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verano [여름] :한 해의 네 철 가운데 두 번째 철

by 잊쑤

여름이다


문학적으로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 왔다.


"바다의 끝은 보이지 않았고, 파도는 하얗게 부서졌다. 여름날의 바다는 푸르름 속에 깊이를 숨기고, 햇살을 머금은 물결은 끝없이 반짝였다. 나는 그 바다를 바라보며, 마치 나 자신이 그 끝없는 푸름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아찔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 박완서, 『나목』


현재 책을 읽고 있는 나를 감싸고 있는 계절과 책 속의 주인공을 감싸고 있는 계절이 다른 경우를 좋아한다. 서로 다른 계절감이 만들어내는 상상은 책 속에 더 깊게 빠져들게 한다. 특히 여름을 표현한 구절을 읽으면, 다른 계절과는 달리 찬란하고 아련한 필터가 쓰인 장면들이 펼쳐진다. 아릿하면서도 몽글몽글하고, 슬프면서도 찬연하게 그려지는 여름 장면들이 퍽 마음에 든다. 그래서 나는 여름 표현 조각들을 좀 더 열심히 주워 담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름을 좋아하지 않는다.

여름이 만들어주는 문학적인 나의 모습은 좋아하지만, 여름 자체는 좋아하지 않는다. 이유는 딱 두 글자다.

'더' '워'


덥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지만 좋은 계절, 여름


당장 내일 죽는다면, 어떤 음식을 먹을 것인가?

나는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수 있다.

비빔냉면과 아이스크림


내 몸 지방의 85%는 이 두 음식 덕분에 만들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른 가족들은 고기를 먹기 위해 고깃집으로 외식을 가지만, 나는 비빔냉면을 먹기 위해 외식에 따라나선다.

아이스크림은 우리 집 냉동고 한켠에 365일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좋아하는 음식도 눈치를 보며 먹어야 하는 때가 있다. 바로 겨울이다.

찬 기운이 돌기 시작하면, 내가 좋아하는 비빔냉면과 아이스크림은 환영받지 못한다. 내가 두 팔 벌려 그들을 껴안으려 할 때마다 어김없이 들려오는 잔소리.

"보는 사람까지 추워진다!"

그러나 여름이 오면 비빔냉면과 아이스크림은 두 팔 벌려 환영을 받는다.


여름을 더워서 좋아하지 않지만,

여름이 더워서 좋기도 한 이유다.



비가 주는 특별함

비 오는 날이 많은, 여름


여름에 비 오는 것이 참 좋다.

비 비린내와 흙 비린내가 섞여 온 세상에 은근하고 묵직하게 깔려있다.

덕분에 커피 향이나 빵 냄새에도 비릿함이 묻어 평소보다, 더 향이 풍부해진다.

덕분에 커피 향이나 빵 냄새에 무게감이 더해져 평소보다 오랫동안 내 곁에 머문다.


비 오는 날에만 나오는 나의 감성적인 면도 참 좋다.

짧은 글이라도 쓰기 위해 카페에 나갈 때면 이어폰과 아이패드를 챙겨 나선다.

하지만 비 오는 날은 펜과 종이만 들고 나선다.

카페에서 틀어주는 잔잔한 음악소리에 하모니를 이루는 빗소리면 충분하다.

손끝으로 아이패드를 치는 톡톡 소리보다는 펜과 종이가 만나는 사각사각 소리로,

나도 이 앙상블에 살며시 참여해 본다.

솔직히 비 오는 날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진 실내에 앉아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긴 하다.

하지만 이런 감성적인 글을 내놓은 만큼, 이런 노골적인 진실은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다.


여름을 보내주는 방법

기꺼이 맞이하는 이별, 여름


여름의 끝자락,

누군가는 아쉬움에 여름의 옷깃을 손끝으로 아스라이 잡아보려고 하겠지만, 겨울을 사랑하는 나는 기꺼이 여름을 보내준다. 내년이면 다시 돌아올 여름이기 때문에, 나의 기꺼움에 서운해하지 않게 노래를 들려주며 보낸다. 특별하면서도 여름이 떠오르는 노래인, 방탄소년단 RM의 'love'을 들려주면서.

RM의 곡들은 가을께의 서늘함이 코끝에 스치면 꺼내 듣는다. 노래에 어떠한 계절감이 담겨 있지 않더라도, 그의 감성은 가을에 더 깊이 빠져들게 만든다.

그런데 유독 RM의 'love'라는 곡은 여름의 부드러움에 청량감 한 방울이 더해진 듯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이 곡은 가을보다는 여름의 끝자락에 꺼내어 듣는 유일한 곡이다. 그러니 얼마나 특별한가.

이렇게 특별하게 여름을 배웅하며,

내년에 돌아올 때는 조금 더 늦게, 조금 더 덜 덥게 돌아오기를 마음속으로 바란다.


6월, 7월, 8월

더위에 취약한 내가 제일 힘들어하는 달(月)이지만

내가 가장 잊지 못할 추억이 있는 달(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