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 사랑을 만나다
마지막 연인과의 이별 후 도망간 곳이 산티아고 가는 길이었다.
그곳이 산티아고 가는 길이기 때문일까?
나를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곳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이상하지 않은 곳
상처받았다고 티 내도 티 내지 않아도
누구도 그 마음을 모르는 곳
그 먼 데까지 가서 나를 감출 필요는 없었기 때문에 나도 몰랐던 진심이, 본능이 툭툭 튀어나왔다. 진짜 마음이 어떤지도 모른 채 그때그때 마음이 시키는 대로 행동했다. 산티아고로 가는 끝도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수많은 생각을 했고, 수많은 나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다.
그동안 스스로를 잘도 속이며 살았네.
내 속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누구나 겪는 실연의 아픔도 극복하지 못해 도망 다니는
약하디 약한 영혼 같으니라고.
Camino de Santiago(산티아고 가는 길).
하루 평균 25km의 길을 걸었다. 10kg의 배낭을 메고. 처음 며칠은 한국에 두고 온 모든 아픔과 아쉬움들이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매일 자책하고 후회하며 한숨만 쉬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이 길이 맞나? 어떤 빵을 먹지? 바(bar)는 언제 나오지? 오늘은 꼭 똥을 싸야 하는데...’ 등등 온통 걷고 먹고 싸는 일에만 집중하게 됐다. 그리고 무거운 배낭에 짓눌려 부서져버릴 것 같은 어깨, 발바닥에 웅덩이처럼 고이는 물집과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똑 부러질 것 같은 무릎의 극심한 통증 속에서 지난 삶의 고통은 무색해져 갔다.
그렇게 열흘을 걷자 그때부터 풍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넓은 밀밭과 해바라기 숲, 거대하면서도 아기자기한 구름, 땀을 훔쳐가 줘서 무한 감사하게 되는 바람, 그리고 그것들과 어우러져 하나의 작품을 완성시켜 주는 소와 말과 양떼들까지.
하지만 이 모든 것들 위에 사람이 있었다.
고통과 아름다움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길 위의 사람들.
어두운 새벽길에 길을 잃어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 귀신처럼 아니 천사처럼 나타난 이태리 모녀, 찐한 몸살 때문에 1km를 한 시간 동안 걷고 있던 나를 돕기 위해 10km를 되돌아와 배낭을 들어준 영국 유학생, 베드 벅스(bed bugs)에 물려 얼굴과 팔다리에 사마귀 같은 물집이 돋아난 흉한 내 모습을 안쓰러워하며 알아듣기 힘든 스페인 영어(?)로 날 다독여준 스페인 아줌마.
산티아고 가는 길을 걸으며 무수히 많은 사람들을 만나 사랑을 받았다. 말하지 않았는데도 사랑을 잃어 외롭고 슬픈 나를 알아보기라도 한 것처럼 다가와 준 그들. 그래서 나도 다른 이들에게 천사가 되어 주었고, 누구를 만나든 그는 나에게 구원이 되었다. 스스로를 속여왔던 약하디 약한 영혼을 일으켜주었다.
수많은 나와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나에게 알려준 '진짜' 사랑. 알고 보니 더 찌질하고 더 진상인 나를 대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나눠준 사랑꾼들. 사랑을 떠나보내고 진짜 사랑을 배우게 된 산티아고 순례길을 지금도 걷고 있는 이유다.