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예술은 처절할까. 장기하는 싸구려 커피를 마시지도 않아 놓고서 왜 싸구려 커피를 마시는 젊은이를 노래한 걸까. 설렁탕을 먹지 못하고 죽어버린 아내에게 호통을 치는 능력 없는 남편 이야기는 어째서 평생을 머리에 남아있는 걸까. 비너스의 탄생처럼 고귀하고 아름다운 장면보다 죽어버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의 탄식이 더 성스러워 보이는 이유는 뭘까. 고통, 질병, 전쟁, 죽음을 어떻게든 피하고 싶어 하면서 겸허히 받아들이는 초월은 왜 더 경건해 보이는 걸까. 그 초월이 그렇게도 어렵다는 걸 알면서도 그 고통을 온몸으로 받아내는 모습은 왜 처절해 보일까. 그것들은 어째서 글이 되고 노래가 되고 그림이 되어 예술이 되는 걸까. 그리고 인간은 왜 그 예술을 즐기는 걸까. 남의 불행이 내 것이 될 수도 있음을 알면서도.
신도 인간을 이렇게 계속 찾아다닐 것이다. 그래서 집을 잃어버렸을 것이다.
아프냐고 물어주길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 잃어버렸을 뿐 유실물 보관소의 물건들은 누구도 버린 적이 없었다.
임솔아, <승강장> 중
예술을 퍽 좋아한다. 예술에 대한 동경이었다. 소위 문외한이라 예술의 ㅇ자도 모르면서 감히 그래왔다. 그래서 예술의 소유권에 대해 가끔 생각했다. 예술은 결국 만드는 자의 전유인가, 향유하는 자의 전유인가. 선뜻 해답을 내놓지 못한 채 그 누구의 것도 아닐 수도, 그 누구의 것일 수도 있는 것에 대해 의문스러워하면서도 아무튼 어떤 방식으로든 내 것이 되길 바랐다.
온 생애로 예술을 갈구했으나 예술의 형태를 띠지 않은 삶 속 고통을 예술로 바라보지 못하고, 예술의 형태를 띠지 않은 삶 속 사랑을 예술로 바라보지 못했다. 행운과 불운, 행복과 불행의 서사를 오래 탐구했으나 어떠한 정의도 내리지 못해 예술로 직조하지 못했다.
이 책을 읽으며 어쩐지 예술에 대한 반추를 거듭한다. 그동안 어렵게 좇지 않아도 되었음을, 결국 인간의 삶 자체가 예술이었음을 나는 깨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