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일주일 고된 삶의 긴장에서 벗어나기 위해 술로, 여행으로, 혹은 깊은 잠으로 빠져들 기대에 설레 마음이 들뜨는 시간. 한시적 탈주와 탈선의 시간이 카운트 다운되는, 그래서 더 흥분되는 금요일 저녁. 이 시간에 상담소를 찾는 이들이 있을까.
우여곡절 끝에 자격증을 따고 여기저기 이력서를 내밀다 지쳐갈 때쯤 금요일 저녁 시간 자리를 겨우 하나 얻었다. 어쩔 수 없이 금요일 근무 조건을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앞으로 한동안 금요일이 내 삶에서 삭제된다는 생각에 망설였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이 삭제 처리될 사생활에 대한 아쉬움을 덮어버렸다.
숨과 쉼, 시적인 감성이 짙게 밴 상담소는 한남동이 주소지이지만,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오래된 뒷골목 언덕에 위치한 낡은 빨간 벽돌 건물에 자리 잡고 있었다. 조금만 걸어 나가면 수십억 원을 넘어 백억 원대를 호가한다는 고급 빌라와 명품 매장이 늘어선 거리지만, 마치 이곳은 타임머신을 타고 20년 전으로 되돌려 정지된 시공간에 존재하는 듯했다. 오래된 낡은 간판의 철물점, 허름한 식당, 실체를 알 수 없는 물건이 진열된 잡화점, 어느 것 하나, 한남동하면 생각나는 ‘부’ ‘유행’과 거리를 둔 것들뿐이었다. 근무 첫날 1층 건물 유리문 앞에서 한참을 서있었다. 하루 이틀도 견디지 못한다면. 이런 생각이 들자 도저히 문을 열 수 없었다.
아프다고 할까, 갑자기 집에 일이 생겼다고 할까. 그러다 건물 맞은편 마치 쌍둥이처럼 서있는 낡은 빨간 벽돌 건물 1층에 낯선 도시에서 길 잃은 여행객 같은 에스프레소 바가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문을 열고 들어가니 투박한 나무 벽과 무심하게 배치된 창고 철제 선반을 연상하게 하는 테이블과 의자의 힙한 인테리어가 실망과 불안으로 뒤섞인 마음을 조금은 가라앉혔다. 주문한 더블 에스프레소에 함께 나온 비정제 각설탕 2개를 넣은 후 에스프레소 잔을 한참 동안 뚫어져라 쳐다봤다. 각설탕이 부서지면서 형체를 잃어갈 때쯤 미처 녹지 않은 설탕과 함께 에스프레소를 마시면서 상담소를 바라보니 만감이 교차했다. 카페 안에는 바리스트와 나를 빼면 아무도 없었고, 내 입안에서 설탕 부서지는 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이 소리에 마치 최면에 걸리듯 지난 몇 달간 나의 불안한 일상이 거리를 배경으로 빠르게 펼쳐졌다.
회사를 그만둔 후 공부한다고 3년, 시험 준비한다고 1년, 총 4년을 지내다 보니 퇴직금은 이미 벌써 바닥이 났고 엄마 돈까지 축내고 있어서 취업을 서둘러야 했지만, 새로운 삶, 인생 2막을 또다시 쫓기듯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이러저리 인터넷을 한참 뒤적이다 ‘숨과 쉼’에서 시선이 멈췄다. 무엇보다 시적 언어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숨 막히는 일상을, 쉼이 허용되는 삶으로’ 나른하기까지 한 정말 기막힌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작명을 한 소장이라면 숨 막히게 살아오다 새로운 출발을 시작하는 나를 이끌어 줄 수 있을 듯했다. 그런데 막상 마주한 현실은 감각적인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듯했다.
이런 곳에 더구나 저녁 시간에 사람들이 있기나 할까. 이곳을 처음 찾은 12월 24일 오후 1시, 한낮에도 근처에서 사람을 보기 어려웠다. 마음을 다잡고 걸어 올라가 상담소 문을 여니 책상, 의자는 물론 벽까지 나무 질감을 인테리어가 한눈에 들어왔다. 상담실은 딱 두 개, 각각 문에 ‘숨’ ‘쉼’ 팻말과 웃음 짓고 있는 눈의 쉿 이모티콘이 새겨진 나무 팻말이 걸려있었다. 나는 인사말을 하려다 말고 고개만 까딱한 후 입 모양으로만 ‘면접’이라고 신호를 보낸 후 눈으로 소장이 있을 만한 곳을 찾았다. 사무실 안에는 남자 1명뿐 이었다. 그는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책상에서 분주히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고, 소파에 앉으라는 듯 손으로 소파를 가리켰다.
소파에 앉자마자 문이 열리더니 짙은 갈색 치노 팬츠에 그레이와 그린 체크 무늬 셔츠, 그레이 패딩 베스트 위에 팬츠와 같은 컬러의 아웃포켓 캐주얼 재킷을 입은 이제 막 노년에 접어든 듯한 남자가 들어왔다. 희끗희끗한 은발 헤어가 아웃도어 스타일의 세미 캐주얼 룩과 어우러져 부드러우면서 세련된 느낌을 풍겼다. 편안한 인상이지만 이곳에서 낯선 이방인인 나를 보며 짧게 탄성인 듯 인사인 듯 던진 “아”라는 말을 이루는 목소리 톤과 표정에서 날카로움이 읽혔다. 그의 외적인 모든 것들은 상담소와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한눈에도 그가 ‘숨과 쉼’ 작명가이면서 가구는 물론 팻말 하나하나까지 손수 챙긴 인테리어 디자이너이기도 한 이곳의 수장인 소장임을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를 보자마자 소파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소리 없이 묵례로만 인사했다. 낮은 목소리로 잠시만 앉아서 기다리라며 창가 쪽 벽 한 면 전체가 붙박이장이 있는 곳으로 간 그가 문을 열자, 책이 빼곡하게 꽂힌 책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손에 들고 온 종이 쇼핑백에서 책을 꺼내 책장에 꽂았다. 나의 시선은 어느새 그의 하얀 머리 뒤통수를 따라 움직였다.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이런 곳에 있으면 누구와도 편안하고 편견 없이 대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이라면 나도 쉼과 쉼을 온전히 평화롭게 누릴 수 있을 듯했다. 이곳에서 나의 일상이 늘 평화로울 수는 없겠지만, 본의 아니게 누군가를 휘두르기도, 누군가에게 휘둘리기도 하겠지만 빠르게 제자리를 찾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잃지 마세요. 나를 잃어버리면 그 누구와도 진실한 대화를 할 수 없어요. 이 일은 나를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당신도 나도 자신을 찾기 위해 여기 있고.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결코 헛되지는 않을 겁니다.”
면접에서 소장이 내게 한 이 짧은 몇 문장의 말은 결코 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