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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민혜 Jun 20. 2024

정오의 커피

묘하게 아침을 시작하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할 일을 모두 미루고 그냥 쉬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어머니의 눈치가 보여서 윤은 결국 오전 나절부터 유학원에 나와있었다. 오전 수업 시간 동안에 윤은 계속 졸기만 했다. 양쪽에 앉아있던 윤의 친구들이 가끔 윤을 깨워주었고 윤은 다시 고개를 떨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도무지 안 되겠다는 듯 윤은 밖으로 나가서 바람을 쐬었다. 그리고는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허리춤에 물기를 슥슥 몇 번 닦았다. 안이 투명하게 비치는 두꺼운 유리문 너머로. 사람이 꽉 차면 30명 정도 앉을 수 있는 소규모의 강의실에는 책상과 의자가 왼쪽, 오른쪽 양쪽으로 줄지어 서 있었다. 마치 예배당처럼. 쉬는 시간인지 수강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강의실 양 옆에는 책상들이 정리되어 있고 강의실 중간은 마치 런웨이처럼 칠판까지 이어졌다. 



  "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주가 양쪽 어깨를 잡아 안듯이 윤 쪽으로 체중을 실었다. 순간적으로 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아. 뭐야!?" 주의 손을 쳐내며 윤이 짜증 냈다. 강의실에 있는 사람들의 눈이 잠깐 그들에게 머물다. 그리고 윤은 그런 종류의 시선 집중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 주가 되물었다. 주는 손목을 잡았다. 주는 손목을 탈탈 털었다. 그러더니 얼굴이 잠깐 한자 팔자 모양으로 울상이 되었다. 자신이 주의 손목을 세게 쳤는지 아니면 주가 과잉반응을 하는 건지 윤은 헷갈렸다.



 

  "놀랐잖아. 하지 마."  우리가 이렇게 친한 사이야? 하는 말은 윤의 목울대에 울컥했다.



  "내가 더 놀랐다. 윤, 너 좀 그래." 주가 어이없다는 듯 말하더니 싱긋 웃으며 사람들이 잔뜩 앉아있는 한 무리에 끼여 앉았다. 주의 반대쪽에 앉아있던 신이 윤을 보며 옆자리로 오라는 듯 빈 의자를 뒤로 당겼다. 주의 옆자리도 비어있어서 그곳에 앉으려던 윤은 신과 눈이 마주치자 그냥 신의 옆에 앉았다. 신이 윤 쪽으로 기대앉았다. 신과 윤은 제법 친밀해 보였다. 신은 최근에 같이 수업을 듣기 시작했지만 서글서글한 성격 덕분에 반의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다. 신은 역시 낯을 가리는 윤과도 금방 어울렸다. 



  "윤이 놀라게 하지 마. 윤, 너도 너무 신경 쓰지 마." 신이 애교스럽게 말했다. 그러면서 윤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신은 윤의 후드에 달린 끈으로 리본을 묶었다 풀었다 했다. 주는 왠지 그게 거슬렸다. 



  "주는 영어성적 나왔어?" 무리 중 하나가 물었다. 주는 유학을 가고 싶어서 여러 학교에 지원서를 내놓은 상태고 영어성적만 증명하면 갈 수 있는 상태였다. 



  "아직." 주가 말했다. "성적 좀 올려야 해." 주가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좀 만 더하면 되겠지." 윤이 말했다. 



  주는 대답이 없었다.



  "아 그래도 부럽다. 네가 제일 일찍 유학 나가겠네." 신이 주를 보며 말했다.

 


  "어. 내년에 나갈 듯" 주가 웃었다.



  "송별회 해야 하나?" 신이 말했다. 그 뒤에도 주는 윤을 눈을 바로 쳐다보거나 말을 걸지 않았다. 윤도 주가 그러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오후 수업 때도 윤과 주는 서먹하게 나란히 앉아있었다. 신은 윤의 왼쪽에서 노트에 낙서를 하며 장난을 걸었고, 윤은 계속 졸리는지 우중충해 보였다. 



  "그럼, 오늘 수업은 여기까지 하고 남아서 공부할 사람은 하고. 즐거운 주말 보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수업 내내 신이 나있던 강사는 기다렸다는 듯 정시가 되자 수업을 마치고 자기 짐을 주섬주섬 챙겨서 사라졌다. 보통 학생들은 남아서 공부를 좀 더 하고 가는 편이었다. 



   주가 주섬주섬 가방에 노트북과 책을 챙겨 넣었다. 윤은 눈썹을 추켜올렸다. 왜냐고 물으려는 듯 윤은 주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주의 꽉 다문 입매를 보고 기운이 빠지고 말았다. 주는 신과 윤 쪽으로는 눈길을 주지 않으려 하는 듯 보였다. 



  "어디가?" 짐을 정리한 후 한숨을 쉬고 일어나는 주에게 신이 물었다. 



  "집. 먼저 가려고." 주는 역시 짧게 대답하고는 신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서둘러 강의실을 나섰다. 



  "왜 저래.." 신이 턱을 괴면서 말했다. "너는 남을 거지?" 신이 물었다.



  윤은 망설였다.



  "나도 먼저 갈게!" 윤도 가방을 챙겨 강의실에서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적막한 강의실에는 신과 몇몇의 사람들이 남아있었다. 



  복도의 끝에 있는 화장실에서 나오던 주가 윤과 마주쳤다. 윤이 마음을 다잡고 주에게 다가서려고 했다. 하지만 바로 그 순간 주는 윤을 못 본 듯 학원 밖으로 나가버렸다. 



  "주!" 윤이 주를 불렀다. 하지만 주는 그대로 걸어갔다.


 

  "주!" 윤이 다시 주를 불렀다. 얇은 흰 리넨 셔츠가 하늘대며 앞서나갔다. 윤은 주의 가방을 보며 거북이 등딱지 같다고 생각했다. 주는 왠지 더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고 윤은 그에 맞추어 빨리 걸었다. 보도블록 몇 군데가 훌렁 벗겨져있어서 주가 한 번 발을 삐끗했다. 훌렁 벗겨진 인도바닥에는 뭔가 흙 같은 게 깔려있었다. 



  "주, 괜찮아?" 윤이 물었다. 윤의 목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주는 멈춰 서지 않고 계속 걸었다. 사 차선의 도로에는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었고, 둘은 몇 그루의 가로수를 지나쳐 버스정류장까지 걸었다. 버스정류장에서 선 주는 언제 버스가 오는지를 확인하는 듯 고개를 들고 서있었다.


  

  "왜 화났어?" 윤은 주가 화가 난 이유를 도무지 모르겠다는 듯 물었다. 



  "화난 거 아냐." 주가 말했다.



  "왜 그렇게 가버려?" 윤이 다시 물었다.



  "가면 어때서 어차피 각자 갈 길 갈 텐데." 주가 말했다.



  "정말 왜 그러는 거야? 화내야 할 건 나 아니야?? 아까 네가 밀쳐서 넘어질 뻔했잖아." 윤이 억울한 듯 말했다.



  주는 윤을 차갑게 쏘아보고는 다가오는 버스 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버스 와서. 그만 갈게." 그리고 주가 사라졌다. 


  





윤은 누가 놀라게 하는 게 정말 싫었다. 돌진하듯 다가오는 무언가를 미처 피하지 못하는 어떤 순간들을 윤은 불편해했다. 사당의 한 술집에서 일차를 마치고 나오는 길에 갑자기 확 하고 놀라게 했던 오랜만에 만난 고등학교 친구. 식수대 옆을 걷던 내 쪽으로 휙 날아와서 옆머리를 때렸던 농구공도. 윤은 왜 어제 주에게 짜증을 내고 말았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주는 윤이 그걸 싫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놀라게 했고, 그리고 왜 저쪽이 짜증이 난지는 모르겠지만 퉁퉁 대며 사라져 버렸다. 눈을 뜨자마자 윤의 머릿속에 어제의 상황이 동동 떠올랐다. 게다가 커피를 두 잔이나 마셔서 잠도 설쳤다. 심통 난 주의 모습이 그려졌다.


  어차피 학원에 모인 사람들은 유학을 가려고 모인 것이라 조금 지나면 모두 뿔뿔이 흩어질 것이다. 윤에게 학원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이별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굳이 사람들과 잘 지내보려는 생각도 없었다. 어쩌다 같이 공부하고 밥을 먹게 된 친구들이 있긴 하지만.



  전화벨이 울렸다. 주였다.



  "응, 주."



  "바빠?" 주가 말했다.



  "아니." 윤이 시무룩한 채 대답했다.



  "잠깐 나올래?" 주가 수화기 너머로 말했다. 



  윤은 주가 아직 화가 났는지 괜찮은지 알 수 없는 채 주가 기다리겠다는 학원 앞 카페로 향했다. 카페에는 주가 귀에 에어팟을 낀 채 앉아있었다. 주의 갈색머리는 눈썹을 덮고 금방이라도 눈을 찌를 듯했다. 주는 윤이 자주 마시는 음료를 시켜서 노란 나무 탁자에 놓은 채 앉아있었다. 창밖의 나무는 초록의 건강함을 뿜어내고 있었다. 푸름을 배경으로 윤이 성큼 걸어왔다. 윤이 카페 문을 열기 직전 카페 안의 주와 눈이 마주쳤다.



  윤의 머릿속에 문득 '주가 저렇게 생겼었나.'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좀 자란 것 같았다. 윤이 주 앞에 털썩 앉았다. 윤의 이마에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주는 여전히 웃지 않았다. 윤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윤은 주를 마냥 기다렸다. 



  "마셔." 주가 말했다. 윤은 음료수에 빨대를 꽂고 한참 마셨다. 그러더니 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눈싸움이라도 하려는 듯 주를 쳐다봤다. 주는 잠깐 윤을 쳐다보다 눈을 내리깔았다.



  한참을 망설이던 주가 말했다. "신과 그렇게 달라붙어 있지 마." 한참 끌며 말한 것 치고 주는 제법 급한 호흡으로 한마디를 내뱉은 듯했다. 



  "뭐?" 윤이 되물었다. 



  "신과 붙어있지 말라고, 같이 다니지 말라고." 주는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말했다.



  "..." 윤이 대답을 망설이는 동안 주의 미간에 주름이 갔다. 하지만 금방 윤은 "그래."라며 싱겁게 말했다. 



  "왜인지 안 물어봐?" 주가 말했다.



  "응. 놀지 말라면 안 놀면 되지." 윤이 대답했다. 



  "허." 주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리곤 "네가 신이랑 너무 친해 보여서 나 진짜 혼자 소외된 기분이었어."



  "너 친구 많잖아." 윤이 컵에서 빨대를 빼더니 남은 음료를 쭉 들이켰다. 윤은 주의 눈을 쳐다보지 않았다. "그리고 다 친구 사이에 그런 걸 가지고 화를 냈대."



  "근데 너는 모르잖아. 요즘 들어서 계속 신이랑만 웃고 떠들고, 나 혼자 남은 기분이 얼마나 싫었는데." 주가 우다다 말했다.



  "그래? 그럼 같이 놀지. 왜 삐졌대." 느긋하게 말하는 윤도 주의 말에 지지는 않았다. "주, 나도 어제 좀 속상했어. 니가 그렇게 가버려서." 윤이 덧붙였다. 



  주가 한참 말없이 앉아있었다. 윤이 어색한 듯 삐걱거렸다. "미안." 주가 말했다.



  "나도 미안하다고 그냥 가버려서." 주가 말했다. "그리고 신이랑 놀아도 돼. 내가 니 친구 관계를 뭐라 할 입장은 아니지."


 

  "그건 그렇지. 입장을 바꿔보던가." 윤이 말하고는 주를 빤히 쳐다봤다.



  "무슨 말이야?" 주가 물었다.



  "뭐라 할 입장이 아니라며, 뭐라 할 입장이 되어보면 어때?" 윤이 장난스럽게 주를 쳐다봤다.



  "그냥 내가 계속 뭐라고 해도 돼?" 주가 말했다.



  "그전에 관계정리가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윤이 말했다.



  "우리 둘 다 유학 가잖아." 주가 말했다.



  "그래도." 윤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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