까지 만나서 위안부 문제를 각인시킬 수 있었어.
어떤 커뮤니티나 개인이 무언가를 변화시키고 싶다면 원하는 걸 제대로 표현해서 기회를 잡아야만 해. 자꾸 목소리를 내고 세상 돌아가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해. 어떤 법이 준비되는 과정에서 참여할 기회가 있었는데 우리가 외면해버리면 그게 우리한테 불리하게 결정이 나도 할 말이 없거든. 예를 들면 메디케어 레비 (의료보험비)가 엄청 올라가거나 동성결혼에 대한 법안이 통과되거나 통과되지 않거나 하는 일들은 우리 삶과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있어.
하나 또 예를 들자면 매년 3월 21은 유엔이 정한 인종차별 철폐의 날 (International Day for the Elimination of Racial Discrimination)이거든. 그 날이 돌아올 때마다 연방정부랑 주정부는 늘 무언가 그 날의 취지에 맞는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해. 호주도 가만히 멈춰있지 않고 인류의 평화와 인간의 존엄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걸 대외적으로 보여줘야 하잖아. 그래서 아주 활발하게 토론을 하고 이슈들을 찾는단 말이야. 그럴 때마다 우리에게는 발언할 기회가 생기는 거야. 우리는 이 나라에서 소수민족이니까.
그 날은 법적으로 무엇이 인종차별이고 아닌지를 정하는 날이기도 하거든. 그런 토론중에 줄곧 나오는 이슈는 호주사회는 법적으로 무엇이 인종차별이고 아닌지를 결정 할것인가 이거야. 보수정권은 특성상 그 판단의 경계선을 자꾸 까다롭게 높이려 해. 개인 표현의 자유를 위협하는 사회는 호주 스럽지 않다 등등이란 이유로. 인종차별적인 발언도 그건 개인의 표현의 자유라고 밀어붙이려고 하는데 그걸 가만히 두고 본다는 것은 우리들한테 굉장히 위험한 걸 수도 있는 거거든. 진짜 우리 소수의 누군가가 실제로 그 법안 때문에 차별을 받고도 인정을 못 받는 일이 생길 수가 있는 거야.
나는 국회의원들 사무실에서 직접적으로 일하지는 않지만 전에 총독 보좌관으로 일했을 때 행사에서 자주 만났거든. 20년 동안 연임한 캄보디아계 국회의원이 한분 계셔. 그분이 어느 날은 나한테 진지하게 물어보시는 거야. 코리안 커뮤니티를 이야기하면서
라고 하더라. 이 사람이 오래 정치판에 있었고 또 같은 아시아계로서 우리 목소리를 대변하는 위치에 있고 하니까 다른 나라 커뮤니티는 엄청 찾아가고 귀찮게 하는데 한국인들은 VERY QUIET 하다고 하는데 무언가 굉장히 안타까웠어. 한인 커뮤니티가 스스로 기회를 계속 놓치고 있는 거 같아서.
모든 삶이 한 치 앞을 못 본다고는 하지만 이민자가 되면 이민자가 되기 전에는 상상도 못 할 경험들을 많이 하는 거 같아. 내가 이민을 하기 전에는 내가 뭐지? 무슨 인종이고 어떤 종류지?를 끊임없이 생각할 필요가 없어. 개인적인 정체성이 흔들리고 내가 사회생활을 할 때 내가 무엇이고 어떤 위치이며 이런 걸 계속 생각하는 거야. 알게 모르게 하루에도 몇 번씩 너는 어디서 왔냐는 질문을 듣고 언어도 하나를 쓰다가 두 개를 쓰면서 사람 성격이 변하고 다시는 하나로 쓰는 사람으로 돌아갈 수가 없잖아. 하나의 언어로는 나를 다 표현할 수 없는 사람이 된 거지. 두 문화와 두 언어로만 내가 내 색깔을 제대로 표현을 할 수 있어.
이민자가 되면서 정치도 그런 거 같아. 나의 색깔대로 내가 당연한 혜택이나 자유를 누리면서 인간적인 삶을 살자면 내가 꼭 정치인이 되서가 아니라 그래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해서는 알아야 하지 않나 싶은 거지. 1992년에 엘에이 코리안 타운에 정말 한인 이민 역사에 길이 남을 폭동이 있었잖아. 그때 우리 아버지 세대의 이민자들은 본인의 가게에서 판자로 문을 막고 소총을 들고 살아남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웠거든. 그런 일들, 소수민족으로서 약자가 되고 폭력의 대상이 되고도 보호받지 못하는 설움을 겪은 부모님 세대를 보면서 자란 우리 세대는 이제 그때와 같지 않다는 거지. 정치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것이 더 이상 그걸 왜 해?라는 질문의 대상이 아닌 거야. 아, 해야 하니까. 그런 일들을 다시는 겪지 않고 보호받고 존중받으려면 해야 하니까 하는구나, 가 다른 교포사회 보다 비교적 자연스러워 진거지. 한인 커뮤니티가 탄탄하고 역사가 깊은 엘에이 한인사회에 그런점에서 배울게 참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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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 뜨끔하다. 내가 그래. 맨날 한국 뉴스 찾아보면서 한국 정치판 걱정하고 촛불 들고 다니고 하면서 정작 내 이익과 목소리를 대변하는 사람들이 있는 호주 정치에는 관심이 전혀 없거든. 변명을 하자면 일단 첫 번째로는 너무 어렵게 느껴져. 주정부는 뭐고 연방정부는 뭔지, 리버럴, 레이버 파티, 모든 이름들이 생소하고 내가 이해하기에 너무 어려운 개념 같다는 생각이 들다 보니까 엄두가 안나는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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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 내가 봤을 때는 호주가 정치가 한국보다 더 단순하고 이해하기가 쉬워. 한국은 당을 이끄는 리더가 누군지가 제일 중요하잖아. 하지만 호주는 누가 당의 당수가 되든 간에 늘 정당은 자기의 색깔을 가지고 있거든. 간단히 설명을 해볼게.
호주에서 가장 힘이 센 정당은 리버럴 파티와 레이버 파티야.
자, 일단 가장 대표적인 보수진영 (우파 성향)을 가진 정당은 내셔널 파티와 리버럴 파티야. 한국말로 하면 한나라당과 자유당 정도 되겠다. 이들은 언제나 적은 세금, 작은 정부를 주장하고 사회적으로도 보수적이야. 대표적으로 동성 결혼문제 같은 거에서.
대표적인 진보진영 (좌파 성향)의 정당은 레이버 파티, 한국말로 노동당과 녹색당이야. 언제나 세금도 많이 내고 정부의 더 강력한 개입을 원하고 최저시급을 올리려고 하지. 성장보다는 복지와 분배를 우선으로 생각해. 이런 확실한 색깔로 지지층을 확보하는 거야. 예를 들면 캔버라는 행정도시라서 공무원들이 엄청 많이 살거든? 그래서 거기는 노동당이 완전 인기야. 노동당은 더 힘이 세고 큰 정부를 원하기 때문에 공무원의 수요가 많거든. 정부를 줄이면 우리가 밥줄이 끊길 수도 있잖아. 그래서 그래.
호주도 한국이랑 똑같아. 사람들이 다 공약과 정책보고 정치인들 밀어주고 하는 거 아니야. 여기 농부들 (여기는 농부들 땅 크기가 어마어마해서 부자들이 많아!) 이 많이 지지하는 보수 내셔널 파티가 골드러쉬부터 1950년 때 막 채금하고 농업으로 먹고 살고 경제가 막 부흥할 때 까지만 해도 힘이 쎘던 정당이거든.그래서 집안 대대로 이 내셔널 파티를 지지하는 걸 정체성으로 생각하는 가족들도 많아. 지방색, 무조건, 죽어도 1번! 이런 게 호주도 있는 거야. 그런 집안 출신 아이가 녹색당이나 노동당을 지지한다고 하면 크리스마스 때 가족모임 때 정치 이야기 못하고 그래. 심하면 유산 안 물려준다는 살벌한 농담도 하고 그래.
한국 투표할 때 보면 광주나 대구 같은데서는 진보 보수가 막 95퍼센트로 되고 그러잖아. 그런 거 보면 진짜 별세계 같다는 생각도 들지. 호주는 그런 정도는 아니니까.
물론 호주도 젊은 층이 다 정치에 관심 있는 건 아니야. 젊은 층보다는 기성세대들이 정치적 목소리를 많이 내고 젊은이들은 연애하고 놀고 기반을 잡는데 바쁜 건 호주도 마찬가지지. 하지만 여기는 환경적으로 젊은이들이 조금 더 가깝게 접하고 실제로 배우고 활동할 수 있는 발판이 비교적 많이 마련되어있는 거 같아. 예를 들면 고등학교 다니고 이런 애들이 정치에 관심이 있으면 16살 이럴 때부터 영 리버럴, 영 레이버로 당에 입당을 할 수 있거든. 그래서 대학교를 가면 캠퍼스에서 학생운동을 그 정당의 소속으로 하는 거야. 예를 들면 대학교에서 학생회장을 뽑을 때 정당 이름 걸고 나오고 당에서는 학생회장 선거에 티셔츠나 포스터 같은 거도 지원해주고 그러거든. 그런 활동들을 하면서 대학생활을 하고 졸업을 한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삶에서 정치를 가깝게 여기게 되고 정당활동이나 정치적 활동을 활발하게 하게 되는 거지. 이런 면에서 한국은 아직 틀이 좀 덜 잡혀있는 거 같아. 아닌가? 한국 고등학생이나 대학생들도 정치활동을 할 환경이 많이 마련되어있는데 내가 잘 모르는 거 일수도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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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 진짜, 잘 들었어. 내가 계속 뜨끔뜨끔한 부분들이 아주 많았다.
이제 한국의 대학생 다슬이의 두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 볼게. 이번에는 다문화에 대한 질문이야.
여러 가지 차이점 중에 호주와 한국 정치의 가장 차이점 중 하나는 '다문화'인 것 같아요. 호주에는 백인들과 함께 아시아인, 아프리카인, 그리고 특히 애보리진들이 어울려 살고 있잖아요. 그래서 (유색인종) 이민자들을 위한 정책도 필요하고요. 호주에서 정치활동을 하면서 어떤 걸 느끼셨나요? 또 호주 다문화 정책을 보고 점점 다양화되는 한국 사회가 어떤 것들을 배울 수 있을까요? BY 다슬 (서강대 3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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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 음, 이것은 조금 근본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는 거 같아. 단순하고 명료하게 답변을 주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훨씬 복잡한 문제 같아서.
국가 내 거주 외국인 비율이 한국은 5프로 (2016년 기준) 미만인데 호주는 25퍼센트 정도야. 부모님 중 한 분이 이민자인 가정의 비율은 무려 반 정도거든. 대부분이 이민자 거나, 이민자의 자녀 거나 가족 중에 이민자가 있어. 그걸 떠나서 애초에 이 나라의 근간이 이민자가 세운 나라야. 그만큼 이 이민과 이민자는 이 사회의 가장 큰 정체성이거든. 한국은 완전히 반대인 거지. 한 인종, 한 민족라는 것이 그 국가의 정체성인 거야. 역사는 한국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짧지만 다문화로 시작한 역사라 다문화에 관해서는 한국이 따라 올 수가 없어. 그래서 현실적으로 생각하면 이 곳에서 실행되고 있는 다문화 정책을 한국 현지로 그대로 가져가서 쓸 수 있을 확률이 매우 낮지 않을까 생각해. 실효성이 없다고 보는 거지.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어떤 다문화 정책이 펼쳐지고 진짜 실효성을 갖추려면 먼저 인식의 변화가 밑받침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 다양성을 존중하고 다름을 인정하는 데에 있어서 한국인들이 보수적인 성향이 있는 거 같거든. 한국의 한민족이라는 획일된 정체성은 이 글로벌 한 세계에서 계속 빠르게 깨어질 거고 더욱 빠르게 사회는 국제화가 될 수밖에 없잖아. 우리가 원하던 원하지 않든 간에 이제 피할 수 없는 세상이 흐름이 그런 거야. 우리 사회가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느냐에 문제라는 거지.
예를 들면 넌 한국인이지만 이민자니까 머리 검은 외국인, 너는 한국인처럼 생겼지만 말을 못 하는 입양아니까 외국인. 너는 혼혈이니까 반만 한국인, 이렇게 정의를 내리는 사고방식들이 아직도 있는 것 같아. 그래서 특히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 정체성 때문에 차별을 당하고 그런 일들이 있잖아. 그런건 정말 이 글로벌 한 시대에 빨리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해. 얼마나 한국사람처럼 말하고 생기고 생각하냐에 따라 KOREANNESS랄까 하는걸 (한국인스러움)을 등급 매길 순 없는 거거든. 동포사회나 다양한 한국인의 뿌리를 가진 사람들을 널리 포용하는 사회적 아량으로 이 한민족이라는 개념을 넓히고 그 안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시민의식이 어떤 정책보다 시급하지 않나, 하는 게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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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 자, 우리 정치와 다문화를 거쳐 이번에는 페미니즘에 대해서도 이야기해보자. 호주 정치판에서, 공무원 사회에서 여성 정치인 공직자들도 '유리천장'을 느끼는지 궁금하거든. 넌 어떻다고 생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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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 전 수상이었던 줄리아 길라드가 호주의 첫 번째 여성 수상이었잖아. 줄리아가 수상일 때 토니 애봇이 야당 당수였거든. 그 사람이 뭐라고 할까, 트럼프랑 비슷한 구석이 있어. 보수적이고 극단적이고 뭐랄까 치졸하달까.
리버럴 파티, 토니 애봇을 비롯한 반대파 사람들이 줄리아를 정책이나 실력으로 비난을 하는 게 아니고 여성인 것을 약점 삼아 인신공격을 하는 거야.
리버럴 파티, 토니 애봇을 비롯한 반대파 사람들이 줄리아를 정책이나 실력으로 비난을 하는게 아니고 여성인 것을 약점 삼아 인신공격을 하는 거야. (2012년 이에 대해 길라드가 속 시원하게 misogyny (여성 증오증?) speech 를 국회에서 한적있지. 유트브 에서 볼수있지: https://www.youtube.com/watch?v=ihd7ofrwQX0)
DITCH THE WITCH. 마녀를 쫒아내자. 이런게 집회 슬로건이었어. 이게 말이나 되냐?
그런 집회에 야당 당수라는 사람이 옆에 서있고 그랬어. 말은 안하지만 암묵적으로 지지한다는 걸 표현한거지. 자기 네들 모금활동 할 때 저녁 식사 메뉴를 닭가슴살 뭐 이런 음식을 메뉴에 이름 이상하게 성적인 표현 쓴다든지 해서 은근히 여성이라는 이유로 조롱을 하는거야. 또 당시 야당 상원 위원이 길라드 수상은 일부러 아이를 갖지 않겠다는 선책을 한 여자인데 인생의 뚯을 알겠냐고 발언 한것도 있어.
정책에 대한 비난보다는 '여자'가 나랏일을 맡은 거에 대한 걱정과 여자라서 이렇다 저렇다 하는 식의 비난과 조롱들이 난무했거든. 줄리아가 수상일 때 그녀에 대한 이런 크고 작은 기사가 매일신문에 올라왔는데 어느 날은 그 신문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어. 이걸 페미니즘 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 여성 수상이 집권을 했고 이런 해프닝들이 벌어지는 게 과연 긍정적인 걸까 부정적인 걸까, 우리가 발전하고 있는 걸까 퇴보하고 있는 걸까 혼란스럽더라고.
이런 상황들을 어린 여자아이들의 눈으로 보면 어떻겠어. 내가 여자인데 높은 정치인이 되면 내 인생도 저렇게 놀림거리가 되고 괴로워지겠다는 생각이 들 거 아냐. 내가 꿈을 꾸고 열심히 노력해서 저렇게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마녀가 화형대에 올라간 거 마냥 화살을 매일 받겠지 하고 생각이 들면 높은데 올라가고 싶다는 꿈을 꾸지 않게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들 때문에 그때는 하루하루 신문을 보는 거 자체가 정말 힘들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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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 한국 역대 최악의 대통령으로 일컬어지는 503 박근혜 전 대통령을 비난할 때도 그 이야기는 꼭 나와. 여자가 나랏일을 하니까 그런다 여자라서 결혼도 안 하고 애도 안 낳아본 사람이 어떻게 정치를 하냐는 둥. 근데 개인이 최악이었던 거지 여자라서 애 안 낳아봐서 민심을 몰라서 말아먹은 건 아니거든. 그럼 여태 남자 대통령들은 다 애 낳아봤냐?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정말 어디부터 어떻게 고쳐야 되나 싶어 져. 한나라의 수상이고, 대통령이고, 검사면 뭐해. 어떤 사람들한테는 그래 봤자 결국에는 '여자'. 여자라서 저래, 여자라서 안돼. 여성이라는 그 하나의 정체성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수 있고 후려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게 너무 암담한 거지. 아직 갈길은 멀었어.
안나, 너는 개인적으로 어땠어? 직장 생활하면서 느낀 유리천장이 존재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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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 물론 실제로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글라스 실링, 유리천장은 있어. 우리가 그걸 인정하고 계속 이야기해야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해. 전체 빅토리아 주의 공무원의 60퍼센트가 여자야. 하지만 각 부서의 톱인 차관은 8명 중에 2명뿐이야. 진짜 기가 막힌 거 이야기해줄까. 1966년인가 그때는 법적으로 결혼한 여자는 공무원을 계속할 수가 없었어. 내가 태어날 때 즘에는 결혼을 하고 싶으면 사직을 해야 한 거지. 지금 생각하면 진짜, SERIOUSLY? 싶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양성평등에 대해서는 바로 지금이 호주 정부가 아주 진지하게 고민하고 변화하고 있는 시기라고 생각해. 분명히 부작용도 있고 속도나 방향이 모든 면에서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두가 분명히 인식하고 불편해도 자꾸 공론화를 하고 어떤 움직임을 진지하게 만들려고 하고 있는 시점이라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나는 이 여성으로서의 유리천장보다는 RACE, 인종으로 인한 천장이 더 심각하고 더 문제라고 생각을 하지. 어디를 가나 격렬히 토론되고 이슈가 되는 페미니즘에 비해 인종에 대한 뿌리 깊은 인식에 대해서는 언급을 불편해하는 분위기라고 느껴. 여성의 유리천장이 있다고 하잖아. 그걸 빗대서 하는 말이 호주 사회에서 아시안은 머리 위에 뱀부 실링이 있다고 해. 대나무로 만들어진 천장.
다른 아시안계에 비할 때 중국 커뮤니티는 어마어마해. 규모도 그렇지만 중국인들은 호주에 금광 터지고 하던 골드러시 때부터 유입되었기 때문에 막 5대까지 있고 그러거든. 그런데도 등록된 회사들에 임원 비율에는 중국계를 비롯해서 아시아계는 매우 적어. 공무원 사회는 대표적 보수집단이라 더 심하지. 차관 위로 높은 자리로 올라갈수록 소수민족을 보기가 드물어.
이게 인종차별은 더 교묘하게 이루어지고 인종차별을 하는 본인도 본인이 차별을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 불편하고 거부감이 드는 것이 표출된 경우들이 많거든. 아무도 나에게 너의 인종이 나의 한계라고 말하지 않아. 아무도 그게 이유라고 말하지 않거든. 대신 어떤 무언가가 호주적이지 않다고 표현을 하는 거야. 호주적이고 호주적이지 않은 게 뭔데?라고 물으면 여기 사람들도 그 느낌을 알지만 말로 딱 집어서 표현을 못해. 그런데 그런 무언가가 있다고 하는 거야. 보수적인 직업 (공무원 집단) 일 수록 그런 호주스러움의 가치를 높게 평가하고 지키고자 하는 노력이 더 강해. 그러니까 내가 어떤 상황에서 '호주'스럽지 않고 튀었을 때 그들은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끼고 그걸 돌려서 표현하는 거지. 예를 들면 네가 지금 한 거처럼 너무 직선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호주 문화에 맞지 않는다는 등 호주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등 말이야. 내가 적합하지 않게 행동했다는 표현을 정말 여러 가지로 할 수 있더라. 그런 걸 마주할 때는 진짜 기분이 묘하고 야릇해. 뭐야, 지금 이게 내 머리 위에 천장인가? 아닌가? 너무 헷갈리는 거지.
어떤 사람들은 그건 내가 생각하고 느끼는 데에 달렸다고 좋게 생각하라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시스템상으로 분명히 잘못된 거고 네가 느낀 불편함은 차별로 인한 거야 라고 하기도 해. 결국에는 나 자신이 고민해서 풀어가야 하는 거야.
초년생 때는 나도 그런 '느낌적인 느낌'을 잘 몰라서 고군분투했지
여기는 LET' S HAVE A COFFEE라는 말이 별의별 의미가 될 수 있거든. 진짜로 카페인이 부족해서 동료들과 빨리 한잔 편하게 하려는 걸 수도 있고 사무실에서는 하기 힘든 말을 하려는 걸 수도 있고 은밀한 잡 오퍼가 될 수도 있어. 한 번은 급이 높은 상사가 커피 한잔 하자고 하더니 네가 우리 부서 오기 전에 너에 대해서 들었다는 거야. 그 해가 내 첫해였는데 처음으로 내 평판을 듣는 거잖아. 뭘까 기대하고 있는데 그러더라고.
근데 왠지 기분이 묘한 거야. 욕도 아니고 뭐도 아닌데 그게 좋은 거로 느껴지지가 않는 거야. 호주애들은 욕심이 많고 야망이 있을수록 나처럼 티 나게 안 하거든. 근데 내가 분위기를 모르고 혼자 파닥파닥 했고 그게 보수적 집단에서는 눈에 확 뜨인 거지. 아마추어처럼 보였던 거야. 그때는 정말이지 분위기 탈 줄 몰랐어. 그래서 이런 말을 해줄 수 있는 상사 또 동료가 내가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보물같이 여기는 인맥이지.
그런데 지금은 사실 알고도 그 장단에 맞추고 싶지 않아서 안 맞추는 면이 있어. 내 색깔대로 성공하고 싶은 욕심이 있어. 어떻게 호주스러울 줄 알지만 그게 나다운 건 아니니까.
내 직장상사 중에 여기 원주민 출신인 멘토가 있거든. 그분이 나한테 어느 날은 그러는 거야.
안나, 네가 공무원이 되고 지금까지 승진이 잘된 이유는 네가 너였기 때문이야. 지금까지는 너의 그 특별함과 다양성이 너를 돋보이게 하는 장점이 됐어. 하지만 네가 야망을 가지고 고위직로 올라가면 갈수록 너의 직책과 주변 사람들이 너를 너로 만드는 요소들을 다 다듬어내고 제거하려고 할 거야. THEY WILL BEAT IT OUT OF YOU. 그래도 네가 가진 백그라운드와 너의 성격으로 만들어진 너만의 색깔을 절대 잃지 마. 저들과 똑같은 색을 가지려고 노력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내가 배운 성공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거든. 그들을 흉내내고 똑같아져서 성공하는 법과 내 인종과 백그라운드 문화, 성별 등이 가진 여러 색깔을 간직해서 성공하는 법.
나는 예나 지금이나 두 번째에 욕심이 있어. 어느 정도 조율은 필요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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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 자 이번에는 다른 이슈로 넘어가 보자. 한국은 공무원/ 정치인들의 공금횡령이나 부패가 깊숙이 만연하여 있어. 지금 전 대통령 두 명이 나란히 수감된 거도 결국에는 저런 부패 때문 이거 든. 김영란법이라는 부패방지 특별법이 개정되었을 정도야. 호주에도 이렇게 공직자나 정치인들은 비리를 밥먹듯이 저지르는 사람들, 정치판과 공직계는 뒷돈이 오가는 더럽고 썩은 곳이라는 인식이 있니? 공무원 사회에서는 부패와 비리에 대해 어떤 자세를 취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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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 나같이 세금으로 밥벌이하는 사람들은 사실 공공의 이익 (public good/public interest)를 위한 직장이기 때문에 논란이 되지 않도록 행동 제대로 해야 한다는 인식이 굉장히 강해. 그래서 우리는 한해의 업무를 마치고 직장에서 하는 송년 파티도 다 사비를 내고 참가해. 국민들 세금을 우리 술 먹고 노는 파티에 쓰면 안 되니까. 한 번은 재무부 애들이 볼링 하는데 몇천불 (2-300만원)인가 썼다가 신문 크게 나서 난리 나고 우리 다 이상한 사람들 만들었던 적도 있었어.
호주라고 비리나 부패사건이 없지 않아. 당연히 사람 사는 곳인데 욕심 많고 양심 없는 사람들은 존재하지. 근 몇 년간 가장 크게 터진 두 사건만 이야기하자면 주정부 교육청에서 일하는 공직자가 7년 동안 $2.5 mil 세금을 빼돌렸는데 몇 학교 교장들이 뒷돈을 대고 이 부정부패에 합류했다는 거야. 엄청난 사건이었어.
그리고 두 번째는 진짜 엄청나게 큰 사건이었는데. 오빗 케이스라고 불리거든. 이건 부정부패 때문에 호주 정치인이 감옥 간 예: 뉴 싸우스 웨일스주의 전 장관들 두 명. Eddie Obeid maximum 5 years, Ian McDonald maximum 10 years (7 years without parole). For more details read this: https://www.smh.com.au/politics/nsw/former-nsw-labor-minister-ian-macdonald-jailed-for-up-to-10-years-over-doyles-creek-coal-deal-20170601-gwhyp5.html
이거는 드문 경우 기는 해. 자주 일어나지는 않아. 모든 공무원은 부정부패를 바로 신고할 수 있는 직통 핫라인 번호가 있어서 바로 신고할 수 있기도 하고. 일단 모든 일이 독립적인 많은 기관의 절차를 거치기 때문에 개인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부분이 별로 없어. 한국의 최순실 사건이나 박근혜 전 대통령을 위해서 뭐 세금으로 호텔 인테리어를 고치고 이런 이야기 들으면 완전히 별세계 이야기 같아. 그 정도의 사건은 일어날 수가 없는 구조야. 일단은 권력이나 상하관계라는 구조가 약하니까. (그리고 참고로 그렇게 빠릿빠릿하게 위에서 원하는 대로 일처리 할 수 있는 인력 자체가 없을걸? 하하)
어떤 힘을 가졌을 때 그걸 사용하는 방법이 한국이랑 호주는 틀린 거 같아. 일단 호주는 권력자와 비 권력자 같은 계급에 대한 사고가 한국에 비해 굉장히 약해. 호주 자체가 노동자들, 막 영국에서 배고파서 빵 훔치다가 감옥 간 사람들, 영국의 그런 격식이 싫어서 넘어온 사람들이 모두 동등하게 함께 시작해서 세운 나라잖아. 영국과 같은 문화권이지만 영국은 귀족이나 왕실의 권위 같은 어떤 계급이 있다고 하면 호주는 그런 개념이 훨씬 약하거든. 정치인이 어떤 불소 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던지 재벌이 안하무인으로 군다던지 하는 권력을 휘두르는 일이 없어. 땅콩 회항? 그런 거는 진짜로 여기서는 완전히 코미디고 진짜 믿을 수 없고 상상도 못 할 일이야.
내 일의 특성상 여기 고위층, 상류사회 사람들을 많이 만나는데 그런 사람들은 권력이 생기고 휘두르고 싶을 때는 아주 교묘하게 티 안 나게 휘둘러. 졸부 스타일(?)로 마구 티 나게 내가 힘이 있다는 걸 과시하는 걸 되게 품위 없다고 생각하거든. 그게 오히려 사람 피 말리게 할 때도 많아. 계속 머리로 싸움해야 하니까. 그래서 여기 상류층이랑 있으면 정말 기가 쭉쭉 빨리고 머리가 막 혼란스러워. 그것도 나름대로 굉장히 괴롭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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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 궁금하다! 호주 상류사회라니. 왕족, 귀족, 재벌가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흥미돋아. 상류사회 사람들 삶은 어떤지 조금 이야기해줄 수 있어? 재미있을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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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 응, 이건 내 호주 친구들도 들을 때마다 엄청 재밌어하는 이야기야. 호주 친구들도 아직 호주에 진짜로 상류사회, 하이 소사이어티가 존재하는지 모르거든.
사람은 다 똑같으니까 다 신기해하고 재밌어하지. 내가 주정부 차관 보좌관으로 있기 전에 호주 총독부에 있었어. 총독 보좌관이 내 직함이었거든. 실질적인 힘은 없다고 해도 호주는 아직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 통치 하에 있는 나라거든. 이 나라의 넘버 1은 영국 여왕이고 2번은 여왕을 대신하는 총독인 거야. 그리고 총독부는 말하자면 영국 본국과 호주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는 기관인 거지. 총독 보좌관들은 연설문 작성, 총독 대외행사 준비 등의 일 이외에도 진짜 총독을 보좌하는 자잘한 일들을 다 해. 진짜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혹시 영드 '다운튼 애비' 봤어? 영국 1920년대 귀족들이 사는 저택에 보면 위층에 사는 귀족들이 있고 지하에서 움직이는 서번트, 하인들이 있잖아. 아직도 그런 배경으로 총독부에는 있는 거야. 총독 부부랑 우리 보좌관들이랑 디너를 하는 때가 있거든. 초대를 받아서 가면 그곳에서 일하는 공무원들은 직함이 진짜로 'Butler (집사), Footman (하인), Chauffeur(운전수)' 막 그래. 다운튼 애비에 나오는 그 다운 스테어 피플, 있다는듯 구조 되있는 직장이었다니까! 나는 내가 그 곳에서 격식을 차려서 시중을 받고 밥을 먹는 일을 매달 하면서도 현실감각이 없어. 여기는 어디고 나는 지금 어느 시대에서 살고 있는거지? 하는 생각이 들고 막 혼란스럽고 불편하고 그랬어. 그런 기분은 결코 익숙해 지지가 않아!
아주 오래된 상류층 재벌들을 만나는 일도 있지. 예를 들면 호주 전체의 있는 마이어 백화점의 마이어 패밀리라던지. 그런 사람들은 정말 기부도 많이 하고 사회적으로 좋은 일을 많이해. 매년 여름 멜번에서 공짜로 야외오페라 와 음악회 볼수있는 시드니 마이어 뮤식 볼이 한예.눈에 띄는 갑질을 한다거나 거만하게 구는 사람들은 못봤어. 옷 차림도 수수하고. 다시 말하지만 내가 봤을 때 한국은 아직 어떤 권력을 쓰는데 잘 익숙하지 않고 재벌들이나 상류사회가 세련된 노블리스 오블리제 귀족 문화의 틀을 잡을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그런거 같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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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 나는 반대로 생각하는 게, 틀을 잡을 여유가 없어서 라기보다는 이미 잘못된 틀이 아주 오랜 역사를 타고 내려오면서 굳어진 게 아닌가 생각해. 사실 조선시대만 봐도 인도 카스트 제도랑 기본적으로 방향성이 같거든. 뭐 왕족, 양반, 귀족, 천민, 상민. 갑을병정 주르륵 갑질 하고 을질하고 병질하고 하던 게 고대로 내려온 거야. 뭐 왕족 귀족 이런 사람들이 지금 정치인, 재별들이 된 거고 양반은 주류 사회의 지식인들 같은 사람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평민이 돼서 그 상하관계를 되풀이하는 거지. 잘못된 틀이 천년만년 내려와서 아직도 남아있는 거 같다는 생각을 해. 틀이 안 짜인 게 아니고 계급의 틀이 시대에 맞지 않게 아직도 유지되어있는 게 문제랄까 싶은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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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 오, 그럴 수도 있겠네.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까 이해가 된다. 한 개인이 계급의 발판 위에서 과도한 권력을 가짐으로써 이 사람이 쥐고 흔드는데 따라서 이 큰 틀도 흔들흔들. 멀리서 난 한국 사회나 정치판을 보면 막 흔들 흔들리는 거 같아. 중심이 없이. 호주는 일단 한국과 비교해서 봤을 때 시스템이 힘이 세고 개개인이 휘두르는 권력이 세지 않거든. 일처리 하나도 많은 단계를 거쳐야만 하고. 그러다 보니까 개인이 흔들리고 빠져도 틀 자체는 무너지지 않는 거야. 한국은 보면 어떤 정당의 얼굴인 정치인 한 명이 뭐 큰 실수를 하면 정당 자체의 존폐위기가 오고 망하고 그러는데 호주는 개개인으로 한 단체나 정당의 운명이 좌지우지되고 그런 일은 없어. 타격은 받아도.
새로운 정권이 바뀌고 새로운 장관이 오면 우리 차관같이 장관 사무실에 조언하는 공무원 리더들은 교육하느라 엄청 바빠져. 그리고 제 아무리 대통령이고 장관이 대단한 사람들이라고 해도 새 직장에 출근하는 건데 당연히 잘 모르지. 그래서 해본 사람들한테 조언을 많이 받고 멘토링을 받는 시스템이 잘되어 있거든. 전 대통령이 현 대통령에게 멘토링을 해주고 인수인계를 잘해주고 물러나는 게 미덕이고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져.
한국을 보면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게 전 대통령들한테 조언받고 싶어도 다 감옥 아니면 하늘나라에 가있잖아. 누가 해줄 거야. 그런 시스템 적인 면에서 한국 정치계는 조금 취약하다고 느껴져. 개인들이 가진 권력들이 대단해서 휘두르는데 본인이 휘두르면서 흔들리고 그렇게 개개인이 흔들리면서 전체가 흔들리는 거 같다고 할까, 그런 느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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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 호주 내의 공무원은 어떤 직장이라고 생각해? 호주에서 공무원이 되고 싶다고 하는 후배가 있다면 현실적으로 해줄 수 있는 조언 같은 게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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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 일단 최대한 객관적으로 단점과 장점을 나눠볼게
단점은 문화적으로 보수적이고 생각하는 거만큼 철밥통이 아니야. 한국에서 생각하는 공무원 안정성이랑은 거리가 있어. 공무원이라도 연금 더 나오고 그런 거 없고 다른 직장들이랑 똑같아. 노력 안 해도 연차 쌓이고 진급하고 이런 거 없고 경쟁이 오히려 다른 직장보다 엄청 치열해. 세금을 쓰다 보니까 예산 소비에 예민하고 소극적이라 이라서 모든 것이 열악하고 느려. 예를 들면 컴퓨터도 일반 직장에서는 이미 폐기 처분했을 법한 고물이야. 국민 세금으로 공무원들 좋은 컴퓨터를 쉽게 바꿀 수 없는 거니까. 직장 내 스트레스로 인한 정신적 타격이 생각보다 엄청날 거야. 직장 내 정치가 정말 어마하게 치열해. 문화적으로 호주 사람들이 그렇거든. 겉으로는 애브리원이즈해피인데 속마음은 다 달라. 연기해야 하는 거랑 정말 나는 담백하고 솔직하게 대했는데 뒤통수 맞는 거 그게 진짜 힘들어. 공문을 쓸 때는 단어 하나하나에도 다 의미가 있고 콤마 하나하나 다 예민하고 민감해. 머리를 엄청나게 써야 하는 거야. 작은 실수에도 정책이 엎어질 수도 있고 세금을 크게 낭비할 수도 있는 거니까. 공무원이 편한 직업이라는 인식이 한국에는 있다고 들었는데 여기도 어떤 곳은 편하겠지만 내가 일하는 곳은 전혀 아니야.
호주 사람들은 공무원 하면 '칼퇴근'이라고 하는데 그건 옛날이야기 아니면 하는 일마다 달라. 예산 나올 때는 밤 10시까지 일할 때도 있고 요즘 우리 부서 사람들 주말에 일할 때도 있어. Overtime pay는 못 챙겨 받을 때도 많아. 가장 궁금할 연봉 문제는 한국만큼 박봉도 아니고 일반 회사보다 많이 받는 거도 아닌 정도야. 돈 때문에 할만한 직업은 아닌 거 같아. 사명감이나 보람이나 경력 쌓는 거 때문에 하지. 똑똑한 애들이 정말 돈을 많이 벌고 싶다면 공무원 안 하고 법, 엔지니어, 파이낸스 이런 쪽으로 가. 내가 졸업할 때는 졸업생으로 가장 큰 연봉을 받는 친구들은 저쪽 일이었거든. 돈 때문에 공무원 하는 것은 추천하지 않아. 이민 와서 있어 보이게 화려하게 살고 싶은 사람한테도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직업이야.
단점을 실컷 이야기했으니 이제 장점을 말해볼게.
일단은 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가장 중심에서 제대로 볼 수 있어. 사명감이나, 공공을 위해서 일한다는 보람도 엄청나고 아무리 돈이 많아도 못하는 사회참여, 세상을 실제로 바꿔나가는 현장에 있다는 특권이 있지. 정말로 많은 걸 배우고 진짜 많은 사람을 만나면서 생각하는 게 많이 바뀌는 걸 경험하게 돼.
현실적인 부분에서는 일단 보통 직장처럼 휴가가 있으면서 오래 근무하면 한국에서 말하는 안식년 비슷하게 유급휴가가 더 주어져. 그래도 공무원은 일반 직장이랑 비교했을 때 조금이라도 워크 라이프 밸런스가 더 좋은 편이야. 공무원도 어느 정도 레벨이 되면 연봉이 높아. 하지만 굉장히 공무원 안에도 엄청나게 세분화되어있고 하기 때문에 어떤 계급이고 어떤 일 하냐에 따라 천차만별이야. 한국은 9급은 다 비슷하게 7급은 다 비슷하게 받는데 여기는 급이 같으면 비슷한데 같은 급에서도 3-4가지에 밴드로 또 세분화되어있어서 딱 잘라 얼마쯤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어. 출산과 육아하기 편한 직업. 아이가 아프다면서 집에서 오늘은 재택근무하겠다 해도 용인이 되는 분위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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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 나는 한국과 나의 관계를 아주 오래 고민했어. 결국에는 그걸로 책까지 한 권 내게 생겼잖아. 조국에 대한 애증, 짝사랑, 실패한 결별의 과정 등이 나한테는 어떤 흉터로 남은 것 같거든. 너와 한국은 어떤 관계인 거 같아? 한국인, 호주인, 뉴질랜드인, 세계인, 아시안? 너라는 사람의 정체성 고민이 30대 중반이 된 지금은 끝난 거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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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 왜 가끔 내가 한국 가면 무슨 생각하냐고 했잖아.
일 년에 한 번씩 한국에 가거든. 한국 백그라운드고 오빠도 한국에 역이민 가서 살고 친척들도 있고 그래서 2주씩 있다 오는데 한국에 가면 그 노래 가사가 늘 떠올라. 그런 말 있잖아,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나도 먼 당신.
너무 알고 싶고 가까이 가고 싶고 익숙해지는 거 같다가도 어쩔 때 보면 완전히 딴 세상 같아.
누가 나한테 너희 나라 한국은 어떤 나라냐고 물어보면 정말 뭐라고 해야 할지 머리가 복잡한 거야.
어떨 때는 나는 아무 인종도 아니고 싶은 충동이 강해. 한국분들이 좋은 뜻으로 한국을 더 알리는데 기여할 수 있지 않느냐고 묻거나 하시는데 어떨 때는 좀 불편하고 부담스럽다는 생각도 들어. 나는 내 정체성을 내가 고르고 완성시키고 싶은 욕심이 있는 거 같아. 어떤 틀에도 박히고 싶지 않은 것뿐이야. 근데 그걸 이해 못하는 사람이 많아. 내가 한국인인 게 자랑스럽지 않거나 부끄러워서 그런 게 아니거든.
내가 무언가를 자랑스러워하려면 이유가 필요하고 그걸 찾고 고민할 시간이 나한테는 필요한 거뿐이야. 예를 들면 내가 뉴질랜드 사람인 게 자랑스러운 거는 무조건적으로 내 나라이기 때문에 국민으로서 사랑하고 자랑스러워하는 거라고 배워서가 아니고 뉴질랜드라는 나라가 가진 문화와 색깔이 내가 개인적으로 존중하고 좋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기 때문에 자랑스러운 거거든. 그런데 한국에서, 특히 기성세대로부터 애국심이나 나라에 대한 감정 같은 것들을 가르침 당하고 강요당하는 느낌이라서 불편했던 것 같아.
의문 없이 한국사람이니까 자랑스러워하고 알리고 사랑하라고. 나는 일단 의문 없이 뭐를 안 한단 말이야. 그걸 어떤 사람들은 건방지게 외국물 좀 먹었다고 해서 조국을 무시한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나는 그런 게 아니거든.
몇 년 전에 한국에 들어갔는데 여름이었어. 지하철을 탔는데 내가 무심코 다리를 꼬고 있었단 말이야. 그런데 내 옆에 할아버지가 다리를 툭 미는 거야. 다리 꼬지 말라고. 모르는 스트레인저 늙은 남자가 나한테 손을 댄 거야 -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아는 사람이듯. 나는 그게 너무 충격적이었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내 머리 속에서 프로세스가 안됐어. 그래서 다시 다리를 꼬았는데 옆에 있는 아주머니가 어르신이 말씀하시는데 왜 무시하냐고 어르신 말을 들어야 한다면서 막 혼내시는 거야. 난 지금 나를 나무라는 사람 중 아무도 모르는데! 멍하니 있다가 지하철에서 내릴 때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안녕히 계세요'라고 하고 내렸는데 아직도 나는 그 일이 너무 충격적이야.
내 나라니까 의문도 없이 사랑하고 자랑스러워야 해. 어르신 말이니까 무조건 옳고 들어야 해. 의문 자체가 터부시 되는 그 분위기가 이해가 안돼서 더 멀리 느껴지는 거 같아. 세상이 말하는 대로 아무 의문 없고 의심 없이 믿고 따라가면 단순하고 편하겠지만 계속 스스로 옳은지 나에게 맞는지를 의문하며 찾아가는 과정이 없이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생각하거든. 나는 지금 그걸 알아보고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어떤 면에서는 나의 묻혀있는 어떤 한국의 부분이 언젠가 어떤 모습으로 불쑥 나오겠구나 하는 기대반, 걱정반 하는 마음도 가지고 있어. 내가 요새 그걸 우리 엄마를 보면서 많이 느끼거든. 우리 가족이 올해로 이제 이민이 25년 차야. 처음 이민 갔을 때 우리 엄마가 어땠냐면 이 나라에 왔으니 우리는 이 나라 사람들처럼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스타일이었어. 영어책만 읽고 집에서는 영어로 대화하라고 하시고 한국 친구들을 굳이 찾아서 사귀지 않고 그런 사람이었거든. 성인이 되면서 나는 호주로 넘어왔잖아. 가끔 뉴질랜드 본가 들려서 엄마를 만나면 매해가 틀린 게 느껴져. 점점 입맛도 한국음식만 찾으시고 한국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고 한국 프로그램을 찾아보는 일이 늘어나는 거야. 내가 언제 충격을 받았냐면 어느 날은 우리 엄마가 티브이를 틀어놓고 가요무대를 보고 있는 거야! 그런 거 생전 찾아보는 스타일 아니거든. 다른 프로그램도 아니고 절대 보지 않던 가요무대라니! 우리 엄마가 왜 그러지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거지 조금 혼란스러웠어. 엄마랑 둘이 여행을 가서 넌지시 물어봤는데 엄마가 그러는 거야. 요새는 조금 우울하면 7080 노래를 부르는 프로그램을 본대. 그리고 완전히 기분이 다운 일 때는 가요무대를 본다는 거야. 그래서 이유를 물었거든? 엄마가 하는 말에 한번 더 충격받았어.
무대가 시작하기 전에 오프닝 멘트를 하잖아. 그때 사회자가 방청객에 계신 신사 숙녀 여러분, 그리고 해외에서 보고 계신 우리 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말하는데 그걸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리고 눈물이 날 거 같다고 하시는 거야. 그때 내 가슴이 쿵 내려앉는 거 같았어. 이 사람의 코어 메모리, 어떤 본질, 뿌리라는 거는 아무리 깊게 묻어놔도 나이가 먹으면 먹을수록 드러나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 이민 25년 만에 한국인의 색이 점점 짙어지는 우리 엄마를 보면서 요새 나도 느낀 점이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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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 맞아 우리 할머니는 이제 여든이 다되어가고 625 때 북한에서 넘어올 때 8살이었거든. 할머니가 치매가 오셨는데 그때 이야기를 그렇게 하시는 거야. 남한에서 산 그 긴 세월이 있는데 북한 이야기를 하시더라고. 나도 그때 그런 생각 많이 들었어. 사람은 나이가 먹으면 먹을수록 본인의 본질로 돌아가려고 하나보다, 뭐 그런.
이건 진짜 개인적으로 안나라는 나의 새로운 친구한테 내가 너무 궁금한 건데
안나야, 너는 앞으로 뭐가 되고 싶니? 뭐를 하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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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 나는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뭘 꼽아야 할지 모르겠어.
공무원을 평생 할 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지금 하는 일은 짧으면 2년에서 길면 5년 정도 더 하고 싶어. 안식년 받을 때까지는 버텨야지. :D
내가 하고 싶은 거도 많고 궁금한 거도 많고 그래. 외국에 있는 사무실에 발령 나가서 주재원 같은 거 해보고 싶기도 하고.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작가에 대한 꿈도 이루고 싶어서 지금도 시간 날 때는 끄적끄적하는 중이야. 다시 공부해서 박사학위도 받고 싶고 이제 30대 중반이니까 가족도 이루고 싶기도 하고.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가장 중요한 골자는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내가 공무원이 되던지 글을 쓰던지 교육을 하던지. 내가 받은 교육이나 자유나 경험이나 모든 게 정말 특권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이걸 나 한 사람만을 위해 쓰려고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거든. 그래서 그걸 쓸모 있게 쓰고 싶어.
인생 한번 살고 가는 건데 가능하면 난 후회 없는 삶, 세상에 쓸모 있는 사람으로 살고 갈래.
어쨌든 난 꿈이 너무 많은 거 같아. 가끔씩 그걸 좀 축소했으면 좋겠어.
아니! 축소하고 싶은 마음 반, 드리머로 평생 꿈이 많아서 고민하고 살고픈 마음 반 정도?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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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 : 진짜 많은 주제로 깊고 다양한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것 같아. 아주 어릴 적부터 인권, 페미니즘, 정치와 삶의 상관관계와 권력의 올바른 흐름을 고민해온 너와의 대화가 나한테도 EYE OPENING, 눈을 확 띄어주는 것 같은 역할을 한 거 같아서 정말 고맙다는 말 하고 싶어.
마지막으로 이민을 생각하고 있는 한국에 있는 친구,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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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 이민을 온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이 본인이 치밀하게 알아보고 선택해서 온 게 아니고 운명처럼 휩쓸려 온 경우가 많은 거 같아. 내가 여기서 이렇게 살고 있을 줄 정말 몰랐다고 말하는 사람이 정말 많거든.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잖아.
개개인이 신중하게 잘 결정한 경우도 많지만 이민이라는 게, 그리고 그 과정이라는 게 정말 파도 앞의 모래처럼 쓱 이리 밀려가고 스윽 저리 밀려가듯이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일들이 계속 벌어지는 그런 거거든. 그런 파도에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일수록 이민이 주는 기회들을 놓치지 않고 쓸모 있게 쓰는 것 같아. 치밀하게 무언가를 계획하고 딱딱 플랜을 짜고 목적지가 분명해야 하는, 불확실성과 불안함을 못 견디는 사람이라면 이 이민이라는 과정의 불확실성 자체가 어마어마한 천재지변처럼 느껴질 수 있어. 그 변화와 모험의 스트레스를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해외 파견 주재원이나 유학처럼 단기적인 계획부터 시작해서 조금씩 성취해가면서 천천히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해.
이민을 일단 한번 나오면, 우리 오빠처럼 다시 역이민으로 돌아가게 되더라도 그 전과는 다른 사람이 되거든. 생각하는 구조도 바뀌고 사람의 색깔이 한층 다양해지는 거야. 다시는 한 가지 색깔로 돌아갈 수 없어. 그런 어드벤처나 모험을 유연하게 대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민은 해볼 만한 선택일 것 같아.
이민으로서 나는 내 삶의 폭이 좀 더 넒어지고 자유를 조금 더 만끽 할수 있는 기회들이 있었던것도 같아. 이런 자유를 기회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용감해져도 돼!
어떤 선택을 하든지 간에 응원할게!
여태까지 길고 지루하고 어쩌면 조금은 생소하게 느껴졌을 이야기 잘 들어줘서 정말 고마워.
*답글은 원래 하던 대로 반말로 주고받으면 더 좋을 거 같아!! 나도 그게 편하고, 언니 거나 오빠 거나 친구 거나 동생일 너도 그게 편할 거야, 하다 보면!! 물론 존대가 편하면 그렇게 소통해도 좋아 :-)
**호주 이민 생활 중이거나, 호주에서 이민 과정을 밟고 있는 동료들 중에 자신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이민을 생각하는 한국의 청년'들에게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만한 조언들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부담 없이 댓글이나 인스타 디렉트 메시지를 줘! 꼭 영주권자나 시민권자일 필요도 없어. 지금 이민의 과정을 밟으면서 느끼는 고충과 어려움에 대해서 솔직하게, 이민에 대한 좋은 점과 후회되는 점도 가감 없이 나누고 싶은 동료들의 참여 기다릴게!
***출처를 밝힌 공유는 언제나 환영이야! 따로 물어보지 않아도 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