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감귤의 추억

종이를 펼쳐보려는데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by 다뜨베이더

내가 지난 여름에 원고 집필을 위해 머물렀던 제주도의 게스트하우스는 여러모로 나에게 좋은 작업환경을 제공해주었다. 정원에는 갖가지 종류의 허브들이 자라고 있어서, 원한다면 언제든 허브차를 마실 수도 있었고, 또 언제든 상큼한 제주감귤을 맛볼 수도 있었다.

주인 몰래 나무에서 직접 따먹는 제주감귤은 대형마트나 백화점에서 파는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맛이었다.


내 옆방에는 서울에서 내려온 미모의 여대생이 혼자 머물고 있었다. 아직까지 대화는 한 번도 나눠본 적이 없었으나 짐작컨대 그녀는 미대생임에 틀림이 없어 보였다. 늘 스케치북을 옆에 끼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다.


'혹시 나를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다가 그림을 그리던 그녀와 눈이 마주칠 때면, 실없이 혼자만의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후, 나는 원고 작업을 매우 흡족하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물론 좋은 작업환경이 한몫을 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마감일까지는 아직 꽤 시간이 남아있었으므로, - 이것은 결코 흔치 않은 일이다. -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여유로운 기분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이참에 그동안 자주 만날 수 없었던 지인들을 만나 술이라도 한 잔 마실 생각이었다.


이튿날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짐을 챙기고 있었다. 이미 큰 짐들은 택배로 보내 놓은 상황이라 작은 배낭 하나만 들쳐 메면 모든 정리가 끝나는 셈이다.

나는 일단 부산으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동안 머물던 방을 한 번 둘러보고 나는 혼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막 떠나려는데, 누군가가 방문을 노크했다.

문을 열어보니 놀랍게도 옆 방의 여대생이 수줍게 서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종이 한 장을 건네고는 다시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설마, 진짜로 나를 그린 거였나?'


종이를 펼쳐보려는데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런데 내 기대와 달리 종이에 그림은 없었다. 대신 짧은 메모만이 내게 현실감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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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옆 방까지 다 들리도록 소리쳤다.

"'않'이 아니라 '안'이야!"

그녀가 방문을 5cm쯤 열고, 문틈으로 매정하게 소리쳤다.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그녀는 게스트하우스 주인의 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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