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2018-06-30

by a little deer
묘하게 화가 치솟았다. 왜 하필이면 이 시를 읽고 있는 걸까? 여자의 신경을 긁을 다른 시도 있을 텐데. 하지만 뭔가 다른 힘이 그를 붙들고 길을 인도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나직하고 강한 목소리로 계속 시를 읽었다.

우리는 우리의 짧은 불빛이 반짝인 뒤,
긴 밤을 자고 또 자야 한다. p.97.


읽다가 덮어둔 부분을 오랜만에 펼쳤더니 앞부분이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몇 페이지 앞으로 돌아가다가 저 시 구절에 탁 걸린다. '그건 무슨 책이에요? 여자가 그의 손을 가리키며 물었다. 카툴루스(주: 로마 공화정 말기의 시인)입니다. 정말요? 여자가 또 방긋 웃었다. 도리고 에번스는 여자에게서 벗어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여자의 눈, 저 빨간 꽃. 그는 믿고 싶지 않았지만, 여자가 그에게만 보여주는 것 같은 저 미소. p.95.' 아름답고 강렬하게 느껴지는 첫 만남을 묘사한 부분이었네. 하지만 나는 책을 읽어달라는 주문이 너무나 낭만적이야, 하면서 내 멋대로 생각에 잠긴다. 더구나 시를 읽어달라고! 맞아, 그렇게 듣고 싶은 목소리도 있지. 책을 읽어주는 남자, 그런 일에 내 두 눈은 '하트 뿅뿅'이 되곤 한다. 으이그, 그러니 이 나이 먹도록 이 모양 이 꼴이지, 허허.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 없이 살아갑니다. 그 친구가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난 잘 모르겠습니다. 도리고가 대답했다. p.98.'


금요일에는 너무 피곤해서 늦잠을 자고 지각하는 바람에 아침도 책도 없었다. 이 글을 쓰기 시작하고 아마 처음으로 하루를 건너뛴 것 같다. 그런 날들이 많아질 수도 있겠다고 각오를 해보지만 마음이 좀 답답하고 슬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일과 생활이 균형 잡힌 삶이란 건 정말로 '유니콘' 같은 것일까, 더 나은 혹은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드는 것이다. 그러나 바람의 방향이 바뀌듯, 어느 정도는 흘러가는 대로, 그때그때 주어지는 대로 살아가는 것도 방법이겠지. 지금은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이었음을 믿고 준비를 하고 기회를 찾으면서. 그러다 보면 어느새 전혀 낯선 공간과 시간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또 어쩌면 아무 소용없이, 긴 밤을 자고 또 자야 하는 때가 금방 올 지도 모른다.


며칠 전부터 또 <나의 미카엘>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아버지는 주의 깊은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인생이 마치 교훈을 얻고 경험을 저장하는 예비 과정이라도 되는 듯이 인생을 살아가셨다. p.58' 아마 내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나 보다. 한나처럼 암시와 징조에 끊임없이 시달리면서.


어쨌든 아직은 짧은 불빛이 반짝이는 시간이라고 믿어야겠지. 긴 밤을 자고 또 자기 전에. '더 읽어줘요. 여자가 말했다. 그는 급히 책장을 넘기다가 잠시 멈췄다가, 또 몇 장을 더 넘기다가 멈추고는 시를 읽기 시작했다. p.96.' 오늘 밤은 하품이 날 때까지 책을 읽다가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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