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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 빗소리 Nov 25. 2023

오래전 소설을 다시 읽은 밤

VOL.10 / 2023. 11월호. 편집장의 단상_1

* 4주 차에 발행되는 눈꽃 작가의 에세이는 작가의 사정으로 두 달간 쉽니다. 다음호는 새해에 다시 돌아올 예정입니다. 11~12월호는 '편집장의 단상'으로 대체합니다.




오래전 소설을 다시 읽은 밤



 오래전 소설을 다시 읽어보았다. 오래전이라고 썼지만, 십사 년 전 나왔던 어느 작가의 소설집이었다. 십 년이 넘는 시간은 인간의 생을 기준으로 오래됐다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문학의 시간에서는 그리 길지 않은 두께이리라. 그래도 어쨌든 그 소설은 이십 대 중후반 나와 늘 함께 했기에, 마흔이 넘은 내 인생의 시곗바늘에서는 언제나 오래된, 청춘의 고전 같은 소설일 터. 그 소설집이 발행된 때는 2009년의 여름이 끝나가던 9월 즈음이었다. 표지를 넘기니 속장 가장자리에 "자꾸, 끊임없이, 생각하라고 말한다. 천천히 가을을 읽고 싶다. 2009.9.12."라는 스물여섯의 짧은 메모가 적혀 있었다.


 십몇 년 만에 다시 펼쳐본 소설이라서, 큰 줄거리는 기억이 났지만 세부적인 내용들은 가물가물했다. 오래전 읽은 책들은 사실 대부분 기억에서 사라졌는데, 그 소설은 그래도 당시 몇 번을 반복해서 읽은 까닭에 큰 줄거리만은 간직할 수 있었다. 왜 그토록 자주 읽었을까.

 그 소설은 아마도 당시 캄캄하고 어두운 젊음을 지나던 나를 위로했기 때문이리. 대단한 내용은 아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로 시간을 때우던 스물다섯의 주인공이 지역도서관 독서 모임에 들어가서 겪는 이야기, 거기서 알게 된, 일찍 세상을 등진 젊은 시인의 막다른 사랑과 세계의 끝에 관해 생각해 보는, 비교적 간단한 줄거리였다.

 그 짧은 소설이 그 시절 나를 위로할 수 있었던 건, 소설의 주인공처럼 이십 대의 나 역시 사랑에 실패하고 똑같이 미래를 방황하던 청춘이었기 때문이다. 책 속에 등장하는 요절한 시인이, 그의 사랑과 함께 도망치고자 했던 세계의 끝이, 겨우 동네 호수공원에 서 있던 메타세쿼이아 한 그루 밑이었다는 사실이, 청춘의 사랑들이 함께 걸었던 최대한의 그만큼이 그들 세계의 끝이었다는 호기로운 메시지가, 모두 나를 사로잡았기 때문이리라. 나는 소설을 따라 한 문장 한 문장을 음미하며 천천히 그 시간들을 걸어갔을 것이다. 걷고 걸었던 문장의 골목들을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며, 여러 가지 감정 속 스스로와 세상에게 많은 말들을 걸어보았을 터.

   

 제법 많은 시간들이 지나고 나는 나이를 먹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다. 안정된 직장이 생기고, 함께 미래를 그리는 새로운 사랑을 만나, 꿈꾸던 작은 목표들을 이루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자연스레 그 청춘의 소설 속 밑줄들은 내게서 잊혀졌다. 내용은 어느 정도 기억나지만 제목을 모르는 옛 드라마처럼, 이름은 떠오르지 않지만 여러 표정으로 스쳐간 배경이 된 인물들처럼.  

 오랜만에 다시 읽은 그 소설에 대한 느낌은 낯섦과 당황스러움이었다. 몇 번을 감탄하면서 읽었던 아련한 문장들과 쓸쓸한 사랑에 대한 위로, 환희, 슬픔, 어둠 들은 모두 사라졌다. 어색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젊은 인물들의 행동과 대화. 그들은 그대로인데, 홀로 변해버린 지금의 나. 세월이 흐른 걸까. 나이가 들어 이제 공감할 수 있는 감수성이 모두 메마른 걸까.

 그러나 나는 그 오래전 소설에도, 변해버린 내 모습에도 실망하지는 않는다. 혹시라도 그럴리는 없겠지만, 지하철 플랫폼에서 우연히 만난 옛 연인의 달라진 겉모습이나 그의 새로운 가족에 대하여 놀라지 않는 것처럼. 모두에게는 창고에 버려진, 혹은 두꺼운 먼지를 뒤집어쓴 책장 속 잊혀진 단편쯤은 있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그런 여러 가지 문장들을 읽고 살아가면서 나는 새로운 문장으로, 여전히 쓰여지는 연재소설 속, 또 다른 삶을 살아가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을 테니까.


 오래전 소설을 읽던 그날처럼 여전히 묻는다. 나는, 우리는 끝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인가. 거친 바람과 빗줄기를 먹고 자라던 초록의 싱싱한 이파리들, 그들을 따라 오르던 밤거리의 어느 돌계단, 언덕 위에서 바라본 글썽이던 도시의 불빛이여. 아주 조금씩 바스락거리며 떨어지는 낙엽의 계단들을 따라 천천히, 조금씩, 우리는 내려오기 시작했을까. 이 계단의 끝은 어디인가. 여전히 가보지 못한 또 다른 골목으로 옷깃을 잡아끌 텐가. 아직은 알 수 없다. 나는 다만 걸어갈 뿐. 이 계절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세계의 끝이 대체 어디이고 무엇인지.

 


<숨 빗소리_ 11월_ 편집장의 단상>


숨 빗소리 - 발행인 겸 편집장. 스쳐가는 장소에서 건져 올린 시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세상과 사랑에 대한 생각과 느낌들을 시와 산문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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