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거리
시간의 거리
공간의 거리
타인과의 거리
자신과의 거리
낯선 여행지의 가장 익숙한 장소가 된 게스트하우스에서 내가 찾은 건 이 모든 거리였다.
파도를 찾아 한국에서 필리핀으로 필리핀에서 다시 하와이까지 날아온 프로서퍼가 비행한 길이, 정보와 팁으로 가득한 하와이 여행책을 만든 편집자가 퇴사 후 진짜 하와이를 찾아오기까지의 시간, 이대 나온 여자에서 백발의 할머니가 되어 머리를 보라색으로 물들인 이유,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기에 한국에서 도망치듯 훌쩍 떠나온 나의 속마음까지.
계획과 준비 없이 떠나는 하와이였지만 딱 한 가지 준비가 필요했다. 그것은 바로 숙소 예약. 나는 최저 예산에 걸맞게 호텔을 제외하고, 괜찮은 게스트하우스를 우선순위로 찾아보기 시작했다. 여행 까페 후기들을 참고해 선택한 곳은 호놀룰루 게스트하우스. 선택의 이유는 깨끗하고 저렴하다는 후기 때문. 와이키키와는 조금 떨어져 있지만 ‘까짓것 튼튼한 다리로 걸으면 되겠지’ 하고 곧바로 2주 예약을 했다.
도미토리 룸에는 1인용 싱글 침대 6개가 나란히 마주 보고 놓여 있었다. 침대의 주인들은 머무는 시간도 떠나온 장소도 모두 달랐다. 하지만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금세 친밀해졌다. 도미토리는 마치 하와이 여행 정보의 플랫폼 같았다. 먼저 온 사람들은 나중에 도착한 사람들에게 추천 여행지부터 직접 경험한 마트 물가까지 여러 가지 정보를 알려준다. 게스트하우스에서 가까운 마트, 버스정류장의 위치, 여행책자에는 안 나왔지만 꼭 가볼만한 장소, 동네 로컬들이 가는 숨겨진 맛집 등.
정보를 알려준 침대의 주인이 떠나면, 새로운 침대의 주인이 도착한다. 그러면 마치 구전동화처럼 게스트들의 입에서 입으로 온갖 정보는 다시 전해진다. 우리는 하와이의 게스트이지만, 또 다른 게스트를 안내하는 가이드가 되었다.
혼자 온 여행자들은 홀로 시간을 보내는데 익숙하다. 하지만 때로는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시간이 맞으면 돈키호테에(일본계 체인 슈퍼마켓) 가서 장을 함께 보고 저녁을 만들어 먹는다. 유명한 스노클링 포인트인 하나우마베이도 외롭지 않게 다녀올 수 있다. 세일 천국인 와이켈레 아울렛에 가서 득템의 행운을 함께 하기도 한다. 다음 날 아침 떠나는 사람이 있으면 숨겨진 쌀국수 맛집을 찾아 외식을 한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하와이에서 처음 만난 사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다. 한국에서 알던 친구들이 함께 여행 온 것처럼 우리는 서서히 일행이 되어갔다.
물론 같은 공간을 여러 사람이 쓰다 보니 세상은 넓고 나와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걸 느끼기도 한다. 밤 12시에도 쇼핑백을 부스럭거리면서도 미안하단 말 한마디 없이 짐을 싸는 사람.(다음 날 아침 10시가 넘도록 일어나지 않고 잠을 자는 그녀는 꼭 그 시간에 짐을 싸야 했을까?) 부모님의 이민으로 시민권을 받았기 때문에 "아임 캐네디언" 하고 쿨하게 영어로만 말하는 사람.(심지어 한국어를 잘하면서도 한국은 너희 나라라고 선을 긋는 심보는 무엇일까?)
게스트하우스에선 저녁이면 소소한 파티가 열렸다. 음식 솜씨도 좋고, 손도 큰 집주인 쥬디언니가 손님들과 함께 하는 자리를 마련하기 때문. 두툼한 스테이크에서부터 뚝딱하고 나오는 두부김치, 한국에서도 먹어 본 적 없는 번데기탕까지 차려진다. 넉넉한 안주만큼 떨어지지 않는 술, 그리고 더해지는 이야기. 맥주 한 잔이면 누구나 마음이 열렸다. 어쩌면 친한 친구들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속내부터 저마다 자신들이 지나온 삶과 앞으로의 이야기까지. 게스트들의 이야기는 밤이 깊어질수록 깊이를 더해갔다.
게스트하우스 장기 숙박객이었던 나는 새로운 게스트를 맞이하고 안내하는 역할을 맡았다. 새로운 게스트가 온다는 건, 누군가 다시 떠난다는 의미다. 부산하게 짐을 싸는 모습을 보고, 놓고 가는 물건이 없는지 묻기도 한다. 그리고 2층이었던 게스트하우스에서 1층까지 함께 트렁크를 내려준다. 떠나는 택시를 향해 씩씩하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하지만 게스트들이 떠나고 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가라앉아 버렸다. 그리고 조용히 기도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정든 게스트들의 추억을 위해.
당신은 하와이의 스페셜게스트였다고
<하와이 로망일기, 와이키키 다이어리>
평범한 대한민국 30대가 사표를 던지고 무작정 떠났던 하와이 한량 생활기입니다.
마음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있는 그대로의 하와이를 만나고 돌아온 85일간의 와이키키 다이어리가
궁금하시다면 링크를 눌러주세요! Alo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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