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하루라도 빨리 대면하고 싶어 하는 그 여자에게 감사라도 해야 할까.
만남의 마음을 정하고 나니 회사 일도 한결 순조롭게 돌아간다.
복잡한 생각 회로를 지나 새로운 단순함을 만나니 원활해진다.
정신을 바짝 챙겨 혹시나 생길 수정안들을 미리 처리해 놓아 효율이 좋아졌다.
본디 인간은 긴장과 압박 속에 자기 효능이 따라와 주는 것일 테니 그 효과를 이럴 때 써먹게 될 줄 몰랐다.
오늘은 금요일.
굳이 내게 가까이 와 준다는 그 여자의 의견에 토를 달지 않았다.
복잡한 도심 속 프랜차이즈 카페로 정해 10분 전 도착하여 혼자 앉아있는 여자를 찾아봤지만
둘러봐도 없었다.
화장실로 직행하여 자연스럽게 거울을 들여다봤다. 아주 자세히.
옷매무새라도 챙겨 보고 싶었다.
얼굴에 먼지라도 묻거나 흐트러진 메이크업을 보여주기도 싫다.
2층 조용한 곳에 앉자마자 문자가 온다.
"1층에 있어요. 도착하시면 잘 보이는 자리예요."
바로 내려가서 다시 둘러보니 한 여자가 앉아있다.
방금 도착 한 건지 아까 놓쳤는지 모르겠다.
"안녕하세요. "
짤막한 목례와 함께 자리에 앉으려다 음료 주문을 위해 다시 일어섰다.
"제가 주문할게요. 어떤 게 좋으신지"
침착한 편인 그 여자는 매너를 보여주려나보다.
이제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친절하다.
깡마른 체형.
키도 나보다 훨씬 작아 보인다.
유독 좁은 어깨와 긴 목선이 날카로운 이미지를 돋보이게 한다.
까칠하고 건조해 보이는 얼굴과 피곤함에 절여진 채 또렷해 보이지 않은 눈동자엔 힘이 없다.
잠을 못 잔 듯 보이기도 하고 원래 그런 얼굴인가도 싶다.
"아 제 건 제가 사도 괜찮습니다."
그 여자가 사는 걸 마시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싶었다.
밀크티와 라테를 주문하고 진동벨을 전달받는 사이 그 여자는 내 모습을 훑어본다.
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살피느라 날 보는 모습이 잘 보였다.
아마도 본인의 그 어딘가를 닮았을지 살피는 것 같다.
아니면 우진 씨가 선물했을 법한 아이템을 찾는 것 같다.
그런 유치한 생각을 그런 순간에 찾다니 다소 어이가 없다.
"억지로 자리를 만들게 돼서 죄송합니다."
파악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걸로 봐서는 지금은 꽤 정상인의 모습이다.
"제게 하실 말씀이 궁금한데요"
어색한 분위기도 싫고 어서 들려주려는 내용을 급히 듣고 일어나고 싶었다.
이 사람과의 관계성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본능적인 거부감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
불편함과 허무함도 느껴지는 마주함이라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런 경험을 한다는 것에 회의감이 든다.
"어렸을 때부터 그러니까 저흰 중학교 동창이에요. 알고 계실 테지만요."
표정이나 말투로 보아 본인들의 서사를 내가 알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전혀 모르고 있는 듯한 얼굴을 하고 싶지 않아 미동 없이 들었다.
방어기제인가.
난 우진 씨와 당신의 이야기보다 짧겠지만 가볍거나 부족하지 않은 사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그게 맞을 거다.
지고 싶지 않은 심리일까. 내 존재 자체가 두 사람의 돈독한 역사와 견주어 밀리지 않는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 여자는 이내 작정한 듯 자세를 고쳐 잡더니 쏟아내기 시작한다.
"동창회에서 우진 씨를 다시 만나게 돼서 오랜 기간 서로 사랑하고, 큰 사랑을 받으며 결혼까지 가는 과정은 자연스러웠어요. 양가 부모님과 형제자매들까지 왕래하며 지냈고요. 그 시간이 무려 5년이 넘죠.
그런데 어느 날 갑작스럽게 우진 씨가 이별을 고하더군요.
남들처럼 오래된 사이라서 소원해졌거나 서로 바빠서 시들해진 적 한번 없는 사이였어요.
우진 씨는 유독 다정하고 자상하기도 하지만 저흰 특별히 더 그런 사이였어요.
저희를 잘 아는 사람들은 저에게 부럽다는 말을 자주 했으니까요.
저와의 헤어짐은 쉽지 않은 결정이란 걸 우진 씨를 너무나 잘 알기에 바로 알았어요.
다른 여자가 생겼을 것 같았고 제 예상이 맞더군요.
유지원 씨의 존재를 알게 된 건 아주 일찍이었어요."
제가 궁금한 건, 지원 씨는 우진 씨가 결혼할 사람이 있다는 걸 알고 계셨나요?
그렇지만 아무 상관없이 개의치 않고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건가요?
불편하실 질문이지만 저에겐 아주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여태 그저 이런 확인이 하고 싶었나 보다.
한숨이 나오는 걸 애써 누르며 말했다.
"저는 우진 씨와 우연히, 아니 돌이켜보자면 저희 나이가 20대 초반이었네요.
그때 우진 씨와 저를 아는 친구 소개로 맺어진 사이였어요.
그 시절 짧은 연애와 함께 제가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원 진학을 하는 바람에 헤어지게 되었고요.
그 후로 시간이 한참 흘렀고 우연히 다시 재회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게 전부예요. 무언가 잘못된 만남이라고 확신하시는 것 같은데, 그런 일 없습니다."
이 정도 설명을 하는 것도 좀 우습네요. 불필요한 일 같기도 하고요."
절묘한 타이밍인가.
그 여자 핸드폰이 울린다. 받지는 않고 메시지를 남기는 모습에 어쩌면 우진 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친다. 예감이 맞았는지 이번엔 내 핸드폰이 울린다.
"받으세요, 우진 씨인 것 같은데."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지친 표정을 짓는다.
"저랑 함께 있다는 말씀만 피해 주시면 돼요. 미리 말씀드렸지만요."
원하는 건 뭐든지 다 하는 성격인 건지. 부탁으로 들리지 않는 알 수 없는 말투가 거슬린다.
"다른 하실 말씀이 있다면 다음에 하시죠. 오늘은 그만 일어나고 싶습니다."
우진 씨의 부재중 전화와 함께 고단함이 밀려들었다.
메시지 알림이 울리지만 읽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