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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티 Sep 12. 2021

이 맛에 유럽한다

네덜란드 농장 체류기 3

네덜란드 농장 체류기 3

내가 본 한국 농가의 모습은

끝없이 펼쳐진 비닐하우스 

구석엔 똥개가 목줄에 묶여 남은 잔반을 먹고 있고 

새를 쫓기 위해 CD를 비닐끈에 묶어 밭 가장자리에 둘러놓고  

그 옆엔 비료포대가 굴러다닌다.  

밭에는 잡초가 자라지 못하게 검은 비닐을 뒤집어 씌워놓고

근처엔 쥐와 산짐승을 잡기 위한 올무와 덫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년간 각종 여행 다큐를 보며 다져진 나의 유럽 판타지는 아주 견고해서

유럽은 달라! 유럽의 시골도 달라!라는 생각에 쉽게 농장행을 결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끝내 마주한 유럽의 농장은 과연 유럽스러웠다.

내가 머무는 곳은 소규모로 운영하는 여유로운 가족 농장이라 

최고 효율로 최대 생산량을 뽑아내야 하는 생계의 처절함이 덜해서 

미적인 면을 포기하지 않고 농장을 꾸려나갈 수 있었던 것 같다. 


내게 아이패드가 있었더라면 더 잘 그릴 수 있었을 텐데


농장은 대충 이렇게 생겼다.

농장내 유일하게 와이파이가 되는 공용 거실 바로 앞에는 벽돌로 만든 닭장이 있다. 

닭들은 밤에는 가둬놓지만 아침에는 풀어놔서 근처를 어슬렁거리며 벌레도 먹고 산책도 한다.

흔히 보는 닭같이 생긴 닭이 많았지만 그 외에도 항상 대여섯 마리가 같이 다니는 검은 닭 무리도 있었고 

반려닭? 같은 작고 털이 화려한 닭들도 있었다. 

나는 종종 닭들과 사과를 나눠 먹었는데 어느 날은 줄까 말까 하면서 사과로 약 올렸더니 

그날 저녁 내가 밥 먹고 있는 틈을 타 부리로 내 손을 쪼아버렸다. 

닭은 복수를 한다.


닭장 옆 풀밭에는 거위 가족이 살고 있다.

새끼들이 막 부화한 참이라 안 그래도 포악한 성격이 극에 달해 

우리가 거위 새끼를 보고 있으면 날개를 퍼덕이며 미친 듯이 울면서 우리를 위협했다. 

그렇지만 우리는 꿋꿋하게 벽 뒤에 숨어서 새끼 거위를 매일 훔쳐보었다.


비교적 온화한 닭들과 눈으로 욕하고 있는 거위



조류하우스를 지나 덩굴로 뒤덮인 나무 문을 지나면 본격적인 작물 재배 구역이 나온다.

비닐하우스 두채 안에서는 과일을 키우는데

한쪽에는 포도, 그 옆에는 토마토, 그 옆에는 딸기가 있는 식이었다.


비닐하우스를 지나면 여러 구역으로 나눠진 작은 텃밭이 있는데 여기는 각종 채소들이 자란다.

상추 같은 샐러드 채소를 비롯해 아스파라거스, 콩, 오이, 호박, 대마 등등이 있고

텃밭보다 조금 더 큰 밭에 가면 당근이나 비트 같은 뿌리채소가 있다.


이 농장은 하나에 올인하기 보다 여러 가지를 조금씩 키우는 다품종 소량생산 농장이었다.

마트 같은 곳에 대량으로 납품하는 것이 아니라 

파머스 마켓에 나가거나 동네 레스토랑에 조금씩 팔면서 수익을 내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이점마저 완벽하게 유럽스러웠다.



음 유럽 냄새~



그리고 농장의 다른 쪽 절반은 상대적으로 방치되어 있는 구역으로

탁한 물의 연못 하나 

미스터리 서클같이 생긴 식물 미로 

노란 꽃이 자라는 구역

그리고 작은 과수원으로 사과나무가 있었는데 자라면 자라고 아님말고 식으로 방치하는 것 같았다. 


마지막으로 텃밭지대를 넘어 차도를 건너면 이 농장의 메인 작물인 감자와 마늘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끝이 안 보이는 정도는 아니고 백 미터 정도의 밭고랑이 열몇 개 정도로

적당하게 일하고 적당하게 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 크기였다.




상주 노동자들이 머무는 트레일러는 농장 곳곳에 숨어있었는데 

내 트레일러는 공용 거실에서 가장 먼 채소 텃밭의 끝자락에 있었다.

채소밭을 걷는 대신 농장 한쪽에 마카다미아 나무가 있는 작은 숲길을 지나서 공용 거실로 갈 수 있었는데 

날이 좋은 날에 나무 사이로 햇빛이 쏟아지는 풍경이 정말 예뻤다.


나의 프라이빗 산책길


이국적인 작물과 이국적인 환경의 힘도 있었지만

홀리워킹데이라고 절규하는 호주나 뉴질랜드 워홀러들의 지옥 체험기와 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우선 우리가 돈을 받는 노동자가 아니었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처절하게 농사를 짓는 농가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마당에선 닭들이 라벤더 사이를 걸어 다니며 벌레를 쪼아먹고

딸기 옆에서 잡초를 뽑고 있을 때 고양이가 옆에 와서 뒹굴다 잠이 들기도 했고

농장 주인은 일이 서툰 우리에게 화를 내지 않고 뭐든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으며 

날씨가 좋은 날에는 식탁을 야외로 끌고 나와 꽃병으로 장식하고 노을을 보며 식사를 했다


세계테마기행과 걸어서 세계 속으로를 무수히 보면서 키워왔던 환상이 정말 헛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유럽의 아름다움은 더러움과 불편함으로 완성된다는 사실을 

나는 다시 한 번 뼈저리게 깨닫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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