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 부서의 L팀장님(55)은 이제 퇴직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다른 팀장님들과는 달리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그 이유는 회사 인트라넷에서 L 팀장님의 자기소개 '주소란'을 보면 알 수 있다.
서초구 반포동 랜드마크 아파트 ㅇㅇ동 ㅇㅇ호
2010년대 초반까지 L 팀장님은 서울의 한 외곽 도시에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업무상 이유로 재테크 잘하기로 소문난 사업가 한 분과 친분을 맺게 되었는데, 그 분이 L 팀장님에게 사는 곳을 묻더니 이렇게 한 마디를 툭 던진 것이다.
아니, 팀장님 왜 거기 살고 계세요~ 젊은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곳으로 가야죠.
L 팀장님은 그 분의 말을 예사롭게 듣지 않았고, 이듬해 대출을 껴서 강남으로 이사를 감행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지역간 집값 격차가 그리 크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L 팀장님이 산 강남 재건축 아파트는 수십억에 달하게 되었고, L 팀장님은 우리만 보면 입버릇처럼 말한다.
집은 자기가 좋아하는 곳 말고, 남들, 특히 젊은이가 좋아하는 곳을 사야 돼.
돈 공부를 시작하기 전 내가 가졌던 가장 큰 착각은, 집값에 어떤 합리적인 가격이 존재한다는 생각이었다.
지금 집값이 말이 돼? 기다려봐...곧 떨어질거야.
얼마나 많이 듣고, 또 했던 말인가? 그러나 나를 포함해, 집값 하락을 바라는 이들을 비웃기나 하듯 집값은 계속 치솟았고, 집값 양극화는 나날이 심해지고 있다. 집값 거품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인가? <돈의 심리학>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말도 안되어 보이는 가격이 다른 사람에게는 합리적일 수 있다.
투자자들 저마다 서로 다른 '목표'와 '시간 계획'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 돈의 심리학
지난 상승 모멘텀에서 중요했던 것은 '다음달 아파트값이 이번달보다 오르리라‘는 사실이었고, 이러한 기대를 이용해 돈을 벌 기회가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홀로 장기투자자의 입장을 견지하며 가만히 앉아서 지켜보기만 한 것은 지금 생각해보면 솔직히 아쉬움이 남는 선택이었다. <부의 인문학>에도 비슷한 대목이 나온다.
내가 소로스에게서 배운 것 중에 하나는 내 판단과 상관 없이 다른 투자자의 착각을 이용하여 수익을 내는 것이 더 현명한 투자법이라는 것이다...소로스는 자신은 의심하더라도 다수 투자자들이 확신하여 거품이 커질 수 있는 투자 대상에 기꺼이 투자하여 돈을 벌었다. - 부의 인문학
요컨대, 남들이 뭘 하는지, 그리고 그들이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 아는 것은 거시경제학 지식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이다.
흔히 재테크 능력을 ‘소프트 스킬(soft skill)’이라고 하던데, 재테크 성공을 위해서는 지식의 많고 적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소통, 공감 능력이고, 게임에 참여하는 다른 이들에 대한 이해가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