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믿는다는 마음
이 이야기는 20년 넘게 우울증 환자로 살아오다 설거지와 홀서빙 아르바이트를 하며 삶을 일으키는 아이넷을 키우는 주부의 이야기입니다. 내향적이고 소심한 사회초년생일 때 겪었던 직장 내 트라우마로 사람들과의 관계에 자신이 없는 제가 용기 내서 세상밖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을 쓰고 있습니다.
허드렛일을 하며 저를 일으키고 그 허드렛일의 고단함을 허튼 생각으로 뽀드득거리게 씻는 중입니다.
나는 바보다. 헛 똑똑이다.
머릿속에서는 아.. 이거 아닌데... 하는데 입은 그 사이를 못 참고 엉뚱한 대답을 한다.
오늘도 오전에 아르바이트하는 식당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
9:30분에 출근해서 내가 가장 기다리는 말은 "그래씨~ 밥 먹고 합시다~"라는 홀 이모들의 말이다.
나는 주방보조이자 설거지를 하는 아르바이트생이고 식당 매장에는 오래된 박주임 님과 2인자 언니가 일한다.(홀 이모 중에 카리스마 박주임 님의 뒤를 이은 2인자 이모이자 "인자"한 성격이라 나 혼자 속으로 부르는 이모의 애칭이다.)
박주임 님은 우리나라 모대통령과 이름이 같아서 가슴에 붙어있는 이름표만으로도 주눅이 드는데 칼 같은 말투와 빠릿빠릿한 일처리는 흡사 그 대통령의 먼 친척이라 같은 피가 흐르는 게 아닐까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여하튼 출근한 지 한 시간 만에 앉아서 먹는 뜨끈한 아침밥은 그야말로 꿀맛이다.
하지만 그 꿀맛을 쓴맛으로 바꾸고 뽀얀 쌀밥이 모래알처럼 느껴지게 하는 박주임 님의 한 마디가 있었다.
"혹시 은행에서 바로 50만 원 입금해 줄 사람 있어? 내가 바로 현금으로 줄게. 보험료가 못 나갔다고 해서 바로 통장에 넣어야 될 것 같은데." 맞은편 2인자 언니는 알 수 없는 미소로 답이 없다.
순간의 정적.
나는 그 순간을 못 참고 "어... 어... 제가 해드릴게요..."말하며 어느새 휴대폰 은행 어플을 열었다.
비루한 나의 통장 금액에 50만 원을 박주임 님 통장으로 이체한다.
비밀번호를 누르면서도 '아... 이거 아닌 거 같은데...' 계속 나 스스로를 원망한다.
그렇다. 화장실에 다녀오는 나를 향해 들리는 박주임 님 목소리 "어쩌지 그래 씨? 저녁에 부조금 내야 될 게 있어서 봉투에 담아뒀는데 침대 위에 올려놓고 왔나 봐. 내가 월요일에 줄게.."
"아... 네. 괜찮아요. " 여기서도 바보 같은 나 또 출현. '하나도 안 괜찮은데... 널 속인 거잖아. 애초에 바로 준다는 봉투 속의 50만 원은 있지도 않았다는 거 너도 눈치챘잖아.'
박주임 님이 돈을 이체해 달라고 부탁했을 때 예전에 아르바이트로 오전 홀업무를 봤다가 박주임 님과 틀어져서 그만둔 이모의 말이 어렴풋이 기억났던걸 난 애써 무시했었다. 사람은 겪어봐야 아는 건데 그 이모가 박주임 님한테 자신이 선물도 많이 하고 돈도 많이 썼는데 자신에게 서운하게 했다고 말했던 건 그 이모 입장이니까.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봐온 박주임 님은 본인 일에 칼 같은 성격이고 똑 부러지는 사람이니까 돈 셈에 흐린 사람은 아닐 거야. 그럴 거야.
나는 얼마 전 유발하라리의 <사피엔스>라는 책에서 읽은 인간의 진화와 "험담"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험담은 필요한 정보를 얻고 위험을 감지하고 피하기 위해 발전되었다는... 나는 그 이모가 얘기한 박주임 님의 험담을 더귀담아 들었어야 하는 걸까?
머리가 복잡하다.
내가 박주임 님을 너무 믿은 걸까?
과연 나는 50만 원을 월요일에 돌려받을 수 있을까?
내 돈 50만원도 돌려 받고 내가 사람을 믿는 마음이 틀리지 않았다는것도 인정받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