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2월 24일 19:00
블라인드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볕에 몸이 노곤해졌다. 6시 30분, 소란스럽게 주고받던 눈빛이 모두 빠져나가고 상담소에는 이제 햇빛만 남았다. 세상 모든 빛을 얼려버릴 기세로 한동안 계속된 서슬 퍼런 추위가 잠시 동면에 들어갔는지 갑작스럽게 찾아온 봄기운이 어색하면서도 조금이라도 더 붙들어 두고 싶다. 겨울 속 봄 햇살, 겨울에 잠시 다녀가는 봄은 순간이라서 더욱더 마음 졸이게 한다.
요새 머릿속은 잔뜩 어질러진 엄마 방처럼 뒤죽박죽이다. 상담소를 찾는 이들의 사연을 모아둔 파일은 컴퓨터에 가지런히 정리돼 있지만, 내 마음은 난지도 같은 엄마의 방 어딘가를 헤맨다. 집에서 나오기 직전 약을 먹겠다며 약상자를 헤집어 놓은 엄마에게 잔뜩 독이나 잔소리를 쏟아부었다. 상담소를 찾는 이들에게 나는 “무엇이 당신을 그렇게 화나게 했나요?”라고 차분한 목소리로 묻지만, 정작 나 자신에게는 물어보지 못하고 화와 죄책감을 무한반복 한다. 시간을 어지러이 헤매다 순간 나는 현재로 되돌아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고개를 뒤로 젖혀 기지개를 켠 후 눈을 감고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으면서 창으로 밀려 들어오는 햇살에 오감을 집중했다. 상담소 밤의 정적은 늘 그렇듯 나를 빠르게 진정하게 한다.
동료가 컴퓨터 화면에 남겨두고 간 평평하고 촉촉한 흰자에 동그랗게 봉긋 솟은 말랑말랑한 노른자의 계란 프라이 사진과 ‘삶은 계란이다.’라는 문구를 보고 웃음이 터져 금요일 밤 상담소의 적막이 깨지고 사고의 난지도를 빠져나왔다. 삶이 정말 사진 속 완전하게 분리된 흰자와 노른자처럼 선명할 수 있을까. 나는 늘 사진처럼 기름진 수분을 잔뜩 머금은 채 살아있는 흰자와 노른자가 각자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완벽하게 질서정연한 계란 프라이를 만들려고 심혈을 기울이지만, 결과물은 글쎄. 오늘은 비교적 완벽했다. 나는 막이 살아있는 노른자를 숟가락으로 떠서 말끔하게 먹어 치우고 나왔다. 오늘 밤은 점심 겸 저녁으로 먹은 계란 프라이만큼 완벽할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7시가 채 10분도 남지 않았다. 나는 자유분방한 시간여행에서 빠져나와 창가로 들어오는 어둑어둑한 기운이 등가를 가볍게 때리는 느낌을 받아들이며 눈을 감았다. 지난주 이날 상담소를 찾은 이들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고 그들의 표정을 떠올렸다. 오늘 예정된 일정을 확인하고 나니 7시를 향해 빠르게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 6시 55분, 바닥을 꾹꾹 누르는 발소리가 가까워지더니 문이 열리고 찬바람과 함께 여느 때처럼 붉게 상기된 볼과 앙다문 입술의 X가 들어왔다. X는 추위가 한 풀 꺽인 2월에 들어서면서 내내 같은 짙은 블랙 경량 패딩점퍼를 고수하고 있다. 오늘은 여기에 블랙 팬츠를 입고 블랙 운동화를 신은 옷차림으로 나타났다. 오늘도 여지없이 지퍼는 목까지 완전히 올려 입고, 블랙 마스크까지 써 다크 블랙룩으로 완벽하게 중무장했다.
X는 나를 보자마자 고개만 가볍게 까딱하고 문 옆에 있는 정수기에서 컵에 차가운 물을 따라 '숨' 팻말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오늘의 저 결연함은 무엇 때문일까. 늘 비슷해 보이는 표정은 각기 다른 사연이 만들어낸 울긋불긋한 울분을 감추고 있다. 그래서일까. 어느 순간부터 문을 힘차게 열고 들어오는 모습이 영화 오프닝 장면처럼 여겨졌다.
지난주 정리해 둔 일지를 꺼내 오늘 진행해야 할 내용을 천천히 읽었다. ‘X의 분노 이유 탐색’ 주제 아래 현명하다는 엄마가 실은 냉장고 엄마가 아닐까, 아빠에 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은 X의 아빠를 탐색해야 하지 않을까, 무남독녀로 부모의 보호 속에 자라 엄마 외의 사람과 관계를 맺지 못한 X의 분노는 미숙한 사회화 때문일까, 세 개의 가설을 속으로 되뇌었다. 이렇게 늘 마음을 다잡지만, 이상하게 X와의 대화는 의도와 다르게 흘러간다. 조금씩 X를 알아가고 적응되고 있어 오늘은 그가 거부하는 과거로 돌아가 볼 수 있을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상담실 문을 열었다.
X는 지난주 엄마가 얼마나 부당한 요구를 하는지 말하고 자신은 어려서부터 늘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다면서 분노했다. 말하면서 점점 X의 목소리는 커졌고 얼굴은 점점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모두 퇴근한 걸 확인했는데도 밖에 누가 있지나 않을까, 혹시 옆 사무실이 야근 중이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스쳐 지나가 움찔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열 번째 대화였지만 X는 일곱 빛깔 무지개처럼 늘 새로운 색의 울분을 들고 내 앞에 앉았다. 그는 열 번째 울분을 쏟아내고 늘 그렇듯 “선생님”이라고 운을 뗀 후 깊고 큰 소리로 한숨을 내쉬면서 “제가 이러려고 했던 건 아니고요.”라고 가까스로 한 문장을 말한 뒤 또다시 큰 소리로 한숨을 쉰 다음 “정말 제가 너무 힘들어서.”라는 말과 함께 입을 닫았다.
문을 열자마자 벌컥벌컥 물을 마시고 있는 그의 결연한 모습에서 오늘 울분의 색은 붉은빛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제가 정말. 잠시만요.”말을 꺼내려다 말고 X는 핸드폰을 꺼내 뭔가 한참을 뒤적이더니 나에게 사진 한 장을 들이밀었다. 종이 뭉치들이 있는 3평 남짓한 사무 공간을 찍은 사진이었다. 각각 30cm 높이로 균일하게 쌓인 종이들이 하얀 비닐 끈으로 묶여 사무실 한쪽 벽을 따라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이게 제가 오늘 오후 내내 한 일이거든요. 사무실에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말씀드렸죠. 제가 요새 다이어트 때문에 선결재해 매일매일 점심시간에 맞춰 배달되는 샐러드 도식락을 먹고 있거든요. 제 나름대로 그 시간이 제 힐링 시간이란 말이죠.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서 음악을 틀어놓고. 전 귀에 이어폰 꽂는 것보다 그냥 음악 듣는 걸 좋아해요. 아시죠. 그런데 갑자기 누가 문을 그냥 팍하고 열더니 제 뒤통수에 대고 퇴근 전까지 창고 싹 비워, 그러잖아요. 그런데 생각해 보세요. 그건 제 시간이란 말이죠. 제가 누구한테 지시받아서 기분이 상해야 하는 시간이 아니라, 온전히 제 시간이요. 제가 왜 제 시간에 수치감을 느껴야 하죠. 오늘 샐러드 도시락은 정말 특별했단 말이에요. 제가 좋아하는 구운 소고기가 올려져있는 한우 소고기 자연산 버섯 샐러드였는데. 그리고 건더기 없는 유기농 오렌지 착즙 주스까지. 제가 이 샐러드 업체를 고르는 데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지 아시죠. 아 제가 말씀드리지 않았군요. 제가 인터넷을 검색하다 발견했는데 OOO 아시죠. 그 인플루언서가 광고하는데 사실 제 롤모델이거든요. 그런데 맛도 정말 끝내줬어요. 선생님, 제가 선생님께도 소개시켜 드릴게요. 꼭 드셔보세요.” X는 오늘도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3분 이상 독백하듯 자기 말을 쏟아내다 이야기를 옆길로 틀었다.
“오랜만에 맛있는 점심을 먹으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고 있었는데 누군가 그 시간을 방해했군요. 수치심까지 들 정도로 점심시간을 방해한 사람이 누구였죠?” 나는 이야기를 방향을 다시 원위치로 돌려놓았다.
“아. 참. 예. 부장이었어요. 얼마 전에 경력직으로 새로온 사람인데, 매사 그런 식이예요. 하루 종일 머리카락도 안 보이다 좀 쉴라치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나 일을 시킨다니까요. 그게 말이 돼요. 점심시간에요. 제가 그놈, 죄송해요. 그 부장 때문에 CCTV 감지 장치까지 샀다니까요. 혹시 제 책상 주변 어디 설치돼 있지 않은지 확인하려고요. 제가 오죽했으면 그랬겠어요. 근데 그거 아세요. 요새는 핸드폰에 본인 모르게 감시 프로그램이 깔리기도 한다는데 제 폰도 한번 확인해 봐야겠어요.” 그는 말을 하면서 얼굴은 나에게 고정한 채 눈동자를 움직여 가며 계속 상담실을 두리번거리면서 자신의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심리검사에서 의심 많은 편집증 성향이 나왔는데도 처음에는 X의 이런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고 무섭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은 평정심을 가지고 X를 대할 수 있게 됐다. 이제는 그의 의심과 불안의 기저에 무엇이 있는지 찾아내려 애쓰고 있다. “수치심에 대해 다시 말해볼까요? 수치심을 느낀 이유가 뭘까요? 당신만의 힐링 시간을 방해받았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당신이 좋아하는 점심 메뉴를 충분히 즐기지 못했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보여주신 사진에 수치심을 일으킨 또 다른 이유가 있을까요?” 나는 더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방만해지는 X의 사고를 좁혀야 할 시점이 됐고 수치심의 감정을 느낀 그 시점으로 그를 되돌려 놓았다.
“선생님, 제게 왜 그러세요. 제가 선생님에게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죠.” X는 갑자기 분노의 화살을 나에게 돌렸다. 나는 놀란 심장을 진정하려 애쓰면서 침착하게 되물었다 “제 말이 당신의 기분을 상하게 했나요?” 정서적 동요를 담지 않으려 노력한 내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쉬지 않고 말을 쏟아내던 X가 핸드폰으로 고개를 떨어뜨린 채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30초쯤 지나서 그가 다시 입을 뗐다.
“전요. 시킨 일은 어떻게든 다 하거든요. 그건 아시죠. 그런데 그 부장이 치우라는 방은 정말 엉망이었어요. 탕비실로 쓰다 폐기해야 서류가 많아지면서 계속 서류를 아무렇게나 쌓아둔 곳이라 혼자서 그걸 퇴근 전까지 치운다는 건 말이 안 되거든요. 그런데요, 전 했다고요. 점심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저는 그 방으로 들어가서 먼지 쌓인 서류뭉치들을 일정 크기로 분류하고, 왜냐하면 폐기하기 좋게 해야 하거든요. 종이 한 장 한 장을 다 일정한 크기로 묶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선생님은 모르실 거예요. 더구나 종이를 묶고 옮기고 하는 작업에는 정말 힘이 필요하다고요. 그런데 아무도 저를 도와주지 않았어요. 더구나 그 사무실은 유리문이어서 밖에서 제가 작업하는 게 다 보인다고요. 상상이 되세요. 저는 열심히 막노동을 하는데 밖은 너무 평화로운 거예요. 저를 도와주지 않아도 돼요. 그런데 최소한 저를 비웃지는 말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동료가 열심히 일하는 당신을 비웃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죠? 사무실 문이 열려있어서 밖에서 동료들이 말하는 소리를 들었나요, 아니면 나중에 누군가에게 전해 들었나요?” 나는 또다시 말의 방향을 다시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역시 잘못된 판단이었다. X의 표정이 다시 변했고 난 나의 판단이 틀렸음을 알았다.
“선생님, 제 말이 그게 아니잖아요. 모르시겠어요. 그들이 나를 비웃었다는 걸. 그건 사실이라고요.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요. 모두가 저를 부당하게 대한다고요. 전 늘 그런 대우를 받아왔다고요. 선생님도 지금 그러시잖아요. 오늘은 더 못하겠어요.”
X는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가방에서 포스트잇을 꺼내 내가 대화 도중 테이블에 올려놓은 볼펜으로 무엇인가를 적은 후 반으로 접어서 내 파일에 올려놓은 후 상담실을 나갔다. 내게 말할 틈도 주지 않은 채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졌다. 그가 남긴 포스트잇에는 ‘상담 종결’이라고 씌어있었다.
시계를 보니 7시 15분이었다. 불과 15분 만에 벌어진 일이라고 하기에는 200분짜리 상업영화 한 편을 본 느낌이었다. 난 넋이 나간 듯 멍한 상태로 앉아 열린 상담실 문을 한참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