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조금씩 길어지고 있었다.
겨울은 거의 다 지나 있었고,
따뜻했던 날들의 끝자락이
조용히 접히고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그녀와 처음 옆자리에 앉았던 날이
어제처럼 선명한데도,
우리는 어느새
같은 교실에서 마지막 수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계절은 몇 번이나 바뀌었고,
둘 사이의 말은 여전히 적었지만,
함께 쌓인 시간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존재했다.
수업이 없는 날,
책상 위에 쌓인 서류들을 바라봤다.
졸업 관련 서류, 귀국 신청서,
군 입대를 위한 준비 문서들.
모두 필요한 것이었고,
모두 현실이었다.
하나씩 꺼내 펼칠 때마다
나는 조금씩 이별을 손으로 만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와의 시간은
겉보기엔 예전과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같은 자리에 앉았고,
여전히 말없이 서로를 곁에 두었다.
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우리 사이에 흐르던
그 조용한 따뜻함이
조금씩 식어가고 있다는 걸.
아니, 어쩌면
그 따뜻함을 유지하기 위해
서로가 애쓰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날, 그녀는 나보다 먼저 교실을 나갔다.
나는 멍하니 앉아 있다가
처음으로 따라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일어나지 않았다.
움직이지 않았다.
귀가하는 길,
나는 편의점에 들렀다.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괜히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그날 밤,
나는 천천히 캐리어를 꺼냈다.
이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
지니고 왔던 가방.
이제는 그 속에
돌아갈 준비를 담아야 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짐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가져온 것보다,
놓고 갈 것이 더 많을 것 같았다.
캐리어 안엔 옷과 책,
낡은 노트와 반쯤 닳은 필통.
하지만 넣을 수 없던 것들이 있었다.
웃음이 묻은 목소리,
전하지 못한 짧은 손짓,
마주 보았던 순간들의 떨림.
그리고
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