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만 가능한 게 아닐까?
인간의 삶은 너무 조건 투성이다. 예전이라면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감정이 있을 법한 영역에서도 조건이 자리잡는다.
부모는 여러 자식 중에 더 예쁜 자식이 있을 수 있다. (나랑 닮았다든지, 내가 공감할 수 있다든지, 가장 좋은 성과를 가지고 온다든지, 가장 나를 생각해준다든지)
자식도 부모를 평가한다. 내 친구는 결혼할 때 집에서 도와줬다고 하는데 우리집은 아무것도 없네.
이성을 만날 때에도 조건부터 먼저 확인한다. 외적인 부분부터 직업과 연봉 등을 확인해야 사랑이 생기는 모양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내가 '자랑'에 대한 글을 쓴 것처럼 우리 부모가 나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은 확실히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좋은 대학을 나왔고, 똑부러지게 직장 생활을 하고, 본인들의 기준에 맞는 결혼을 했다. 과연 이런 조건들이 없다면 나를 얼마나 사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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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남편은 나와 결혼할 때 과연 나라는 인간에 대한 사랑만으로 결정을 내린걸까? 그리고 나라는 인간 속에는 여러 조건이 이미 포함이 되어 있을 텐데, 과연 그 조건이 없었다면 사랑이 생길 수가 있었을까? 조건이라는 단어는 어떤 것들을 포함하는 것일까? 외적인 조건 말고 내적인 조건들도 조건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나의 감정과 행동 기준을 곰곰히 살펴보면 조건이 없는 것은 없다. 조건이 전면적으로 내세워지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만, 특정한 대상에 대한 감정과 행동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조건이라는 것이 포함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그런 의미에서 강아지는 대단하다. 강아지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중요하지 않다. 주인이 장애가 있든, 무직이든, 못생겼든, 나이가 많든 강아지는 그냥 주인을 사랑한다. 꼬리치면서 온몸으로 반겨주고 사랑해주는 것을 보면 마음이 사르를 녹아내린다.
스스로의 가치에 대해 끊임 없이 증명해야 되는 삶에서 강아지는 그야말로 힐링의 요소라고 생각한다. 강아지를 한 14년 정도 키웠다. 정확히 말하면 엄마가 키운거고 엄마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은 예뻐만 했던 거긴 했다. 새끼 때는 엄청 사람들을 졸졸 따라다니면서 까불었는데 성견이 되고 나서는 귀차니즘에 빠진 강아지가 되었지만, 그래도 밖에 나갔다가 돌아온 가족들을 반기는 데에서는 전문가였다.
최근에 '털손주'라는 말이 생겼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자식들이 키우는 반려동물을 예뻐하는 모습에서 나오는 말이기도 하고, 혼자 사시는 어르신들이 직접 반려동물을 키우면서 애지중지 하는 모습에서 나온 말이기도 하다. 어르신들은 외롭다. 자식들과 손주들은 다 자기 살 길 바쁘고 자기들끼리 즐거운 일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다. 하지만 반려동물들은 어르신들을 정말 좋아한다. 자기를 그렇게 좋아해주는 생명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일 것이다. 애니멀테라피의 효과는 대단하다.
강아지에게 나는 세상의 전부이다. 인간이 뭐라고 인간을 그렇게 좋아하는 건지.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고, 인간이면서 다른 인간을 조건 없이 사랑할 수 없는 사실이 안타깝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