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기 153일 차] <니체의 인생수업> <사라질 것 같은 세계의
뭔가를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은 명쾌함을 추구한다
니체는 말한다.
깊은 것과
깊이 있어 보이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불분명하고 모호한 것에 현혹될 때가 있다.
때로는 그것이 깊이 있어 보이기에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하지만 진정한 깊이는 시간이 지나야 존재를 드러낸다.
내가 허욱적 거리고 있는 감정의 늪도 어쩌면 내 발목밑에 오는 별거 아닌 웅덩이 일지 모른다.
그 순간 그냥 나는 빠져들어 숨고 싶었던 것뿐일지도.
사람이 자기만의 의견을 정립하는 것은 양어장 주인이 물고기를 소유하는 것과 같다는 문장이 있다.
양어장 주인(자기만의 의견을 정립하고자 하는 자)은,
물고기(의견)를 확보하려면 먼저 낚시(경험)하러 가야 하고,
운 좋게 물고기를 낚아야 한다.
그러면 살아 있는 물고기, 즉 자기 의견을 건질 수 있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진열장에 물고기 화석을 넣어두는 것으로 만족하곤 한다.
자신이 갖고 있는 신념에 안주하고 더 이상 새로운 사고와 경험을 찾지 않는다.
그저 진열장에 넣어둔 물고기 화석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 물고기를 낚을 준비가 되었는가?
어떤 물고기를 만나고 싶은가?
그런데 왜 움직이지 않는가?
사타 슈 마유
월식 : 개구리가 달을 삼키는 것
미얀마, 중국, 인도 등에서 쓰이는 언어로 세계 인구 중 65만 명이 사용한다고 한다.
그림 속 개구리가 달을 삼킨다.
세계 여러 나라에 이처럼 동물과 달을 연결해 만들어지는 이야기들이 있다.
중국에서는 용이,
북유럽에는 늑대가 달을 삼킨다.
우리나라는 달을 삼키는 동물대신에 토끼 두 마리가 방아를 찧고 달에 살고 있다.
누가 처음 달을 보고 토끼를 떠올렸는지 모르지만 어려서 들었던 이야기는
40년이 넘는 지금도 달에 대한 나의 세계관을 지배하고 있다.
그림처럼 개구리가 달을 삼키는 월식이 되면
달에 살고 있는 토끼 두 마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토끼들은 고래 뱃속에 들어간 피노키오처럼 개구리 뱃속에서 계속 떡방아를 찧을까?
그렇다면 월식이 끝나는 이유는,
뱃속에서 계속 울리는 토끼들의 떡방아질 때문에
속이 울렁거린 개구리가 달을 도로 뱉어내기 때문이 아닐까?
히라이스
더는 돌아갈 수 없는 곳에 가고 싶은 마음
히라이스...
뭔가 마음이 먹먹해지는 말이다.
지금 이 순간 돌아가고 싶은 풍경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여름방학이면 나는 시골에 갔다.
방학마다 바쁜 어른들은 나를 시골 할아버지댁에 맡겼다.
산아래 위치한 할아버지댁의 툇마루에 올라서면 까치발로 마을 앞바다를 볼 수 있었다.
작은 배를 타고 물고기를 잡으로 간 할아버지를 무턱대고 기다리는 일이 나의 오전 일과였다.
나는 툇마루에 누워서 떠가는 구름을 보거나 풀 뜯는 소들의 울음소리를 간간히 자장가처럼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면 개구리들이 요란하게 울었다.
그럴 때면 나는 엄마의 무덤을 바닷가 모래사장에 만든 청개구리의 전래동화가 떠올랐다.
내일 비가 오려는 걸까?
나는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커지는 밤이면 나만의 일기예보를 예측했다.
어쩌면 그 시절 내가 들었던 개구리의 울음소리는 어떤 예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훗날 내가 아빠의 죽음 앞에서 흘릴 수밖에 없었던 죄스러운 눈물의 징조 같은...
오늘은 달을 삼킨 개구리 때문인지 내 사고가 기승전결 '개구리'로 점철된다.
그래서 슬쩍 얼마 전 만들었던 노랫말을 이곳에 두고 간다.
브런치 연재 <세상에 스미는 노랫말을 씁니다>에 [푸른 밤 우물 안] 노래를 오랜만에 다시 들어봐야겠다.
[푸른 밤 우물 안]의 개구리는 어찌 됐을까?
이 노래는 듣는 이 마다 슬픈 엔딩인지 열린 엔딩인지 의견이 갈리지만
나는 오늘 내 노랫말에 서사 하나를 더 다해 본다.
우물 안 개구리는 보름달을 삼켰기에 더는 혼자가 아니라고!
세상에 고독한 이들을 위해 만든 노래.
언젠가 세상에 외로운 누군가에게 닿을 노래.
오늘은 외로운 그 누군가가 나인 것 같지만...
달을 삼킨 개구리처럼 더 이상 외롭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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