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고 싶지 않아서 태어나지 않은 아이. 태어나지 않았으니 아무 상관이 없는 아이는 우주 한가운데 별 사이를 걸어다녔지. 별에 부딪혀도 아프지 않고, 태양 가까이 다가가도 뜨겁지 않았어. 그 아이는 지구에 와서도 계속 걸어다녔어. 마을에 닿았을 때였어. 한 여자아이가 강아지를 데리고 공원에 왔네. "안녕?" 인사했지만 대답하지 않았어. 태어나지 않았으니 아무 상관이 없었거든.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따라온 강아지가 여자아이의 엉덩이를 물었어. "엄마, 엄마!" 여자아이의 엄마가 달려왔지. "괜찮아, 괜찮아." 엄마는 울먹이는 여자아이를 달랬어. 태어나지 않았으니 아무 상관이 없었지만,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여자아이를 총총 따라갔어. 엄마는 여자아이를 깨끗이 씻기고, 약을 바른 다음 엉덩이에 반창고를 딱 붙여 주었어. 태어나지 않은 아이도 반창고가 붙이고 싶어졌어. 사자도 무섭지 않고, 향긋한 빵 냄새엔 미동도 않더니 말이야. 태어나지 않은 아이도 "반창고, 반창고!" 하고 외쳤어. "엄마!" 태어나지 않은 아이는 마침내 태어났어.
사노 요코의 그림책 <태어나는 아이>를 다시 꺼내 읽었다.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는 게 얼마나 용기 있는 일인 줄 아니.
며칠 전, 그 문장을 쓰고 '용기'에 대해 생각했다. 아이는 울면서 태어난다. 정확히는, 잘 울어야 건강하다. 태어난 아이는 한동안 울기만 한다. 미간에 잔뜩 힘을 주면서. 눈썹 주변이 새하얘지도록. 이제 막 태어난 아이를 품에 안기 전까진 몰랐다. 싸는 것도 먹는 것도 최소한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이는 용케 해낸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태어났으므로. 태어난 아이이기 때문에 해낸다.
어른은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기 위하여 용기가 필요하지만 아이는 그렇지 않다. 태생이 엉엉 운다. 용기를 품고 태어났으니까. 자기 몫의 용기를 온몸으로 보여주니까. 그러니 존재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용기 있나. 우리는 다 그렇게 용감한 존재였다. 태초의 나로 돌아간다는 것.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내가 된다는 것. 우리가 그토록 나 자신이 되길 바라는 건 타고난 용기를 회복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태어난 아이>의 끝엔 밤이 찾아온다. 태어난 아이는 잠옷을 입고 엄마에게 말한다. "이제 잘래. 태어나는 건 피곤한 일이야." 엄마는 웃는다. 태어난 아이를 꼭 껴안고 잘 자라 입 맞추면서. 타고난다는 건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매일 매 순간 새로 태어난다는 뜻이기도 하다. 타고남과 태어남은 떼어낼 수 없다. 타고났기에 태어나고, 태어났기에 타고 난다.
오늘 아침, 수의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 눈앞에 소방차가 섰다. 소방차다! 내가 말하기 전에 수는 이미 소방차를 보고 있었나 보다. 창 너머에서 네 명의 소방관이 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 손짓에 당황한 내가 수를 보았다. 부끄러운 수가 용기를 내어 활짝 손을 흔들었다. 아이를 향한 친절이 감사해서, 나도 활짝 활짝 손을 흔들었다. 떠나기 전, 소방관 분들이 거듭 손을 흔들었다.
그 일이 뭐라고 아침 내내 기분이 좋았다. 이번엔 '친절'에 대해 생각했다. 타고나지 않았음 태어나면 된다고. 용기든 친절이든 오늘 내 몫의 그것을 베풀면 된다고. 이미 나에게 있음을 알기만 하면 된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태어난 아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